[그린경제=서한범 문화전문기자] 앞에서는 김세종제 춘향가를 이어받은 정응민의 제자로 조상현 명창의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열두어 살 무렵 마을에서 단가와 춘향가 토막소리를 배운 뒤 정응민 선생 댁을 찾아가 집안일을 도우며 일곱 해 동안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등 세 바탕소리를 익혔다. 소년명창의 소리를 듣기도 하고 임방울 명창으로부터도“목이 좋은 놈 처음”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그러다가 김명환으로부터 북을 배우면서 소리와 어울리는 북이 재미있어 정작 주전공 분야인 소리의 사설을 잊어버리기도 하여 선생으로부터 혼이 난 이야기도 재미있게 들었다.
선생님께 야단을 맞고 어린 소년은 그 이튿날, 하직 인사도 못 드린 채,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얼마 동안은 모진 맘으로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특히 선생 앞에서 막히기 일쑤였던 “천자뒤풀이” 대목은 무려 1,500번이나 불렀다하니 그의 집념도 보통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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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상현 명창이 소리하는 모습 |
그러면서도 밤이나 낮이나 선생이 계신 회천면 쪽을 향했고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으며 선생 앞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고 한다. 3개월이 지나면서 가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가 없어 선생의 마음이 풀렸을지 아닐지는 가리지 않고 선생 댁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조상현의 기억은 다음과 같다.
“갔더니, 선생님이 무척 기다리셨나 봐요. 하시는 말씀이 ‘진즉 오지 않고 뭣 허고 여태 집에 있었냐’고 하시며, ‘그래 소리 한 번 해 보거라’고 하셔요. 그동안 연습한 것을 막히지 않고 하니까 그제서 마음이 풀리셨는지, ‘소리는 잘 허면 천하의 보배이지만, 그런 보배를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명창, 국창 될라면 논두렁 정기라도 타고 나야 된다. 그러고는 노력해야 돼. 노력 안 허고 그냥 공으로 얻을라고 허면 죽도 밥도 안 된다. 북이야 노력하면 칠 수 있지만, 그래도 너는 소리를 타고 났으니까 소리 쪽을 모든 힘을 기울여라’ 이렇게 말씀 하시드만요.”
이렇게 심한 야단을 맞고 정진한 탓일까 그 영향으로 세 바탕을 떼게 되었다고 기억한다. 조상현은 20살 즈음에 광주의 호남국악원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러면서 호신술 도장에 다니기도 했는데, 그 무렵 그를 보고 아끼던 사람들이, “예술 하는 사람이 운동을 하며 껄렁껄렁 다니는 것은 좋지 않다.”고 충고해 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 후, 조상현은 목포에 정착하면서 목포국악원, 목포문화방송에 정규프로그램을 맡아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박녹주의 은퇴공연을 목포에서 가져 상당히 성공을 거두었었는데 공연에 참가한 이들은 박녹주 이외에 김연수, 박동진, 성창순, 유대봉, 김동식, 헤의만이라는 미국인 소리꾼 등이었다.
그 자리에서 자신의 소리를 듣던 박녹주 명창이 “니 마, 목포에 있기는 아깝다. 니가 목포국악원에 있으면 목포 조상현이 밖에 안 된다. 서울로 오그라.”라고 정중하게 권했다 한다. 결국 이날 박녹주와의 대화가 그를 서울로 옮겨오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박녹주에게서 ‘흥보가’를 배우는 한편, 그는 자신의 입지를 점점 확보하게 된다.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조상현은 큰 무대의 주역이며 방송활동, 각 종 발표회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혹자는 그가 갑자기 부각된 것에 대하여 시류를 잘 탔다고 하나 그것은 극히 부분적인 이유에 지나지 않는다. 좋은 목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데다가 소년시절부터 온갖 고생을 하면서 닦은 그 뒷심 때문에 서울에서 버틸 수 있었다는 평가가 옳을 것이다.
필자 역시 조상현의 춘향가를 매우 좋아한다. 필자는 1980년대 초부터 천안캠퍼스에서 <국악감상론>이라는 강의를 해 왔는데, 조상현의 이 춘향가 음반을 자주 강의 재료로 활용하였다. 새벽에 출근하면서 이 테이프를 들으며 가고 퇴근시에도 이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지금도 초앞이나 주요대목은 흥얼거릴 정도이다.
그의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맑고 힘찬 다양한 목소리, 극중 인물의 성격을 그대로 묘사한 성대, 강약을 살린 가락, 장단과의 호흡 등의 공력이 녹아있고,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아니리 등등이 최고조를 이루어서 다시 듣고 싶은 소리, 막혔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소리로 꼽히고 있다. 그가 말했듯이 바람도 순순하게 불었다가 세차게 불기도 하며, 물소리도 잔잔했다가 금방 파도가 일어나기도 하는 조화를 그 문학적 내용에 맞게 악곡이 따라 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판소리를 통하여 국악의 저변확대와 사회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창극단을 이끌기도 하였으며, 대학에 적을 두기도 하였다. 실기인이면서 이론을 겸하여 강의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른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임에도 그는 고전에 관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문하에 내로라하는 제자들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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