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정석현 기자] 후끈한 찜통 속에 들어 앉은 듯한 불볕 더위 속에 답사자들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눈을 동그렇게 떴다. 찜통더위라고는 해도 세종과 한글에 대해 공부를 하려는 답사자들의 열기는 꺾지 못한다. 지난 7월 10일 오전 10시 경복궁 들머리 국립고궁박물관 앞에는 한국도서관협회(협회장 윤희윤) 주최, 고척도서관(관장 양기훈) 주관, 국어단체연합 국어문화원(원장 남영신) 후원의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 가운데 세종학자 김슬옹 박사를 강사로 하는 <훈민정음 유적지를 찾아서> 2편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번 답사는 지난 5일 토요일 여주의 세종 영릉 답사에서의 감동이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 국립고궁박물관 앞에서 “길 위의 인문학” <훈민정음 유적지를 찾아서> 탐방 2를 시작한다
“오늘 우리는 세종임금이 비밀프로젝트로 훈민정음을 창제했던 산실을 돌아보고 세종대왕이 태어나신 곳, 주시경 마당과 함께 ”한글가온길‘을 답사하면서 우리 가슴에 “한글”을 분명하게 새겨두려 합니다. 땡볕에 땀이야 흐르겠지만 오늘 흐르는 한 방울의 땀이 우리 한글을 굳건하게 하는 주춧돌이 되리 것이라는 믿음으로 힘차게 출발합니다.”
김슬옹 교수는 특유의 신나는 그러면서 깊이 있는 야외 강의를 그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이 날은 특별히 도서관협회에서 전 과정을 녹화하려 나왔다. 먼저 들른 곳은 수정전(修政殿)이다. 세종 때 집현전으로 사용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불에 탔고, 고종 때 다시 지은 건물로 보물 제1760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세종대왕이 훈정음을 창제할 때는 왕자, 공주들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 비밀프로젝트를 벌였던 곳이고, 창제 이후는 집현전을 두어 학자들이 훈민정음 반포에 이바지하도록 한 유서 깊은 곳이다. 이곳에서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느라 밤낮 고생하다가 온갖 병치레를 했다고 하니 한편으로는 숙연해지기도 한다.
▲ 한글 탄생의 산실 수정전 앞에서 김슬옹 교수가 강의를 하고 있다.
▲ 초라한 표지석 하나 놓인 "세종대왕 나신 곳"에서 설명을 하는 김슬옹 교수
이어서 이제는 세종이 탄생했던 곳으로 간다. 경복궁 서쪽 영추문을 나가서 300여m가까이 걸으면 길가에 “세종대왕 나신 곳”이라는 작은 표지석이 하나 나온다. 이곳에서는 안타까움이 더한다. 예술인 등 작은 공로만 있어도 생가를 복원하고 기리는 사업이 활발한데 우리나라 최고의 위인 세종대왕이 나신 곳인데도 기념관 하나가 없는 이 실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10여 년 전부터 “세종대왕생가터성역화추진위원회”라는 시민단체가 생겨 활동해왔지만 정부와 일부 학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아직 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반대하는 까닭은 탄생지를 정확히 짚지 못한다는 것과 생가 모습을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광화문 현판을 광화문 지을 당시의 현판이 아닌 고종 때 중건하면서 훈련대장이 쓴 글자로 현판을 만들어 달면서 복원이라고 주장하며 억지를 쓰는 정부가 왜 세종대왕 생가터 만은 그렇게 “정확”을 따지고 있는지 안타깝다.
“세종대왕생가터성역화추진위원회”와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세종대왕이 태어난 이방원의 사가는 서울 북부 준수방(俊秀坊·현재 종로구 통인동 근처) 곧 경복궁 서쪽문인 영추문길 맞은편 의통방 뒤를 흐르는 개천 건너편인데, 청운동을 흘러내리는 한줄기 맑은 물과 옥인동으로 내려오는 인왕산 골짜기의 깨끗한 물줄기가 합치는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당시 실세였던 이방원의 생가는 99칸 집이었다고 하며 집 앞에는 큰 연못도 있었다는데 결국 표지석 뒤쪽 그 어디에 점을 찍어도 될 정도라고 한다.
따라서 시민단체는 정확한 장소를 찍지 못한다는 것은 변명에 불과하며, 집 모양을 확인할 수가 없다는 것도 당시 이방원 사가의 설계도가 나올 리 없는 가운데 차라리 생가 복원을 하지 않겠다는 논리는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고척동에서 온 한순영(58, 주부) 씨는 “우리가 세계에 가장 자랑스럽게 내놓는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이 태어나신 생가가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서울시민 대다수가 세종대왕 탄생지를 모르는 데 이를 시민들의 잘못이라고 할 것인가?”라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내비쳤다. 또 “이것은 우리 국민 모두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 한국과 한국을 사랑한 헐버트 박사 부조상 앞에서
▲ 신문로 구세군 빌딩 앞 "한글 가온길" 시작점에서
▲ 신나면서도 깊이 있는 열강에 답사자들은 푹 빠진다
이어서 사직로를 건너 주시경 생가터와 주시경 마당, 그리고 일제강점기 한글 수호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조선어학회의 후신 “한글학회”와 “한글가온길”을 순례했다. 주시경 선생은 일제강점기 두루마기를 입은 채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동분서주 한글을 가르치기에 온몸을 바치신 분이다. 당시 만일 주시경 선생이 안 계셨더라면 우리가 오늘날 쉽게 쓰는 한글로의 정착이 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김슬옹 교수는 설명한다.
다만 여기서도 안타까움은 있다. 이곳은 주시경 선생과 함께 한글 발전에 커다란 공로가 있는 헐버트 박사의 부조상을 세웠는데 길가 쪽이 아닌 공원 뒤쪽 구석 그것도 돼지갈비집 앞에 세워 헐버트박사가 하루 종일 고기 냄새를 맡게 했다는 비판을 받는 현장이다. 시민의 혈세를 받아서 꼭 이렇게 생각 없이 해야만 했을까?
한글가온길 곳곳에 숨어 있는 한글디자인을 찾아내면서 한글은 디자인적으로도 훌륭한 글자임을 실감한다. 마지막으로 세종대왕 동상 앞으로 이동한다. 김 교수는 동상 앞에 있는 오목해시계(알부일구)를 설명한다. 원래 세종 때의 오목해시계는 글자 모르는 백성들도 쉽게 알 수 있도록 12지신 동물 그림도 새겨져 있었는데 요즘 대부분 복원했다는 것들은 12지신이 그려져 있지 않단다. 복원을 할 때는 당시의 그 기구나 기계를 만든 뜻을 잘 헤아려 해야 할 텐데 왜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해놓는 것인지…….
답사자들 모두 세종대왕을 바라보면서 한글 발전을 위해, 아니 영어에 위축되어 가는 한글을 지키기 위해 온 정성을 쏟을 것이란 다짐을 해본다. 이날 고척도서관, 김슬옹 교수와 답사자들이 땡볕을 견디며 해낸 탐방에 세종대왕은 한 시름 놓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 |
||
▲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한글 파수꾼이 될 것을 다짐하는 답사자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