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집 억새지붕 집 하나있었지 언제 쌓았는지 이끼 낀 돌담 가에 여섯 살 신랑각시 살았지 고무신 트럭* 몰고 장에 간 신랑 돌아오면 각시는 고양이 시금치* 반찬에 돌가루 밥*을 차려냈지 앵두꽃이 눈발처럼 날리는 집이었지 루핑* 집이었지 여기저기서 쫓겨 온 철거민들이 모여 희망을 만들어가는 곳이었지 전등꽃이 화사히 피어나는 발아래 마을을 바라보며 벽돌집 짓는 꿈을 꾸곤 했지 서울에서 가장 높은 동네였지 너와집 한 채 지었지 사시사철 개울물이 재잘대는 곳이지 햇살 보드런 들창 가에 앉아 늙은 서방은 시를 짓고 색시는 옆에서 술 빚는 집이지 둘이서 기타 치며 노래 부르면 술 익는 내음 이팝꽃에 실려 오지 (낱말풀이) *고무신 트럭 -고무신을 접어 트럭 모양으로 만든 것. *고양이 시금치 - 괭이밥이라고도 불리는 새큼한 맛이 나는 풀. *돌가루 밥 - 소꿉놀이할 때 흰색 돌을 빻아서 쌀이라 했음. *루핑 - 콜타르를 입힌 종이. 60~70년대 철거민들은 루핑으로 비바람을 가리고 살았음.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방효유(方孝孺)는 명(明) 초기의 학자로 건문제의 스승이다. 주체(朱棣)가 정난의 변을 일으켜 조카인 2대 황제 건문제(建文帝)를 죽이고 황제에 오르자, 그를 비난하는 글을 썼다가 역사상 최악의 필화사건의 장본인이 된다. 영락제(永樂帝)가 있었다. 그는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체(棣), 열한 살에 연왕(燕王)에 봉해졌다. 태조가 죽자 장남 표(標)의 아들인 윤문(允炆)이 2대 황제에 오르게 된다. 야욕가인 그는 비밀리에 군사력을 키워 “황제 주변의 간신들을 토벌 한다.”라는 구실을 달고 반란을 일으켜 황제 자리를 빼앗는다. 조카 건문제 주위의 신하들을 모두 살해했으나 방효유만은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즉위조서를 써 달라며 구슬렸다. 완강히 버티던 방효유는 영락제의 거듭된 종용에 마침내 붓을 든다. 잔뜩 기대하며 지켜보던 영락제에게 전해진 종이에는 단 네 글자 연적찬위(燕賊簒位, 연나라 도둑이 황제 자리를 빼앗다)였다. “네 이놈! 구족을 멸하리라.” “구족이 아니라 10족을 멸해 보거라. 내가 눈 하나 깜빡 하나!” 방효유의 입은 그 자리에서 찢기고 10족 색출의 회오리가 분다. 당대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여러 날이 지난 뒤에야 그 아이의 말버릇은 나와 사뭇 달랐다 조곤조곤 풀어내는 게 내 말 맵시라면 퉁명스레 툭 던지거나 어깃장이 그 아이 말투였다 첫인사를 나누던 날도 그랬다 겉은 심드렁했지만 끌림이 흐르고 있음을 그 아이는 마음으로 이미 읽고 있었다 우리 혼례 때도 그랬다 아빠에게 안 가고 엄마에게 붙은 건 온이 엄마가 좋아서만은 아님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내 전화기를 몰래 가져가 “예쁜 딸 공주님”이라 저장한 속을 왜 들여다보지 못했을까 내게 “아빠”라 불러 볼 겨를도 없이 조잘조잘 손잡고 걷자 벼르기만 하다가 서둘러 제 별로 돌아갈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손으로 만질 수는 없어도 마음으로 만질 수 있음을 내가 낳아야만 피붙이가 아님을 짧은 만남도 긴 사랑으로 남을 수 있음을 그 아이에게서 배우게 되었다 여러 날이 지난 뒤에야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첫 기일(忌日) 해 놓은 건 없어도 하루는 바쁘다 오늘도 해 놓을 것 없는 하루를 위해 뻑뻑한 셔터를 올린다 젖은 솜 물 빠지듯 반나절이 지나야 몸놀림이 좀 쉬워지지만 행여라도 누군가 올까 하여 소스를 끓이고 푸성귀를 씻는다 나중에라도 팔릴까 하여 산나물 다듬어 지 담그는 동안 몰래 해가 저물고 음악 마실 손님 기다리다 어느새 거품 같은 하루가 꺼진다 기대로 하루를 열고 허탈로 하루를 닫다 보면 한 달이라는 덧없음이 쌓이고 열 두 장의 덧없음이 딸아이 떠나던 날의 벚꽃을 다시 피운다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내겐 자신을 “DNA 반역자"라 부르는 벗이 한 명 있다. 