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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그리고 우리말

백성을 사랑한 세종대왕, 가슴에 새기고 오다

고척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훈민정음 유적지를 찾아서> 탐방

[그린경제/얼레빗=정석현 기자]  우리 겨레 최고의 스승 세종대왕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까? 또 세계 최고의 글자라는 한글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까? 정작 그 질문에 맞닥뜨리면 많은 사람들은 당황스러워한다. 그를 한방에 풀어줄 답사가 오늘 있었다. 고척도서관 주최의 길 위의 인문학프로그램 가운데 세종학자 김슬옹 박사를 강사로 하는 <훈민정음 유적지를 찾아서> 탐방이 경기도 여주의 세종 영릉에서 열렸다. 이틀 전 고척도서관 희망어울림에서 있었던 강연에 이은 탐방이다. 
 

   
▲ 세종과 소헌왕후를 합장한 세종영릉(英陵)

   
▲ 조선왕릉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한다는 유네스코 확인증

전세버스로 영릉에 도착한 탐방단은 등줄기에 땀이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더위 속에서 일정을 따라가느라 상당한 고생들을 했다. 하지만 수강생들의 눈망울은 초롱초롱하다. 더위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세종대왕은 등창이 걸려서 큰 고통을 받으면서도 백성을 위해 한글을 창제하셨습니다. 우리는 한글을 가졌기에 휴대폰에서 길이 막혀서 늦습니다.’라는 말도 5초면 쏩니다. 그렇지만 일본어나 중국어는 영어로 쳤다가 변환해야 하기에 무려 7배인 35초나 걸립니다. 저는 한국에서 태어난 게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박암평 문화해설사의 이 말에 수강생들은 큰 손뼉으로 화답했다.  

영릉 세종대왕을 뵈러 가기 전 먼저 수강생들은 세종대왕 때 만들어진 각종 과학, 천문기구를 돌아봤다. 백성들이 쉽게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하는 오목해시계(앙부일구, 仰釜日晷)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시차를 보완하고, 절기까지 알 수 있게 한 오목해시계의 대단함이 조목조목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다만, 세종 때의 오목해시계는 글자를 모르는 백성도 시간을 쉽게 알수 있도록 12지신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이곳 영릉 오목해시계는 12지신 그림이 새겨져 있지 않았고, 문화해설사의 설명도 거기까지는 미치지 않아 아쉬웠다 
 

   
▲ 세종영릉과 효종영릉을 친절하고 깊이 있게 안내한 박암평 문화해설사

   
▲ 수표 앞에서의 해설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수강생들

   
▲ 세종영릉으로 들어가는 훈민문 앞에선 수강생들

계속해서 수표(水標)와 측우기(測雨器) 설명이 이어졌다. 수표 눈금 얼마만큼 물이 차오르면 홍수고 가뭄인지를 말하고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하여 세종 23(1441)에 장영실 등이 발명한 측우기는 세계 최초였음을 강조한다. 1639년 로마에서 이탈리아의 B.가스텔리가 처음 측우기로 강우량을 관측하였던 서양에 견주어 무려 200년이 앞섰음을 해설사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드디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를 뵈러 간다. 홍살문을 지나고 신의 영역과 속세의 영역을 가르는 금천(禁川)을 건너고 재실을 지나며 죽은 임금 곧 신이 가는 길 신도(神道)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그리고 다다른 정자각(丁字閣). 위에서 바라보면 자 모양이어서 정자각이 되었다는 이 건물은 제례(祭禮) 때 이곳에 제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냈음을 이해한다.  

그리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영릉(英陵)에 올라간다. 소헌왕후를 끔찍이 사랑했던 세종대왕은 죽어서도 합장하여 함께 묻혀있다. 해설사는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에 오른 까닭을 상세히 말해준다.  

