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철쭉꽃 - 한밝 김리박 봄이면 내 마음 철쭉꽃 바다이고 등에는 날개 돋아 하늘을 올려 주니 에루화 내 믿고장은 그렇게도 아름답네 봄이 되면 우리는 흐드러지게 피어 꽃보라를 일으키는 꽃들 속에서 꽃멀미를 하며 보낸다. 특히 두견새가 피를 토한 자국에서 꽃이 피었다고 하여 ‘두견화(杜鵑花)’라고도 하는 진달래는 우리 겨레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꽃이다. 그런데 이제 진달래의 시절은 가고 철쭉이 흐드러질 때다. 특히 온 나라 곳곳에서는 경남 산청군 황매산철쭉제, 충북 단양군 소백산철쭉제, 강원 정선군 두위봉 철쭉제, 전북 남원시 바래봉철쭉제, 전남 화순군 백아산철쭉제, 제주도 한라산철쭉제, 서울 중계동 불암산철쭉제 등 철쭉제로 화려한 잔치가 펼쳐진다. 다만 꽃 모양이 비슷한 진달래와 철쭉은 어떻게 구분할까? 진달래는 꽃이 먼저 피고 잎은 나중에 나오지만 철쭉은 꽃과 잎이 같이 나온다. 진달래는 볕이 잘 드는 양지에서 자라는데 키가 2~3미터 정도지만, 철쭉은 응달에서 자라며 키가 3~5미터 정도로 크다. 또 진달래는 4월에 철쭉은 주로 5월에 핀다. 특히 옛 사람들은 화전을 부치거나 술을 담가먹는 ‘진달래’는 ‘참꽃’이라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서호의 좋은 경치 이 누대에 있으니(西湖形勝在斯樓) 마음대로 올라가서 흥겹게 노닌다네.(隨意登臨作遊遊) 서쪽 언덕 비단옷 입은 이 봄풀과 어울렸고(西岸綺羅春草合) 강물 가득 빛나는 푸른 물빛 석양 속에 흐르네.(一江金碧夕陽流) 구름 드리운 작은 마을엔 배 한 척 숨어 있고(雲垂短巷孤帆隱) 꽃이 진 한가한 낚시터에 멀리 피리소리 구슬퍼라.(花落閑磯遠笛愁) 끝없는 바람과 연기 거두어 모두 사라지니(無限風烟收拾盡) 시 담은 비단 주머니 그림 난간 가에서 빛나네.(錦囊生色畵欄頭) 이 시는 조선시대 여성으로 금강산을 오른 김금원(金錦園, 1817~?)이 지은 〈강사(江舍)〉라는 시입니다. 금강산! 지금은 갈 수 없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숱한 시인 묵객과 화가들이 금강산에 올라 시를 짓고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하지만, 금강산을 오른 사람 가운데 흔적을 남긴 여성은 어쩌면 김금원이 유일할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사대부 출신이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기생이라 그녀 역시 기생의 삶을 살게 된 여인입니다. 그런 김금원이 열네 살 때 남장하고 금강산을 여행하는데 그때 보고 느낀 것을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라는 책에 남기는 등 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불기 2569(2025)년 부처님오신날을 기려 (사)한국불교사진협회 제30회 정기 회원전과 제19회 청소년불교사진공모전이 4월 23일부터 4월 29일까지 서울 인사동 ‘한국미술관에서 열렸다. 해마다 부처님오신날을 중심으로 열리는 회원사진전은 올해는 주제를 <미소>로 정했는데 전국의 회원들은 부처님, 보살님, 아라한들은 물론 스님들의 미소를 찾아 72점의 작품을 만들었다. 우리는 ’미소‘하면 ’염화시중의 미소‘ 곧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도의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던 때, 부처님의 말없는 가르침에 깨달음을 얻은 가섭존자와의 관계에서 유래한 이 말을 떠올린다. 현재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 가운데서 오직 사람의 얼굴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표정을 ’미소‘라고 하는데, (사)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들은 어쩐 모습으로 작품화했을까? 어제 4월 23일 낮 3시 제30회 정기 회원전이 열리고 있는 ’한국미술관‘에서는 개막식을 했다. 개막식에서 (사)한국불교사진협회 최금란 이사장은 “한국불교사진협회 앞으로의 30년을 내다보는 이정표를 쳇지피티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나온 답은 인공지능을 활용한 사진계의 발전방향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많은 사람들은 날마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서울만 보더라도 2025년 현재 394개의 버스노선을 운행하고 있는데 간선이 135개, 지선 208개, 광역 10개, 순환 2개 노선 등이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서울 곳곳을 버스가 누비고 있는데 맨 처음 서울에 버스가 들어온 것은 언제일까요? 