지천명에 가깝도록 인류의 보편적 삶에 세뇌되어 살다가 반백(半白)이 되어서 반역의 길에 발을 들여놨다. 사업의 실패가 잠자던 그의 반골기질을 깨운 것이다. 그는 이참에 종전의 자신의 삶을 확 뒤집기로 작정한다. 그 첫 번째 작업으로 도시의 표상인 서울을 버리기로 하고 그길로 아내의 손을 이끌고 무작정 떠났다. 달랑 칠십 만원이 남은 재산의 전부였다. 부부의 발길이 닿은 곳은 가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생면부지의 강원도 산골이었다. 부부는 그곳에서 남의 집 날품팔이로 연명하며 뒷날을 도모한다. 몇 해 뒤 성실과 근면으로 노력한 끝에 인적 없는 골짜기에다 반역의 본거지를 마련하기에 이른다. 전력 혜택은 거부했지만, 산채만큼은 흙벽돌로 제법 그럴 싸 하게 지었다. 그때를 시점으로 그는 본색을 드러낸다.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설계되어 있는 현생인류의 뇌 구조에 반기를 들고 혁명의 나팔을 분 것이다. 우선 무슨 무슨 날이니 하는 “날”부터 없애기로 했다. 명절, 생일, 결혼기념일, 제삿날…. 강요당하기 싫다는 게 이유였다. 다음으로 한 일이 어머니를 갑갑한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노비(奴婢)라는 신분이 있었지요. 노는 사내종, 비는 계집종을 일컬었답니다. 이들은 관노와 사노로 나뉘는데 관노는 국가기관에 딸린 종이고 사노는 개인 소유의 종으로 재물로 간주되어 매매도 가능하고 국가에 신고만 하면 목을 떼고 붙이는 것도 주인 맘대로였다네요. 그렇긴 해도 주인을 잘 만난 외거(外居)노비는 자유도 누렸고 저만 잘하면 막대한 재산도 모을 수 있었다지요. 백정 계급도 있었지요. 흔히 도축인으로만 알지만 갖바치나* 광주리 장인도 싸잡아 그렇게 불렀다네요. 고려 때는 화척으로 불리다가 조선 조 들어와 백정이라 했는데 아예 사람 축에도 못 든다는 뜻이랍니다. 이들은 성 안에는 물론 기와집에서도살 수가 없었고 외진 데서 모여 살아야 했다지요. 혼인 때 말이나 가마도 탈 수 없었고 상투나 비녀 머리도 할 수 없었고 상여도 장례식도 못 치르게 했답니다. 일반 백성과의 혼인 금지는 물론이고 어린아이에게도 머리를 조아려야 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일반인들을 앞지를 수 없었으며 이런 것들을 어기면 죽도록 얻어맞았다지요. 하지만 이들도 먹고 살기위해 빚을 지지는 않았습니다. 상노라는 직업이 있습니다. 이들은 말로는 사장님이라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폐업 전문가 우리는 좋든 싫든 배운 도둑질로 살아간다 나는 내 도둑질이 좋다 좋아하는 음악 듣고 들려주고 하다 보면 어쩌다 간이 맞는 손님이 찾아와 밤을 새우기도 하고 찾는 이 없으면 없는 대로 글 쓰며 앉아있는 맛도 좋으니 이 재미로 가게를 하는데 돈벌이가 될 리 없고 집세는커녕 공과금 밀리기도 다반사요 삼시 세끼 라면도 버거워 빚으로 먹고사는 날이 수두룩하다 그런데도 정신 못 차리고 또 도둑질을 이으려고 가게를 줄여 옮겨간다 삼십여 년을 이렇게 여닫기를 반복하며 얻은 벼슬이 폐업 전문가! 그래도 이번에는 겉은 망했어도 속으로는 남았다 종자기*를 얻었고 짐을 꾸리며 도닥거려 주는 아내를 얻었음이니 경자 원단의 저 맑은 지저귐 붉은 원 안에 걸린다 * 종자기 - 춘추시대 초나라의 거문고 명인 백아의 절친한 벗으로 연주할 때 백아의 마음을 훤히 꿰었다. 종자기가 병사하자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고 다시는 연주를 하지 않았다. 이에 "백아절현"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그래도 눈은 내렸다. 계엄령이 떨어지고 알 수 없는 총소리가 밤하늘을 찢고 눈만 뜨면 어리둥절한 뉴스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군인 이름들이 언론매체를 도배질하던 그 겨울에 육군본부에도 궁정동에도 무주공산 청와대에도 눈은 내렸다. 처음 겪어보는 극단의 회색이었다. 하늘도 사람들의 발걸음도 음악 선율도 온통 회색조(調)였다. “김대중이가 잡혀갔대.” “김영삼이 김종필이도 가택연금 당했다는구먼.” 사람들의 수근거림마저 우중충하던 세모(歲暮)였다. <손시향 - 검은 장갑. 