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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나석주 열사, "2천만 겨레여 항일투쟁하라" 외쳐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28]

[그린경제/얼레빗 = 양승국 변호사 ]  지하철 2호선 을지로 입구 역을 나와서 외환은행 본점 옆을 지나 명동으로 올라가는데, 웬 동상이 하나 서 있습니다. 나석주 열사의 동상입니다. 나열사라면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열사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에 왜 동상이 서 있을까요? 여기가 동양척식회사 자리인가? 설명을 보니 포탄 투척 후 일본 경찰과 총격전 중 자결한 곳이라네요.

  1926년 12월 26일 나열사는 마중덕이라는 중국인으로 행세하며 인천항을 통하여 고국으로 들어옵니다. 의열단원으로서 백범 김구와 심산 김창숙 선생의 밀명을 받고 귀국한 것이지요. 이틀 뒤 오후 25분 나열사는 식산은행으로 들어가 폭탄을 던졌는데, 폭발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불발인 거죠. 나열사는 다시 동척(동양척식회사)으로 들어가 일인들을 향하여 총을 쏘며 2층으로 올라가 폭탄을 던집니다. ! 이번에도 불발입니다.

  나열사가 밖으로 나와 황금정 2정목(지금의 을지로 1)에 이르렀을 때, 일제의 포위망은 완전히 좁혀졌습니다. 나열사는 일경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마지막 한발을 자신을 향하여 쏘고 자결합니다. 나열사는 자결하기 전 주위에서 숨죽이며 이를 보고 있을 대한 동포를 향하여 외칩니다.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다시 한 번 나열사를 바라봅니다. ! 바로 이 자리에서 당신께서는 35살의 불꽃같은 삶을 조국을 위하여 바치셨군요. 저는 나열사께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가던 길을 계속 갑니다.

   
▲ 그림 한국화가 이무성

  나열사는 고향을 떠날 때 제대로 작별 인사도 못하고 떠났던 부모님, 아내와 자식들을 보고 싶어 처음에는 고향 진남포로 향하다가 일제의 삼엄한 경계로 포기하고 돌아섰었지요. 그리고 죽어서 아들을 만납니다. 아들 나응섭이 아버지 시신을 찾으러 경성으로 온 것이지요. 그런데 일경은 나응섭을 8일 동안 구금하고 고문을 합니다. ‘이런 개XX!’ 아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열사 하면 이 폭탄 투척 사건만 떠올릴지 모르겠는데, 6인조 권총 강도단 사건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난 그 달 하순에 황해도 사리원의 부자 최병항 집에 6인조 권총 복면 강도단이 들이닥칩니다. 그런데 이들은 최부자를 권총으로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절을 하고 조국 독립을 위해 군자금을 마련하러 왔다고 합니다.

  그러자 최부자는 목소리를 듣고 나열사임을 금방 알아차립니다. 최부자와 나열사 아버지 사이에 친분이 있었던 것이겠지요. 최부자는 복면을 벗고 얼굴을 조아리는 6인조 강도 - 나석주, 김덕영, 최호준, 최세욱, 박정손, 이시태 - 들에게 630원을 내놓습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액이지요. 6인조는 다시금 최부자에게 큰 절을 올리고 떠나며 강도 신고를 하라고 합니다. 일경이 눈치 채면 오히려 최부자가 곤란을 당할 테니까요.

  이후 황해도에서는 안악군의 부호 김응석, 원형락의 집이 털리는 등 6인조 연쇄강도사건이 계속 일어났는데, 일경은 결국 이들을 잡지 못합니다. 하지만 수사망이 좁혀와 나열사는 1920년 11월 22일 중국 망명길에 오르지요. 그냥 떠난 게 아니라, 황해도 평상군 상월주재소의 일본 경찰과 은율군수를 척결하고 떠나갑니다.

   
▲ 그림 한국화가 이무성

  그러나 이것이 나열사의 첫 번 중국행은 아닙니다. 나열사는 1913년에도 북간도로 망명하여 4년간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3.1만세운동 전에 다시 귀국했었습니다. 나열사는 다시 망명길에 올라 스승 백범을 만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백범이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에 황해도에 양산학교를 설립하였었는데, 나열사가 이 학교의 학생이었던 것이지요.

  상해로 간 나열사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의 경호원 일을 하기도 하고, 1923년에는 중국 하남성 한단의 중국 육군 군관학교에 입교하여 사관 훈련을 받고 중국군 장교로 임관하여 복무하다가 1925년 다시 상해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1926년 의열단에 입단한 뒤 동양척식회사를 폭파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하였구요. 이후의 활동상황은 위에서 말씀드렸지요?

  나석주 열사! 죄송합니다. 저 자신 분명 그 전에도 당신의 발밑을 지나갔을 텐데, 목적지로만 향하는 바쁜 마음에 당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갔습니다. 거듭 죄송하다는 말씀 올립니다. 당신이 자결하기 직전 2천만 동포를 향하여 외치던 그 절규, 당신의 그 피 맺힌 외침을 잊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