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편지 뭉치를 받은 날 6월 어느 날, 두툼한 봉투 하나가 왔다. 열어 보니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들이 쏟아졌다. 파도와 게와 불가사리가 그려진 편지지, 해바라기가 활짝 핀 편지지, 아무 무늬 없는 흰 종이에 연필로 또박또박 쓴 편지까지. 보개초등학교 5학년 1반 어린이들이 보낸 것이었다. 지난 6월 17일, 그 학교에서 《하마터면 한글이 없어질 뻔했어.》(김슬옹 글, 한울림어린이) 저자 특강을 한 뒤였다. 김기태 사서 선생님이 마련해 주신 자리였다. 편지 마지막 장에는 담임 김재환 선생님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그 편지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음악 시간이었는데 아이들이 40분, 온전히 수업 1시간을 꽉 채워 가며 편지를 썼습니다. 특수반 학생도 썼고요. 다문화 학생도 연필 꾹꾹 눌러 가며 썼습니다.“ 나는 이 대목에서 한참을 멈춰 있었다. 마흔아홉 해 동안 한글을 붙들고 살아왔지만, 이렇게 마음이 뜨거워지는 순간은 흔하지 않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열두 살 어린이들에게 보내는 답장이자, 어른들에게 보내는 보고서다. 내가 보낸 1차 답장은 이러했다. 보개초 5학년 1반 친구들에게 여러분, 안녕하세요! 김슬옹 할아버지 선생님이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1940년 경북 안동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이용준에 의해 기적적으로 발견되었다. 1446년(세종 28년)에 세종대왕이 직접 펴낸 《훈민정음》 해례본 목판본은 오랜 세월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발견 당시 표지를 포함 두 장, 모두 네 쪽이 찢겨 있었다. 그것을 간송 전형필 선생이 큰돈으로 사서 지금은 간송미술문화재단(서울시 성북구)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 책은 1962년에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되었고,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올랐다. 이 책을 통해 훈민정음 창제 원리와 훈민정음 반포의 참뜻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이 책은 2015년에 간송미술문화재단과 교보문고에 의해 처음 복간되었다. --------------------------------------------------------------------------------------------------- Discovery of the “Hunminjeongeum” Haerye in Andong, Gyeongbuk [Illustrated History of Hangeul 28] Professor Kim Sle-ong In 1940, a mi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첫 한글전용 교과서 《사민필지》(1891)를 지은 푸른 눈의 한글학자며 독립운동가,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 박사가 조선 땅을 밟은 지 140돌을 맞았다. 이를 기리는 ‘불후의 민족 은인 헐버트 박사 내한 14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지난 7월 7일 낮 서울 종로 서울YMCA회관 2층 우남 이원철홀에서 열렸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서울YMCA와 사업회가 공동 주관했으며, 국가보훈부ㆍ한글학회ㆍ한문화재단ㆍ한글누리가 후원했다. 대주제는 '헐버트(Homer B. Hulbert)의 한민족 탐구와 독립운동이 후대에 끼친 영향'이었다. 이날 학술대회는 헐버트 한 사람의 업적을 넘어, '헐버트를 어떻게 학문으로 세울 것인가'라는 물음을 우리 앞에 놓았다. 종합토론에서 모두들 “이제 '헐버트학(Hulbert Studies, Hulbertology)'을 세워야 한다”라는 공통 인식을 확인하며 이번 학술제의 의미를 빛냈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김동진 회장이 워싱턴에서 찾아낸 고종 친서 원본 낮 2시 영화배우로서 2025년에 헐버트 평전 독후감 대회에서 무궁화상을 받고 홍보대사로 활약중인 최미교 배우의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1926년, 한글 반포 480주년을 맞아 한글날 기념식 ‘가갸날’이 열렸다. 민족주의 국어학자들의 단체인 조선어연구회가 주최한 기념식에서 처음으로 가갸날을 선포했으며, 가갸날은 오늘날의 한글날이 되었다. 한글은 ‘가갸거겨, 나냐너녀’ 하는 식으로 배울 때라 언문, 가갸글 등으로 불려왔다. 그러다 1910년대 조선어 연구회에서 ‘으뜸가는 글, 하나밖에 없는 글’이라는 뜻으로 지어서 쓰게 되었다. 가갸날은 1928년부터 ‘한글날’로 이름을 바꾸었다. ------------------------------------------------------------------------------------------------------------------ The “Gagya Day” Celebration for Hangeul Day [Illustrated History of Hangeul 27] Professor Kim Sle-ong In 1926, marking the 480th anniversary of the invention of Hangeul, the first official celebration of Hangeul Day,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1907년(고종 44년),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주시경 선생이 남대문 시장 부근의 상동 교회에 있던 상동청년학원 안에 한글 강습소를 열었다. 주시경 선생은 1914년 운명할 때까지 한글 강습소에서 김두봉, 최현배 등 많은 제자를 길렀다. 제자들은 1921년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 전신, 현 한글학회)를 조직하여 주시경의 뜻을 이어 한글 보급과 연구에 앞장섰다. 상동 교회는 지금도 같은 지역 새로나 빌딩에 남아 있어 그때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 Opening a Hangeul Education Center at Sangdong Youth Academy by Professor Ju Si-gyeong [Illustrated History of Hangeul 26] Professor Kim Sle-ong In 1907 (the 44th year of King Gojong’s reign), linguist and independence activist Ju Si-gyeo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1904년(고종 41년), 충청도 노성군에 살던 ‘백조시’라는 여인이 여산 군수에게 자신의 집안 재산으로 있던 논밭을 가로챈 서 씨를 고소한 소장을 작성하는 일이 있었다. 