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얼마 전까지 몽골 울란바토르대학교 총장을 지내며 학교의 발전을 위해 온 몸을 불살랐던 최기호 교수가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바로 외솔상을 받는 기쁨을 누리는 최교수를 만나 어떻게 몽골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울란바토르대학교 총장이 됐는지, 또 대학교 발전은 어떻게 이루었는지 따위를 자세히 듣는 시간을 가졌다.(기자 말) |
- 먼저 어떻게 몽골에 관심을 두게 됐는지 말씀해주십시오.
“저는 국어학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말의 뿌리를 알려면 주변 나라의 말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우리와 얼굴 생김새도 여러가지 말도 비슷한 몽골말은 꼭 연구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 일본 동경외대에서 몽골말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 제36회 외솔상을 받는 최기호 전 울란바토르 총장
-처음 몽골에 간 것은 언제였으며, 어떻게 가시게 되었나요?
“사실 일본외대에서 몽골어를 공부했지만 그것으로는 몽골어에 대한 실감이 나지 않아 몽골에 가봐야 되겠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처음 1990년에 몽골에 가게 되었습니다. 일본서 비자를 받아 홍콩을 거쳐 베이징을 들려 몽골로 들어갔는데 굉장히 어렵게 들어갔어요. 북경발 몽골행 비행기는 에어컨이 안 되는 작은 쌍발 구식여객기여서 땀을 비오듯이 쏟으면서 갔습니다. 동양학연구소 하이산다이 교수를 명함 한 장만 들고 찾아간 것입니다. 어쩌면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그것이 저의 오늘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 그런 몽골에 어떻게 한국어 공부 뿌리를 내릴 수 있었나요?
“동양학연구소에 김일성종합대학 나온 한국말 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에게 앞으로는 ‘평양말이 아니라 서울말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라고 조언을 해준 뒤 그해 10월에 한국어강좌가 개설되었습니다. 처음엔 한국대사 부인이 직접 가르쳤고, 이듬해 1991년에 국립대학에 한국어학과가 만들어졌습니다. 1993에는 울란바토르대학교에도 개설되고, 이후 외국어대학에도 개설되면서 발전되었습니다. 또 몽공역사학자 3명, 몽골민속학 전공자가 1명 그리고 저 이렇게 5명의 작은 수로 몽골학학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회장을 맡아 1993년 학회지를 처음 냈고 지금은 벌써 40호가 되었습니다.
5명이 시작한 학회는 지금 수백 명의 회원으로 불었고 학회지는 등재지가 되었습니다. 1992년부터 2000년까지 해마다 학술회의와 답사를 하고 책을 내면서 발전한 것이지요. 그 바람에 저는 전공이 몽골어가 돼버린 것이지요.(웃음) 10돌 기념식 때는 몽골 오치르 바트대통령을 초정해서 함께 우리 대통령을 면담하기도 했습니다.”
▲ 몽골비사 기념비 앞에선 최 전 총장
- 상명대 정년퇴직하시면서 바로 몽골로 가실 당시 저는 뜻밖이었습니다. 더구나 울란바토르대학교 총장을 맡게 되신 사연은 무엇인가요?
“내가 사실 몽골에 갈 때마다 울란바토르대학교에 가서 강의를 꼭 해주었습니다, 재능기부를 한 것이지요. 그러다 내가 다니는 화도교회 사람들 32명을 데리고 몽골 답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갔던 목사님과 사람들이 감동하여 지원하겠다고 하여 피아노 7대, 진흥재단 후원을 받은 컴퓨터 100대, 학용품 컨테이너 1대분, 자동차 2대 등을 기증했고, 초등학교 교장까지 파견해주었습니다. 그렇게 봉사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사장이 저를 불러 총장을 맡아주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전 당시 외솔회 회장도 맡도 있었고 한국에서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몽골에 갈 생각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사장이 하도 간곡히 얘기하는 통에 갈 결심을 하게 되었지요.
처음 대학교를 맡았을 때 사실 대학교라고 하기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처음에 1,900명이었던 학생 수가 그만 둘 때는 3,700명이 되었고, 대학원은 석사과정만 52명이었는데 현재는 박사과정까지 403명이 되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과학아카데미연구소에 있던 몽골어대학자 수미야 바타르 박사를 대학원장으로 모셔왔고 대역사학자 볼트 바타르 박사를 부총장으로 모시고, 모두 7명의 대학자를 모셔왔으니 학교가 발전할 수밖에 없겠지요.“
- 그렇게 발전시키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을 텐데요?
“물론 그럼 점도 있지만 모든 일은 나 혼자만 해야 한다는 것은 오만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아니면 또 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순리 아닐까요?”
▲ 몽골 대초원의 게르(천막식 이동 집) 앞에서
- 이번에 총장님은 외솔상을 받으시는 것으로 압니다. 소감과 함께 앞으로 한국에 돌아와서 앞으로 하실 일들은 무엇이 있나요?
“과분한 상을 주시는데 외솔 선생님이 가신 길을 따라 더 열심히 노력하라는 격려로 압니다. 우선 그동안 해왔던 연구의 계속인데요. 만주, 일본, 중국, 몽골 등 주변 나라 말 곧 동북아시아어족을 통해서 우리말의 뿌리를 알아내는 작업을 학술적으로 완성해야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책으로도 내놔야 하구요. 또 국어학자니만큼 훈민정음 책도 써야 할 것입니다. 파란 눈에 비친 한글은 ‘인간 최고 지성으로 만들어낸 최고의 글자’입니다. 그것을 알리고 발전시키는데 여생을 바쳐야 겠지요. 그것이 외솔 선생님께서 제게 내린 주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기호 전 총장은 몽골에 가기 전 한글세계화추진위원회 회장을 맡아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며, 한글날국경일큰잔치추진위원장을 맡았었고, 외솔 최현배 선생을 기리는 (재)외솔회 회장을 맡아 분주한 나날을 보낸 분으로 이러한 공적들이 외솔상 수상에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대담을 하는 동안 최 전 총장은 젊은이 못지않은 열정으로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를 보였다. 그동안에 해왔던 일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자부심이 넘쳤지만 겸손한 모습으로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게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최기호 전 울란바토르대학교 총장. 총장을 그만 두고도 해야 할 일이 많은 대단한 국어학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까? 최 총장의 대담 모습은 무척 의욕적이고 진취적으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