그것은 1928년 4월 22일로 경성부는 일본에서 만든 우즈레라 불리는 버스를 도입했습니다. 이 버스는 정원이 22명이었으며, 요금은 구역별 7전이었다고 하지요. 경성부에서 버스사업을 했기 때문에 부영버스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당시 전차는 120대였는데 이용객은 11만여 명, 버스는 40대 정도로 버스 이용객은 1만여 명이었는데, 그때 경성 인구가 39만 정도였다고 합니다. 버스가 다니는 노선은 경성역(현재의 서울역)부터 총독부(경복궁 앞부분을 헐고 지음) 앞까지 다닌 제1구와 총독부 앞에서 대화정 1정목(헌병대 사령부 앞, 현 남산골한옥마을 자리)까지 다니던 제2구가 있었습니다. 부영버스는 손님을 끌기 위해 차표를 끊어 주는 아가씨 차장들을 버스에 태워 장안의 큰 이야깃거리가 되었지요. 신식교육을 받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곡우(穀雨) - 류병구 요 며칠 새 온통 벚꽃에 눈들을 파는 사이, 고약한 황사에 데어 봄이 좀 눌었다 좁다란 가마니 속에서 긴 잠을 잔 씨나락이 졸음을 문 채, 솔가지 틈새로 늦봄 간을 본다 진달래가 참꽃을 흉내 내는 개꽃한테 온 산을 비워 주고 느릿느릿 퇴거짐을 꾸린다 내일은 24절기 여섯째며, 봄 절기의 마지막 ‘곡우’다. “곡우(穀雨)는 봄비(春雨)가 내려 백곡(百穀)을 기름지게 한다.”라고 하여 붙여진 말인데 곡우 무렵이면 못자리를 마련하기 시작하여 본격적으로, 농사철로 접어든다. “곡우에 모든 곡물은 잠이 깬다.”,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자가 마른다.”와 같은 농사와 관련한 다양한 속담이 전한다. 옛날에는 곡우 무렵에 못자리할 준비로 볍씨를 담그는데 볍씨를 담은 가마니는 솔가지로 덮어두었다. 밖에 나가 부정한 일을 당했거나 부정한 것을 본 사람은 집 앞에 와서 불을 놓아 악귀를 몰아낸 다음에 집안에 들어오고, 들어와서도 볍씨를 볼 수 없게 하였다. 만일 부정한 사람이 볍씨를 보게 되면 싹이 트지 않고 농사를 망치게 된다는 믿음이 있어서 그랬다. 볍씨를 담그면 항아리에 금줄을 쳐놓고 고사를 올린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전 참의 윤선도는 심술이 바르지 못하여 감히 음험한 상소문으로 상하의 사이를 너무도 낭자하게 헐뜯고 이간질하였으니, 그 죄 빠져나가기 어렵게 되었다. 중한 법으로 다스려야 마땅하겠으나 차마 죄주지 못할 사정이 있으니, 그냥 가벼운 법을 적용하여 관작을 삭탈하고 시골로 내쫓으라." 이는 《현종실록》 2권, 현종 1년(1660년) 4월 18일 기록으로 윤선도를 유배하라는 현종의 명입니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이라 / 동산(東山)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 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라는 시조 ‘오우가(五友歌)’로 알려진 조선시대 문신이며, 학자입니다. 윤선도는 위 기록처럼 예송논쟁이 일어나자, 당대의 권력자 송시열이 효종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서인세력과 함께 복제문제로 효종을 서자 취급하는 데 격분하여 상소를 올렸다가 험난한 25년의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이후 숙종 때 송시열이 처벌받은 뒤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추증되었지요. 또한 윤선도는 “음식이란 배를 채우는 것으로 족하고, 의복이란 몸을 가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라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진헌색(進獻色, 중국 황제에게 특별한 선물을 할 때 그것을 마련하기 위해 둔 임시 관아)을 설치하여 여자아이)를 모으고, 조정과 민간의 혼인을 금하였다.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 남재(南在)ㆍ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함부림(咸傅霖)ㆍ한성윤(漢城尹) 맹사성(孟思誠)으로 제조(提調)를 삼고, 경차관(敬差官, 지방에 임시로 보내던 벼슬)을 각도에 나누어 보내어 처녀를 뽑게 하였는데, 천한 백성과 노예를 뺀 양갓집 처녀 13살 이상 25살 이하를 모두 고르게 하였다.“ 위는 《태종실록》 15권, 태종 8년(1408년) 4월 16일 자 기록으로 중국 황제에게 선물하기 위해 조정과 민간의 혼인을 못 하도록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조선시대에 왕비나 세자빈과 공주의 사위를 고를 때 온 나라에 금혼령을 내린 줄 압니다. 그런데 위 기록을 보면 중국 황제에게 바치기 위해 금혼령도 내려 양갓집 처녀 13살 이상 25살 이하는 모두 혼인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지요. 