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얼마 전에 의정부 재판 갔다가 의정부 교도소를 거쳐 돌아올 때 송산을 지나는데, ‘정문부 장군 묘’라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정문부 장군? 가만있자... 누구더라?' 한 번 들어본 것 같은데 금방 떠오르지 않습니다. 안내판을 보니 큰 길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되는 것으로 되어 있어, 운전하는 직원 보고 잠깐 들렀다 가자고 하였지요. 도착하니 장군의 묘는 건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의정부시가 그만큼 팽창했다는 얘기이지요.
정문부 장군(1565~1624)은 원래 문관 출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함경도 북평사로 있었습니다. 선조는 왜군에 쫓겨 의주로 피난가면서 두 아들 임해군과 순화군에게 근왕병을 모집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두 왕자가 근왕병을 모집하러 함경도에 왔을 때 국경인(鞠景仁 ) 등이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를 왜군에게 넘깁니다. 이에 정문부가 의병을 일으켜 반란군을 진압하고, 나아가 경성, 길주 장평 등에서 왜군과 싸워 승리합니다.
▲ 정문부 장군 무덤으로 오르는 길에 있는 북관대첩비(복제)/왼쪽, 북한으로 돌려주기 직전 고궁박물관 뜰에 잠시 세워두었던 북관대첩비(ⓒ 김영조)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렸는데, 군사를 모으러 온 왕자들을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왕자들을 잡아 적군에 넘겨주다니요? 적전분열을 일으킨 반란군이 한심한 놈들이긴 한데, 한편 반대로 생각하면 오죽하면 그랬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봅니다. 그 동안 쌓여왔던 함경도 차별에 대한 불만도 있었을 것이고, 당시 두 왕자의 행패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장군의 묘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려는데, 오른쪽으로 비가 하나 있고, 그 앞 안내판에 북관대첩비라고 쓰여 있습니다. “으잉? 북관대첩비는 2005년에 일본에서 반환받아, 원래 있던 곳에 놓여야 한다며 북한으로 돌려보낸 비 아닌가? 그런데 여기에 왜 북관대첩비가?” 당연히 복제한 비일 텐데, 정문부 장군과 관련이 있으니 여기에 세워놓았겠지요.
다가가 안내문을 읽어봅니다. 북관대첩비는 장군이 왜군과 싸워 이긴 승리(大捷)를 기념하기 위하여 1708년 함경도 북평사로 부임한 최창대가 글을 짓고 이명필이 글을 써서 함북 길주군 임명에 세운 비라는군요. 그런데 다들 잘 아시다시피 러일전쟁 때 일본군 아케다 마사스케 소장이 이 비에 자기네가 패배한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을 알고는 일본으로 가져가 야스쿠니 신사 뒤쪽에 처박아두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처박아 둔 것이 아니라 비석 위에 1톤의 머릿돌을 얹어놓아 기를 꺾으려 했다는군요. 으~음~~ 역시 이런 데서 섬나라 쪽바리 근성이 나오는군요.
▲ 정문부 장군 무덤( 경기 의정부시 용현동 산16번지 )
이렇게 오랜 세월 야스쿠니 신사에서 신음하던 북관대첩비가 어떻게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요? 1978년 최서면 선생이 옛 기록을 검토하다가, 조소앙 선생이 1909년 일본 유학생 시절 기고한 글을 보고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답니다. 그 후 20년 넘는 세월 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반환 요청으로 가까스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노력은 우리가 했지만, 우리는 통 크게 문화재는 원래 있던 자리에 두는 것이 원칙이라며 북한으로 보낸 것이구요.
그런데 말입니다. 1708년 북관대첩비를 세워줄 정도이면 정문부 장군이 임란 공신으로 대우를 받고 살았을 것으로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장군은 고문을 받다 죽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당연히 논공행상이 있었을 것입니다. 장군의 공적대로라면 당연히 큰 상이나 벼슬을 받아야 하는데, 장군을 시기한 중앙 정계의 시기심으로 장군은 그에 맞는 상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장군은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장군이 창원부사 시절 초나라 회왕에 대하여 지은 시가 인조를 빗댄 것이라고 하여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다가 죽었습니다. 초 회왕은 장의(張儀)의 세치 혀에 놀아나 충신 굴원을 멀리한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어리석은 임금으로 꼽히는 인물이지요. 아마 초 회왕의 어리석음에 대해 장군이 시를 쓴 것 같은데, 간신배들이 그 시가 인조에 빗대어 쓴 것이라고 모함한 모양입니다. 그 후 장군의 누명이 벗겨져 충의공이라는 시호까지 받았지만, 이미 사람을 죽여 놓고 시호를 주면 뭐합니까? ▲ 정문부 장군을 모시는 사당 충덕사(忠德祠)
충신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는 더러운 세상. 조선은 임진왜란이라는 커다란 병화(兵禍)를 겪고도 나아진 것이 없었습니다. 어디 정문부 장군뿐입니까? 김덕령 의병장도 억울한 누명으로 죽었고, 이순신 장군은 전쟁 도중에 고문으로 죽을 뻔하다가 겨우 백의종군으로 살아나지 않았습니까? 곽재우 의병장도 이런 더러운 꼴 보기 싫다고 산 속으로 들어가버렸구요.
장군께 묵념을 올리고 내려갑니다. 묘 아래에는 충덕사(忠德祠)라는 사당이 있습니다. 당연히 정문부 장군을 모시는 사당이지요. 장군의 사당은 함경도에도 있고, 진주에도 충의사라는 사당이 있습니다. 함경도에 장군의 사당이 있는 것은 당연한데, 진주에는 어떤 연고로 있을까요? 장군이 창원부사로 있을 때 진주를 둘러보고 그 풍토의 순박하고 아름다움에 반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고문으로 옥중에서 세상을 뜨기 전에 두 아들에게 벼슬을 구하지 말고 진주로 내려가 살라고 유언을 했답니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실천하여 진주로 내려가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요.
사당의 문은 잠겨 있어, 담장 위로 기웃거리기만 하고는 차로 돌아갑니다. 오늘 의정부 재판 갔다가 뜻하지 않게 정문부 장군에 대해 알게 되어, 의미 있는 하루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하나 건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