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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문화통신 14] 스물다섯의 선비, 개혁정치를 주장하다

고양 8현, 복재 기준 선생

   
 
[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  “한때 홍문관(弘文館) 동료 중에서 기준(奇遵)이 가장 젊었으나, 문학이 넉넉하여 그 명성이 조광조(趙光祖)에 버금갔다. 강개(慷慨)하여 일을 논하면 고려(顧慮)하는 바가 없었고, 늘 상(임금) 앞에서 언론을 격렬하게 하여 사람들의 귀를 용동(聳動)시켰으나 대신들은 흔히 그를 미워하였다. 이때 병으로 집에 있으면서 상소로 이성언(李誠彦)의 죄를 논하여 중벌에 처할 것을 청하고, 또 대간이 그 죄를 힘껏 청하지 않은 것을 그르다고 하였다. ”  - 중종실록 12(1517) 1030일-

 이는 스물다섯의 선비 복재 기준 (奇遵,14921521)에 대한 이야기이다. 중종 앞에서 이성언을 벌주라고 거침없이 말을 하던 복재 기준의 나이는 불과 25살이었던 것이다. 그보다 3년 전인 22살 되던 해에 그는 사마시험에 합격하여 24살에 홍문관에 임명된다. 이후 사화를 당하기까지 약 5년간 홍문관 박사, 수찬, 응교, 사헌부 당령 등 요직을 거치게 되는데 28살에는 경연시강관이 되어 임금에게 성리학의 핵심 서적인 근사록과 성리대전을 강론하지만 그것이 그의 화려한 정계 활동의 끝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승승장구하던 승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태생이 불의를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성품 때문이었을까? 임금에게 직언하던 그의 서릿발 같던 기상은 그러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불과 29살의 나이에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하루아침에 유배지 아산으로 떠나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산 유배 뒤에 얼마 안 있어 그는 다시 함경도 온성으로 보내지는데 그곳에서  29살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유배지에서의 삶은 처참하였는데 당시 그가 읊은 노래만 봐도 알 수 있다.

흐트러진 머리 한 달에 한 번 빗질 하고
때 절은 얼굴 열흘에 한 번씻는다
음식은 배 채우기 힘들고
의복은 몸조차 못가리운다
(중략)
구멍속의 개미도 제 본성을 다하고
가지위의 뱁새도 참 이치를 갖는데
누가 말했는가 목숨을 보전해야 한다고
애오라지 죽음이 이웃할 뿐
다만 충심이 있어
때때로 늙으신 어머님을 생각한다.

   
 

임금에게 거침없는 상소를 하고 성리학을 강론하던 창창한 선비가 하루아침에 사화에 연루되어 상거지 꼴이 되고 보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절규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 그는 다시 말한다. 

 “옛날 지사들은  몸이 곤고함을 근심하지 않고 도()가 성취 되지 못할까 근심하였고 목숨이 소중함을 염려 하지 않고 혹 죽음이 가벼울까 염려하였다. (중략) 그들은 화복과 영욕을 허공의 뜬 구름과 같이 여겼으니 이 어찌 구구하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모든 일은 관 뚜껑을 덮은 뒤에 정해지는 법! 지난 일은 추궁 할 것 없고 앞날은 무궁하니 개과 천선하고 이 마음을 새롭게 닦아 죽음을 순순히 맞이하면 자신의 할 일은 끝난다. 다시 무엇을 회한하겠는가! 그러므로 이 울타리는 너를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장차 너를 주옥과도 같이 빛나게 하려는 것이니 아! 힘쓸 지어다.

 한줄기 희망으로 위리안치 된 자신을 다독이고 있을 때에 복재 기준을 죽이기 위한 약사발이 전해진다. 의금부도사가 형 집행의 어명을 갖고 오자 복재 기준은 임금의 안부를 물으면서 한편으로 어린 자식에게 충효를 당부하는 편지를 쓰고 목욕재계한 뒤 태연작약하게 숨을 거두었다고 전한다.
 

   
 

복재 기준 선생은 기묘명현
(己卯名賢)의 한 사람으로 조광조와 함께 개혁정치를 주장한 사림파의 한사람이다. 본관은 행주(幸州)이고 호는 복재(服齋)·덕양(德陽)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1513(중종 8) 사마시에 합격하여 이듬해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사관(史官)을 거쳐 홍문관정자에 임명되었고, 박사를 역임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는데 스승 조광조의 노선을 견지했으며, 사경(司經)으로 있을 때에는 임금에게 효제(孝悌)의 도리를 다할 것을 건의하였다
.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를 포함한 김식(金湜)·김정(金淨) 등과 함께 하옥되어  아산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죄가 가중되어 다시 온성으로 이배되었다. 어머니상을 당해 고향에 돌아갔다가 1521년 송사련(宋祀連)의 무고로 신사무옥(辛巳誣獄)이 터져 그만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온성 유배지에서 이웃집 아이가 끓여 먹으라고 준 물고기 몇 마리를 차마 먹지 못하고 물단지에 넣어 기르면서 제자리를 잃은 그 물고기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며  “교룡이 제자리를 잃으니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들이 저마다 그를 학대하려하는구나. 하물며 네 고기를 먹어 배 채우며 살찌려 하는 자들이랴! 물고기들이여! ” 라고 탄식했다고 전한다 

“아우와 함께 학업을 쌓았었는데
풍파의 이별이란 한이 길구려
궁한 운명이 장한 뜻을 저버렸으니
낮은 벼슬 어버이를 위한 것이라오”

   
▲ 기준 선생 필적
이 시는 하서 김인후(15101560)가 기준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시이다. 김인후와 기준은 특별한 인연이 있다. 하서가 9(1518)때의 일이다. 중종 임금의 총애를 받던 기준이 장성 맥동마을에 들어서서 하서를 만났는데 그때 기준이 하서에게 임금의 붓을 주었다고 한다. 김인후는 기준의 형 기진()의 은둔적인 삶을 도연명에 비유 할 정도로 그 인품을 높이 샀으며 기진의 아들이 그 유명한 고봉 기대승이니 기준에게는 조카이다. 

  기준이 죽은 뒤 사화가 진정 되자 주변에서는 희생자들에 대한 신원이 빗발쳤는데 인종 1년인 1545년에 복재 기준은 복관되었고 명종 때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영조 때는 문민공의 시호를 받았다. 그는 시에도 능해 『해동시선』·『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등에 시가 수록되어 있으며 저서로는 『복재집』·『무인기문(戊寅紀聞)』·『덕양일기(德陽日記)』 등이 있다. 온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아산의 아산서원(牙山書院), 고양의 문봉서원(文峯書院) 등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