백씨 여인은 자신의 동생이 약값 3냥 5돈을 갚지 못한 것 때문에 서 씨에게 논밭을 빼앗긴 일을 뒤늦게 알고, 집안 재산을 찾아 달라고 여산 군수에게 억울한 사연을 호소한 것이다. 그 뒤로 양측의 주장이 상반되어 여러 차례 소장이 오갔다. 1894년 고종이 한글을 국문으로 선언한 뒤에도 공문서는 한자로 작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한글로 공식 문서가 소통되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더불어 세종대왕이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을 토로할 수 있도록 한글을 만들었는데, 이 문서 역시 그러한 정신이 구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Expressing an Injustice in Hangeul [The Illustrated History of Hangeul 25] In 1904 (the 41st year of King Gojong’s reign), a woman named Baek Jo-si, who lived in Nosoeng-gun, Chungcheong Pro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1896년(고종 33년), 우리나라 첫 순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이 발행되었다. 《독립신문》은 독립협회의 서재필ㆍ윤치호가 창간한 신문으로, 가로 22cm, 세로 33cm 4쪽짜리 신문이었지만 당시에는 혁신적인 일이었다. 그전에 발행된 신문들은 모두 한자로만 기사를 썼기 때문에 한자를 모르는 사람들은 신문을 읽기 힘들었는데, 《독립신문》이 나오면서 누구나 쉽게 신문을 읽을 수 있었다. 《독립신문》은 나라의 발전과 민중의 계몽을 위하여 지대한 역할을 담당했다. ----------------------------------------------------------------------------------------------------------------- The First Hangeul Newspaper, Dongnip Sinmun, Is Published [The Illustrated History of Hangeul 24] In 1896 (the 33rd year of King Gojong’s reign), the first newspaper written entirely in Hangeul, Dongnip Sinmun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지난 30여 년 동안 대학생과 대학원생, 직장인을 대상으로 문서 작성 글쓰기 강의를 해오면서 한 가지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학습자 대부분(거의 다)이 컴퓨터 문서 작성기인 ‘한글오피스(아래아한글)’이나 MS워드의 '스타일' 기능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 비율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스타일 기능을 적용하지 않은 문서는 엄밀히 말해 '문서'라 할 수 없다. 이는 마치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원고지 쓰는 법을 모르는 것과 같다. 기본 중의 기본을 놓치고 있는 셈이다. 비효율의 악순환 그렇다면 이 '스타일 기능'이란 무엇일까? 간단히 말해 문서의 서식을 미리 정의해 두고 한꺼번에 적용하는 기능이다. 예를 들어 '제목 1', '제목 2', '본문' 등의 스타일을 만들어 두면, 클릭 한 번으로 해당 서식이 자동 적용된다. 한컴오피스에서는 '문단 모양'과 '글자 모양'을 조합한 '스타일'을 등록할 수 있고, MS워드에서는 'Styles' 기능으로 같은 작업이 가능하다. 이를 활용하면 수십, 수백 쪽의 문서라도 차례가 자동으로 생성되고, 제목 번호가 자동으로 매겨지며, 전체 서식을 한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1894년(고종 31년) 고종은 칙령을 통해 한글을 조선의 주류 공식 글자로 선포했다. 당시의 대한제국 칙령 제1호로, “법률 명령은 다 국문으로 본을 삼고, 한역을 부하며, 혹 국한문을 혼용함.”이라는, 한글 전용 대원칙에 관한 법령이 공포된 것이다. 이 법령이 바로 널리 시행되지는 못했지만 450년 만에 한글이 나라의 공식 글자로 인정받았다는 것에 커다란 의미가 있다. -------------------------------------------------------------------------------------------------------------------- Emperor Gojong Proclaims Hangeul as the National Script [The Illustrated History of Hangeul 23] In 1894 (the 31st year of King Gojong’s reign), Emperor Gojong issued a royal decree declaring Hangeul as the official script of Joseon. This was established und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30여 년 동안 강의하면서 한결같이 지켜온 평가 원칙이 하나 있다. 기본을 지키지 않은 보고서는 내용이 아무리 훌륭해도 무조건 '씨뿔(C+)'부터 출발한다는 원칙이다. 학기 첫 시간에 미리 공지하고, 단 한 번도 예외를 둔 적이 없다. 그렇다면 기본을 지키지 않은 보고서란 무엇인가?. 보고서 성격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크게 다섯 가지다. 이름 없는 보고서, 제목 없는 보고서, 날짜, 지도교수, 쪽수, 차례 등 기본 정보가 없는 보고서, 참고문헌을 안 밝힌 보고서 그리고 문단을 나누지 않은 보고서다. 그밖에 10쪽이 넘는 양인데도 스타일을 적용하지 않은 문서 등이다. 이름이 없으면 유령 보고서인 셈이고, 제목이 없으면 집에 문이 없는 셈이고 날짜, 지도교수 쪽수, 차례 등이 없으면 보고서로서의 족보 등의 기본 요건을 알 수 없는 격이고, 참고문헌을 안 밝히면 글도둑질이 될 수 있고, 문단을 나누지 않으면 생각의 흐름을 얼른 알 수 없어 읽는 사람이 불편하니 기본 글쓰기로서의 자격이 없다. 스타일 기능은 디지털 문서 작성의 기본으로 마치 종이 원고지로 말하면 원고지 기본 사용법과 같다. 가끔 내용을 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