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얼굴을 감추고 싶다 - 허홍구 철없고 겁 없던 시절 모자라는지도 모르고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마구 쏟아 놓은 말과 글 여물지 못한 저 쭉정이와 가볍게 휩쓸리는 껍데기 이제 지워 버릴 수도 없고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다 건방 떨던 못난 짓거리 아직도 이리저리 흩어져 죽지도 않고 돌아다닌다. 어이쿠, 부끄러워라 부끄러운 흔적 어찌 지울까요 하느님, 부처님, 독자님 정말 제가 잘못했습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되는 유명한 시 <사슴>의 시인 노천명은 인터넷에 ‘193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라고 설명되어 있지만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어 있다. 노천명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청년들의 적극적인 전쟁 참여를 권유하는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출정하는 동생에게’, ‘병정’ 등을 발표하고, 친일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산하 부인대(婦人隊) 간사를 맡을 정도로 친일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천명에게는 웃지 못할 일화가 따라다닌다. 그것은 광복 직전인 1945년 2월 25일 펴낸 시집 《창변(窓邊)》에 관한 이야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 중기의 문신 유몽인(柳夢寅 : 1559~1623)이 임진왜란 뒤 민간에 설화와 야담을 모아 펴낸 책으로 《어우야담(於于野譚)》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논개(논개(論介, ?~1593))’는 진주의 관기로 제2차 진주성 전투 때 일본 장수를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한 것으로 소개되었습니다. 그런데 국립진주박물관에는 <논개 초상>으로 김은호가 그린 것과 윤여환이 그린 것 두 점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김은호의 <논개 초상>은 1955년에 그린 것으로 우리에게 많이 알려졌지요. 하지만, 김은호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일본 미인도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여럿 그렸습니다. 특히 1939년에 그린 <춘향상>은 걸작이라는 평을 받았는데, <논개 초상>은 <춘향상>과 비슷한 모습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김은호가 친일 여성단체인 애국금차회가 일본군사령부에 금비녀와 패물, 현금 등을 헌납하는 사건을 기념하는 〈금차봉납도〉를 그리는 등 친일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된 인물입니다. 또 이 초상의 문제점이 하나 더 있는데 16세기의 인물인 논개의 저고리를 기장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12월 22일 뉴스를 보면 윤 대통령은 이날 주재한 제12차 비상경제민생회의 겸 제1차 국민경제자문회의 마무리 발언에서 "거버먼트 인게이지먼트가 바로 레귤레이션이다. 마켓에 대해서 정부는 어떻게 레귤레이션 할 거냐, 마켓을 공정하게 관리하고 그 마켓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도록~”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영어를 사랑하는 것을 넘어 영어 사대주의는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사실 윤 대통령의 영어 사랑에 관한 기사는 전에도 자주 눈에 띄었지요. 지난 6월 11 오마이뉴스에는 “내셔널 파크'라고 하면 멋있다고? 윤석열의 영어 사대주의”, 6월 28일 치 경남도민일보에는 “'열등감 보상'에서 발현된 윤석열의 영어사랑”, 또 7월 22일 오마이뉴스엔 “윤석열 대통령의 지극한 '영어 사랑'... 이쯤되면 '사대주의’”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였습니다. 심지어는 디지털타임즈 12월 25일 치엔 “‘사람이 먼저다’ 정철, 윤 저격…‘산타할아버지, 여기 영어 하는 사람 제발 가져가시라’”라는 기사까지 등장했습니다. 이처럼 말에 쓰는 단어 대부분을 영어나 외국어로 대체하고 토씨만 우리말을 쓰는 문체를 ‘보그체’라고 하고, 그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은진미륵불 - 한하운 비원에 우는 사람들이 진정소발(眞情所發)을 천년 세월에 걸쳐 열도(熱禱)하였건만 미륵불은 도시 무뚝뚝 청안(靑眼)으로 세월도 세상도 운명도 그렇게만 아득히 눈짓하여 생각하여도 생각하여도 아 그 마음 푸른 하늘과 같은 마음 돌과 같은 마음 불구한 기립(起立) 스핑크스로 세월도 세상도 운명도 집착을 영영 끊고 영원히 불토(佛土)를 그렇게만 지키는 것인가. 