심지어 고려시대 원나라 간섭기에는 원나라가 고려에 공녀를 보내라고 요구합니다. 특히 충렬왕은 고려 여성들을 공녀로 보내기 위해 금혼령을 내리고 13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최근 뉴스를 보면 “'또 대형 씽크홀'…부산 사상구 횡단보도서 깊이 5m 땅꺼짐”이라는 제목이 보이고, 또 “강동구 싱크홀 예고된 인재…지반침하 안전지도 공개하라”라는 기사 제목이 보입니다. 그런데 한 제목 안에서도 씽크홀ㆍ땅꺼짐ㆍ지반침하가 같이 나오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씽크홀’을 다음백과에서 찾아보면 “지표면이 여러 요인에 의하여 일시에 붕괴되어 국부적으로 수직방향으로 꺼져 내려앉는 현상. '지반침하' 또는 '땅꺼짐'이라고도 한다.”라고 풀이해 놓았습니다. 결국 하나의 같은 현상 ‘땅꺼짐’을 놓고 영어로 싱크홀(sinkhole)이라고 쓰고, 한자말로 지반침하(地盤沈下)라고도 쓰는 것이지요. 누구나 알아듣기가 쉬운 우리말 ‘땅꺼짐’을 놔두고 왜 영어나 어려운 한자말을 쓰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국어사전에 ‘땅꺼짐’이 올림말로 되어 있지도 않은 탓도 있지만, 언론인들이 혹시 영어나 한자말을 쓰면 유식하게 보일까 봐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닌지도 모릅니다. 예전 고급 식당에 ‘가든’이라고 가게 이름을 쓴 곳이 많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한 국어학자가 “‘가든’이라고 쓰면 고급식당이고 ‘식당’이라고 쓰면 그저 그런 것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06년 전(1919년) 오늘(4월 11일)은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태어난 날입니다. 1919년 3ㆍ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나라 안팎 애국지사들 사이에선 독립운동을 확대하기 위해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상해임시정부와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 노령임시정부(露領臨時政府) 등이 설립되어 활동했습니다, 그 가운데 상해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구성하고 각도 대의원 30명이 모여서 임시헌장 10개 조를 채택하였으며, 이후 한성임시정부와 노령임시정부를 통합하여 명실상부하게 우리 겨레의 임시정부로 발돋움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초창기에 여러 어려움이 많았지만,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일어나자,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해 전폭적인 지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일제의 반격으로 상하이를 떠나게 되었고, 뒤이어 일어난 중일전쟁(1937)으로 상하이[上海, 1919]→항저우[杭州, 1932]→전장[鎭江, 1935]→창사[長沙, 1937]→광둥[廣東, 1938]→류저우[柳州, 1938]→치장[綦江, 1939]→충칭[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홍역을 물리치기 위한 제사는 비록 과거의 사례가 없으나, 먼저 해조가 대략 을미년의 규칙을 모방하여 ‘여제(厲祭)’를 지내기 하루 이틀 전에 날을 가려 향(香)을 받게 하라. 비록 차례가 아니라도 먼저 성황(城隍)에 고하는 것은 본래 응당 행해야 할 법이니, 발고제(發告祭, 조상에게 고하는 제사)를 지내고 나서 각부(各部)의 중앙에서 여제를 지내되, 지방 고을에도 모두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 이는 《정조실록》 21권, 정조 10년(1786년) 4월 10일 기록입니다. 몇 년 전 우리는 코로나 돌림병이 번져 큰 곤욕을 치렀습니다. 의학이 발달한 지금도 돌림병이 돌면 온 세계가 정신을 못 차리고 난리가 납니다. 하물며 조선시대는 말할 것도 없겠지요. 조선시대는 제사를 지내 줄 자손이 없거나 원통하게 죽은 귀신이 많아지고 이 귀신들의 한이 모이면 세상에 재앙 특히 돌림병이 일어난다고 보고 나라 차원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이를 ‘여제(厲祭)’라 했습니다. 그밖에 재앙을 물리치려고 귀신에게 비는 제사인 ‘양재제(禳災祭)’, 재해가 일어났을 때 지내는 제사 곧 ‘위제(慰祭)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다만, 《세종실록》 56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