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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문화통신 16] 퇴계와 고봉의 논쟁을 촉발한 추만 정지운

[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  “그대는 일찍이 바다를 헤아려 보려고 했었다. 나는 울타리를 엿보려고 하였는데 그러나 이 울타리를 엿보는 것도 그대의 도움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대는 실마리만 드러 내놓고 먼저 떠나 나를 어쩔 줄 모르게 만드는가? 이 늙은이 눈물을 금치 못하네.”

 이는 대학자 퇴계 이황이 쓴 추만 정지운의 제문 가운데 일부로 추만 선생의 높은 학덕을 이해하는데 다른 말이 필요 없는 함축적인 말이다. 추만 정지운(秋巒 鄭之雲, 1509∼1561) 선생은 누구인가? 추만 선생은 고양군 출신으로 일찍이 세상에서 공명과 영화를 구하지 않고 처사(處士)로 고요히 일생을 마친 유학자다.

 그러한 추만 선생이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그가 지은 『천명도』를 퇴계에게 보아달라고 부탁하면서 비롯된다. 추만 선생의 ‘사단은 리(理)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氣)에서 발한다’라는 구절을 이황은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사단은 리의 발이고, 칠정은 기의 발이다”. 이 해석을 두고 고봉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 퇴계에게 편지를 보내 맹렬히 비판한다. 이를 계기로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을 둘러싼 8년간의 유명한 논쟁이 일어나게 된다.

   
▲ 사단칠정론을 있게한 추만 선생의 천명도

추만 정지운, 하서 김인후, 퇴계 이황, 고봉 기대승 같은 성리학자들은 『천명도』와 『천명도해』그리고 『천명도설』같은 도해식 연구를 발전시키는데, 이는 중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방식이다. 특히『천명도』와 해설서『천명도해』는 추만 선생이 가장 먼저 시작했다. 천명도의 내용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라는 믿음에 따라 하늘 모양으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안에 땅의 모양인 검은 네모를 그렸다. 거기에 윗부분은 둥글고 아래는 절반의 모난 모양의 사람을 그렸다. 이는 사람의 절반은 하늘모양이고 절반은 땅의 모양으로 사람이 하늘과 땅의 소생이라는 『주역』의 관념을 이어받은 것이다.

사단칠정론의 발단이 된 추만 정지운 선생의 <천명도해>로 교분을 쌓은 퇴계 선생은 그의 사후에 직접 비문을 짓게 된다. 퇴계가 쓴 묘갈명 속에서 추만 선생의 일생을 잠시 엿보자.

 정지운 군은 도성이 숨을만한 곳이 못된다고 생각하여 고양(高揚)의 강가에 땅을 보아두고 가옹(稼翁)이라 칭하고 몸소 경작해 소원을 풀려는 뜻을 보였는데 결국에는 재산이 없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지운 군의 궁핍함이 이와 같았으나 끝내 대수롭지 않은 녹(祿)에 뜻을 굽히지 않았으니 그를, 묘(墓) 사이에서 술과 고기를 구걸하여 만족을 구하려는 자와 견준다면 어떠하겠는가? 만일 정지운 군으로 하여금 시종 엄한 스승과 외우(畏友) 사이에 주선해 그 학문을 확충하게 했다면 그의 학문 수준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정지운 군을 장사지내고 나서 벗들은 그가 평소 자호한 것을 따라 그 무덤을 ‘추만거사지’묘라 표했다. 검열(檢閱) 정자중이, 안홍이 쓴 행장(行狀)과 응교(應敎) 박화숙이 쓴 묘지명을 가지고 와서 명(銘)을 써달라고 청하므로 내가 정(情)으로는 차마 하지 못하되 의리(義理)로는 사양할 수 없어 울음을 참고 명을 쓰노라. 

   
▲ 추만 정지운 선생 무덤

그러면서 퇴계는 묘갈명의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한다.

 "옛날 학문하던 사람들 스승과 벗 없는 이 누구였으리오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 어려서는 스승이 있으나 크면 없네/ 간혹 있다 하더라도 저버리지 않은 자 적으나 스승이 있으되 저버리지 않음을 내 군에게서 보았네 /스승의 상을 부모상같이 하여 종신토록 했고 기이한 품성을 타고나 덕의 훈향(薰香)이 있어 스승의 뜻을 높이 걸고 그 들은 것을 넓혔고 궁구(窮究)해 이른 것이 뛰어나고 공을 끼친 것이 성(盛)하도다(후략)

명종 17년(1562) 5월에 건립한 묘갈(墓碣)에는 ‘추만거사정지운지묘’라 새겨져 있다. 추만의 학문적 세계를 크게 천인합일(天人合一)을 밝히는 우주론, 인간의 마음을 허영(虛靈)으로 보고 이(理)와 기(氣)로 탐구하는 심성론, 타고난 자질 만으로는 인간의 훌륭한 삶이 보장되지 못하며 훌륭한 삶을 위해서는 인간이 무엇을 알아야하고 무엇을 행할 것인가를 이해하는 수양론으로 함축해 볼 수 있다. 조선조 성리학의 발전적 수용과정에서 볼 때 이론적 탐구 측면에서 선구자적 위치를 차지한 추만 정지운 선생은 평생을 운둔자적 위치에서 시끄러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기중심을 갖고 살다간 분이다.

   
▲ 추만 정지운 선생 무덤 앞 안내판, 무덤은 고봉동 안곡초등학교 뒤편

초가을 선선한 바람이 부는 오후 고봉산 아래 습지공원을 지나 안곡초등학교 뒤편으로 걸어가는 길은 하늘이 높고 푸르렀다. 추만 선생 무덤 앞쪽은 고층 아파트 촌이 들어서면서 완전히 조망권을 잃어 조금 답답해 보였다. 하지만 선생 가신지 452년! 이렇게 무덤이나마 찾아 갈 수 있어 다행이다 싶었다. 추만 선생은 고양 8현으로 문봉서원에 제향되어 있다.

고양 8현이란 추강 남효온, 행촌 민순, 사제 김정국, 복제 기준, 추만 정지운, 모당 홍리상, 석탄 이신의, 만회 이유겸 선생을 일컬으며 이들 고양8현(高陽八賢)은 고양의 정신적 지주이자 조선의 올곧은 선비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