오늘은 성탄절 전날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로 세상에 오시는 크리스마스이브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부유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지만 헐벗고 고통받는 사람이 있고 그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원할 구세주 사상도 있다. 서양에 구세주 신앙이 있다면 우리에겐 미륵신앙이 있었다. 미륵신앙은 미륵보살이 사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것과 말세인 세상을 구하러 미륵이 오시기를 바라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기독교 신앙의 천국에 가는 것과 구세주를 맞이하는 것에 견줄 수 있다. 특히 미륵사상이 있었던 우리나라 바닷가에는 미륵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던 매향의식(埋香儀式)이 있었고, 그 표식인 매향비(埋香碑)가 곳곳에 서 있다. 그 매향비들은 1309년(충선왕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12월 18일 KBS ‘진품명품’ 프로그램에는 13세기에 빚은 영롱한 빛깔의 고려청자 향완이 출품되었습니다. 향완은 불교에서 공양할 때 쓰던 것으로 향로의 하나인데 우리가 흔히 보던 ‘청동은입사향완’과 달리 고려청자로 빚은 것이 특징입니다. 특히 이 향완은 연꽃, 모란 그리고 구름과 같은 상서로운 무늬들로 가득했지요. 또한 상감, 역상감, 흑상감 등 고려청자 전성기 시절의 수준 높은 기술들로 새겨 놓아 이 의뢰품의 높은 값어치를 짐작하게 했습니다. 여기서 ‘상감기법’은 고려청자에서 흔히 보던 기법으로 무늬를 새긴 뒤 무늬를 백토와 자토로 메워 무늬를 표현하는 기법입니다. 그런데 이 향완에서 보이는 ‘역상감기법’은 ‘상감기법’과는 반대로 무늬의 바깥 면을 파낸 뒤 백토를 넣어 무늬를 부각하는 것이지요. 이날 출연한 전문위원은 ‘역상감’으로 빚은 향완은 드물게 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고려청자 향완은 추정가 2억 5천만 원이 되었습니다. 이날 출품된 고려청자 향완과 달리 1962년 국보로 지정된 ‘표충사청동은입사향완’은 청동에 ‘은입사’ 수법으로 무늬를 새긴 것입니다. ‘은입사’는 금속그릇의 표면에 무늬 모양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황희(黃喜, 1363~1452)는 단연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사람이라고 불릴 정도로 세종 시대에 18년 동안 정승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황희는 태종(太宗)이 양녕대군을 폐위시키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지명할 때 반대해 태종의 분노를 사서 서인으로 폐해지고 유배에 처해질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세종은 황희를 등용하려 할 때 많은 중신이 반대하자 황희의 행동이 "충성스럽지 않다고 볼 수 없다"라며 이를 일축했습니다. 그런 황희는 왕권이 강했던 시절 임금의 일방적인 독주에 제동을 거는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세종이 중년 이후 새로운 제도를 많이 제정하자, 황희는 “조종(祖宗)의 예전 제도를 경솔히 변경할 수 없다”라며 반박할 정도였지요.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임금 앞이라도 임금 비위를 맞추려는 게 아니라 주저 없이 아니라고 말했지요. 그런데도 세종은 여러 차례 의견 충돌을 빚었던 황희를 늘 중용했습니다. 그렇게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음에도 세종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세종 편에 섰지요. 세종은 말년에 궁궐 안에 내불당을 만들자 대신들과 집현전 학자들이 모두 반대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12월 13일 자 JTBC에는 “요정으로 쓰던 일본식 가옥서 '한복 홍보' 촬영을?”이란 제목의 뉴스가 보도되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부산시가 후원하고 부산섬유패션산업연합회가 만든 한복 홍보 영상이 일본식 건물인 적산가옥에서 촬영한 것이었는데 이곳은 해방 이후 '정란각'이라는 고급 요정으로도 쓰였던 곳이라는 뉴스였습니다. 주최 쪽은 “우리 문화의 일부고, 이런 곳에서도 한복이 더 빛났으면 좋겠다는 뜻에서 진행했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SBS 보도를 보면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가 ”최근 중국이 한복을 자국의 전통문화로 편입시키려는 '한복 공정'을 꾸준히 펼치고 있는데, 이런 상황은 중국에 또 하나의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라며 비판했습니다. 