조선 왕릉은 유교사상과 토착신앙 등 한국인의 세계관이 반영된 장묘(葬墓)문화 공간이고 자연경관을 적절하게 융합한 공간 배치와 빼어난 석물(石物) 등 조형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며 제례 의식 등 무형의 유산을 통해 역사의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음이 유네스코에 의해 인정받았다. 또 왕릉 조성이나 관리, 의례 방법 등을 담은 국조오례의, 의궤, 능지 등 고문서가 풍부하고 조선 왕릉 전체가 나라와 민간이 함께 통합적으로 보존 관리하고 있는 점이 높이 평가받았음을 절감한다 
 

   
▲ 세종영릉의 정자각

   
▲ 세종영릉 정자각에서 절하는 수강생들

세종과 소헌왕후를 모신 영릉(英陵)은 원래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릉(憲陵,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쌍릉) 옆 대모산 서쪽 기슭에 있었다. 그러나 세조 때 의경세자가 요절하고, 세조의 흉몽이 이어지자 천장론(遷葬論, 곧 이장(移葬) 하자는 주장)이 일었는데 옮기지 못하고, 결국 예종 때 옮겼다. 해설사는 이곳이 봉황이 날개를 펼치고 알을 품는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 용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오르는 비룡승천혈(飛龍昇天穴), 주변의 산(신하)들이 임금을 배알하는 군신조회형(君臣朝會形) 등 최고의 명당자리라는 설명까지 덧붙인다. 

이어서 세종 영릉과 제17대 왕 효종과 비 인선왕후의 무덤 영릉(寧陵)을 잊는 700m의 고즈넉한 살길을 걷는다. 효종(孝宗, 재위: 1649~1659)은 일반인들이 잘 기억하지 못하는 임금이지만 아버지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당한 치욕을 지켜보아야 했고,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끌려가 곤욕을 치러야 했기에 북벌 의지가 분명했던 임금이었다.  

그러나 효종도 오래 임금 자리에 있지 못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따르면, 효종의 귀 밑에 종기가 심각했고 이에 침의(鍼醫) 신가귀(申可貴)가 침을 놓아 처음에는 고름을 조금 짜내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몇 말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피를 쏟고 그 충격으로 사망했다고 전한다. 독살설이 있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효종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는지 한 달 전 생의 마지막이 되어 버린 시를 읊었다. 

비 개인 뒤 맑은 빛에 온갖 초목이 새롭고 / 雨後晴光萬綠新
한 자리에 모인 늙은이와 젊은이는 임금과 신하로다 / 一堂長少是君臣
꽃과 버드나무 속의 누대와 정자는 마치 그림 같은데 / 花臺柳榭渾如畫
때때로 들리는 꾀꼬리 소리는 주인을 부르는구나 / 時有鶯聲喚主人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30, <효묘대점>

결과론이지만 효종대왕이 천수를 누렸으면 북벌을 단행하고 우리 겨레의 옛 강토를 찾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효종의 영릉을 돌아보는 내내 멈춰지지 않았다 
 

   
▲ 효종영릉 정자각에서 영릉(寧陵)이 아주 잘 보인다.

   
▲ 효종영릉의 석물들은 세종영릉보다 더 크고 우람하다

영릉(寧陵)은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란히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 효종이 위에 인선왕후 아래에 자리 잡은 쌍릉 형식이다. 한 수강생이 묻는다. “위아래로 무덤을 만들면 아래에서 바라볼 때 효종의 무덤이 인선왕후의 무덤에 가리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해설사가 명쾌한 답을 한다. “그럴 것 같지요? 하지만 정자각을 통해서 바라보면 인선왕후 무덤은 안보이고 정면으로 효종의 무덤이 아주 잘 보입니다. 가리지 않도록 약간 비껴 있는 거지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강의에 참여한 고척동 김선자(53, 주부) 씨는 말한다. “강의를 듣고 답사를 오니 모든 것이 눈에 쏙쏙 들어옵니다. 세종대왕이 얼마나 위대한 임금이고, 얼마나 백성을 사랑했는지 절절히 다가옵니다. 강의를 만들어준 고척도서관과 강의를 진행해주신 김슬옹 교수님, 문화해설사 선생님께 정말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렇게 무더운 여름날 대다수 사람들은 물가에 놀러가기 바쁘다. 하지만, 땀으로 온 몸이 파김치가 되면서도 아랑곳 하지 않고 참여한 수강생들에게 김슬옹 교수는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있다. 나는 오늘의 수강생들이야 말로 새롭고 자랑스러운 나라를 만들어나갈 세 시대의 애국자임을 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