지나가다가 밖으로 음악 소리가 새 나오기에 이 노래가 생각나 들렀소이다. 혹시 음반이 있으면 들려주시오.> 음악실에서 바라본 입구 쪽 자리는 멀기도 하려니와 음악실 유리에 조명 빛이 반사돼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슴푸레 보이는 형상이나 글씨체나 신청곡으로 보아 노신사임이 분명했다. 아직 교대시간이 조금 남긴 했어도 뒷 진행자의 양해를 얻어 서둘러 음악실을 나왔다. “저어, 선생님 죄송합니다. 저도 이 노래를 좋아합니다만 음반이 없어 들려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할 수 없지. 아쉽긴 하지만 그게 어디 디제이 양반 탓이오? 괜찮으니 앉아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이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은 좋든 싫든 자본주의 경제체제 속에 살고 있다. 18세기 중엽부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결과적으로 인류사회에 자본주의의 확산을 부채질하였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가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불가분의 관계가 된 것은 이윤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에 가장 알 맞는 공통점을 지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산업혁명”은 공장제 성립 이후의 시기를 가리킨다. 대량생산이 가능한 면직기계와 증기기관의 발명, 제철기술의 발달로 영국의 산업은 유례없는 발전을 이루게 된다. 이른바 “1차 산업혁명”이란 것인데, 이 질풍노도는 구미 각국은 물론, 전 세계를 휩쓸었고 자연스레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상업주의”라는 자식 까지 얻게 된다. 윤택한 삶을 위해 끊임없이 이윤을 추구해야만 하는 인간의 욕망은 그 후에도 계속 산업혁명을 촉발시켜, 우리 인류는 지금 5차 산업혁명을 코앞에 두고 있다. 18세기 중엽 시작된 1차 산업혁명의 태풍은 그 발생지인 유럽을 훑고 머잖아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일본에 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은 사기노미야 무쓰히토라는 강력한 군주가 나타나 700년 동안이나 군림해온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국어사전에서는 “음악”을 ‘박자, 가락, 음성 따위를 형식에 의해 조화하고 결합하여 목소리나 악기를 통해 사상 또는 감정을 나타내는 예술’이라 풀이하고, “노래”는 ‘가사에 곡조를 붙여 목소리로 부를 수 있게 만든 음악’이라 밝히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근대 이전에서의 제대로 된 “음악”은 일반 백성이 가까이 즐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는 얘기가 된다. 악기의 연주가 없는, 극히 기초적 수준의 틀만 갖춘 농요나 구전민요들이 널리 불렸고, 그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노래들이 한말개화기까지는 이 땅의 “대중가요”였다. “가요“라는 용어는 고려 이전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이나 대중음악에 국한된 용어는 아닌듯하고 이후 한말에 와서 ‘창가’, 일제 초기에는 “유행창가” 그 이후엔 “유행가”로 그 변천과정을 거쳐 1960년대 이후에 “대중가요” 또는 “가요”라는 용어가 정착하게 된다. 대중가요의 기원은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그 기준이 심한 차이를 보이는데, 이른 바 “현대적 작법에 따른 창작 곡”이라는 관점을 적용한다면 <낙화유수>*가 나온 1927년을 대중가요역사의 시작으로 치는 것이 보편적 견해이다. 우리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