또한 누리꾼들은 "영상이 만들어지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쳤을 텐데 아무도 문제의식이 없었다는 게 참 답답하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한복은 우리 겨레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는 뛰어난 문화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찍을 데가 없어서 일본식 적산가옥에서 한복 홍보 영상을 찍는다는 말입니까? 저런 행위가 늘어난다면 서경덕 교수의 말마따나 중국의 ‘한복 공정’에 놀아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동짓날 아침 - 최홍윤 날이면 날마다 새날이지만 내일부터는 진정 새날이겠다. 실은, 절기로 치면 동지 지나 낮 시간이 길어지는 첫날 바로 내일이 새해 첫날이 아닐까 싶다. 다음 주면 2022년 마지막 절기 동지가 있다. ‘동지(冬至)’는 24절기의 스물두째이며 명절로 지내기도 했던 날이다. 이날 가장 흔한 풍속으로는 팥죽을 쑤어 먹는 일이다. 그런데 동지가 동짓달 초승 곧 음력 초하루부터 열흘까지 사이에 들면 ‘애동지(애기동지)’라 하여 팥죽 대신 시루떡을 해 먹기도 하는데 요즈음은 이에 상관없이 팥죽을 쑤어 먹는다. 올해는 동지가 음력 11월 하순 곧 29일에 들어 노동지(老冬至)라 한다. 동지를 새해로 여기던 유풍 때문에 동지가 늦게 들면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도 나이를 늦게 먹게 되니 그해가 노인들에게 좋다는 속설이 있다. 동지(冬至)라는 말은 드디어 겨울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해가 적도 아래 23.5°의 동지선 (남회귀선)과 황경 270°에 이르는 때며, 절기가 시작하는 날이기도 하다. 옛사람들은 차츰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기 시작하다가 동짓날에 이른 다음 차츰 낮이 길어지기 때문에 이날을 해가 죽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해바라기의 화가로 불리는 빈센트 반 고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서양화가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반고흐 자화상을 보면 귀 한쪽 없는 모습입니다. 그는 1888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신경과민으로 발작을 일으켜 귀의 일부를 잘랐다고 하지요. 그림을 잘 모르는 이들도 그런 고흐를 알고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송곳으로 자기의 눈을 찔러 애꾸가 된 화원 최북이 있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최북(崔北, 1712~86)은 높은 벼슬아치가 와서 그림을 그려달라고 윽박지르자 “차라리 나 자신을 자해할지언정 남에게 구속받아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라며 송곳으로 자기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습니다. 고흐와는 달리 최북은 본인의 확고한 의지를 가진 행위를 한 것이지요. 그렇게 꼿꼿한 정신으로 그림을 그렸던 그는 그림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데도 그림값을 너무 많이 주면, 돈을 내던지며 비웃던 작가였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최북이 그린 <소채도>가 있습니다. 붉은빛 무와 가지, 그리고 오이를 마치 정물화를 그리듯 배경 없이 그려낸 이 그림은 소박하면서도 친근한 느낌이 듭니다. 특별한 물건이 아닌 삶에서 흔히 보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12. 11.) KBS ‘진품명품’ 프로그램에는 세로로 긴 서예작품이 하나 출품되었습니다. 바로 고종 황제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義親王) 이강이 쓴 글씨입니다. 작품에는 의친왕이 아닌 ‘이강공(李堈公)’라고 쓰여 있어 고종황제 때 의친왕으로 책봉되었지만, 일본에 국권이 빼앗긴 뒤 왕이 아닌 ‘공(公)’으로 격이 낮춰졌음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의친왕은 조선 왕족 가운데 유일하게 항일운동에 참여한 인물입니다. 의친왕은 1919년 독립운동 단체인 ‘대동단(大同團)’의 전협(全協)ㆍ최익환(崔益煥) 등과 상해 임시정부로의 탈출을 모의하였으며, 계획을 실행에 옮기던 도중 그해 11월 만주 안동(安東)에서 일본 경찰에게 들켜 강제로 송환되었지요. 1919년 11월 20일 자 독립신문 기사에는 "의친왕 전하께서 상해로 오시던 길에 안동에서 적에게 잡히셨도다. 전하 일생의 불우에 동정하고 전하의 애국적 용기를 칭송하던 국민은 전하를 적의 손에서 구하지 못함을 슬퍼하고 통분하리로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의친왕은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낸 편지에 “나는 차라리 자유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 정부의 친왕(일왕의 아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