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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볕에 상처 난 욕망을 말린다

박노해, <가을볕>
[겨레문화와 시마을 156]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가 을 볕

 

                                   - 박노해

 

   가을볕이 너무 좋아

   고추를 따서 말린다.

 

   흙마당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는

   물기를 여의며 투명한 속을 비추고,

 

   높푸른 하늘에 내걸린 흰 빨래가

   바람에 몸 흔들어 눈부시다.

 

   가을볕이 너무 좋아

   가만히 나를 말린다.

 

   내 슬픔을

   상처 난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나는

   살아온 날들을

 

 

       

 

24절기 ‘처서’가 지나고 어제는 ‘백로’였다. 이제 바야흐로 가을에 들어선 것이다. 하지만 아직 볕이 따갑다. 그래야만 들판에 벼가 익어가는 소리가 분명해진다. 또 농촌에서는 그 땡볕에 고추를 말린다. 그뿐이 아니다. 처서가 지난 무렵 우리 겨레는 ‘포쇄(曝曬)’라는 걸 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민가에서 옷을 햇볕에 말리는데, 이는 오래된 풍속이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농가월령가> 7월령에는 “장마를 겪었으니 집안을 돌아보아 곡식도 거풍(擧風)하고, 의복도 포쇄(曝曬) 하소”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왕조실록을 보관한 사고에 포쇄별관을 보내 실록을 포쇄하는 일이 중요한 일이었다. 또 선비들은 이때 여름철 동안 눅눅해진 책을 말린다. 포쇄하는 방법은 우선 거풍(擧風), 곧 바람을 쐬고 아직 남은 땡볕으로 포쇄(曝)를 하는데 때에 따라서는 음건(陰乾) 곧 그늘에 말리기도 한다. 이때 농부들은 곡식이나 고추를 말리고, 부녀자들은 옷을 말린다. “건들 칠월 어정 팔월”이라는 말처럼 잠시 한가한 농촌에서는 처서 이후 포쇄가 중요한 일이었다.

 

여기 박노해 시인은 그의 시 <가을볕>에서 “높푸른 하늘에 내걸린 흰 빨래가 바람에 몸 흔들어 눈부시다.”라고 노래한다. 또 가을볕이 너무 좋아 가만히 나를 말린단다. 그러면서 그냥 내가 아니라 “내 슬픔을 / 상처 난 욕망을 / 투명하게 드러나는 / 살아온 날들을” 말린다고 고백한다. 시인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도 푹푹 젖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 젖은 마음을 남은 땡볕에 말려보면 어떨까?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김영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