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세종실록》 5년(1423) 2월 10일 다섯째 기록을 보면 “대궐 안에서 신분증을 차고 다닐 사람의 수는….” 하고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보면 당시 요리와 관련된 사옹원에 소속된 실제 노비는 250여 명이 넘었다고 나옵니다. 또 조선시대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보면 사옹원에서 요리 관련 일을 하는 노비의 숫자는 400여 명이었지만 잔치가 있게 되면 그 수는 더 늘어났다고 하지요. 이 기록에는 요리 관련 직책의 이름들이 나오는데 고기 요리를 담당한 별사옹(別司饔), 찜 요리 전문가 탕수증색(湯水蒸色), 채소요리 전문가 채증색(菜蒸色), 굽는 요리 전문가 적색(炙色), 밥 짓는 반공(飯工), 술을 담그는 주색(酒色)도 있습니다. 특히 재미난 것은 물 긷는 수공(水工), 물 끓이는 탕수탁반(湯水托飯), 쌀을 고르는 미모(米母), 상차림 전문가 상배색(床排色)도 있지요. 여기서 우리는 수라간에서 요리하는 일이 얼마나 분업화되고 전문화되어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각 수라간에 배치된 미모(米母)와 떡 전문가 병모(餠母)를 빼면 수라간 전문가 절대다수는 남자였다고 합니다. 요즘은 요리가 여자들의 전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보릿고개 - 이영도 사흘 안 끓여도 솥이 하마 녹슬었나 보리누름 철은 해도 어이 이리 긴고 감꽃만 줍던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보네.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여덟째로 ‘소만(小滿)’이다. 소만이라고 한 것은 이 무렵에 햇볕이 풍부하고 만물이 점차 자라 가득 차기[滿] 때문인데 이때는 이른 모내기를 하며, 여러 가지 밭작물을 심는다. 소만에는 씀바귀 잎을 뜯어 나물을 해 먹고 죽순을 따다 고추장이나 양념에 살짝 묻혀 먹는 것도 별미다. 이때 특별한 풍경은 온 천지가 푸르름으로 뒤덮이는 대신 대나무만큼은 ‘죽추(竹秋)’라 하여 푸른빛을 잃고 누렇게 변한다. “죽추(竹秋)”란 대나무가 새롭게 생기는 죽순에 영양분을 공급해 주느라 푸른빛을 잃고 누렇게 변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마치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어린 자식을 정성 들여 키우는 어미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소만 때 겉으로 보기엔 온 세상이 가득 차고 풍족한 것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굶주림의 보릿고개 철인 것이다. “보릿고개”를 한자로 쓴 “맥령(麥嶺)” 그리고 같은 뜻인 “춘기(春饑)”, “궁춘(窮春)”, “춘빈(春貧)”, “춘기(春飢)”, “춘기근(春飢饉)”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 초 땅에 대한 세금은 고려시대부터 시행해오던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으로 땅을 3등급으로 나누고, 걷어 들일 양을 미리 정한 다음 관리가 수확량을 확인해서 결정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관리와 지방 유지들이 결탁하는 비리가 끊이지 않았지요. 이에 세종은 농민에게 일정한 땅을 나눠주고 비옥도와 풍흉년에 따라 등급을 나눈 다음 수확량의 10분의 1만 거두는 세금방식인 공법(貢法)을 시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수입이 줄어들 지주들이 한사코 반대한 것은 물론 농민들 또한 낯선 방법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지요. 그래서 세종은 조정 신하는 물론 양반과 농민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세계 첫 여론조사까지 벌이게 됩니다. 다섯 달 동안의 여론조사에서 찬성이 98,657명, 반대가 74,149명으로 찬성이 많아 공법을 시행하려 했지만, 이후로도 반대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특히나 1440년 9월에는 경상도에서 백성 천여 명이 등문고(登聞鼓, 신문고의 전신으로 백성이 억울한 일이 있을 때 임금께 알리기 위해 치는 북)를 치며 공법의 중지와 답험손실법의 부활을 요구하는 일까지 벌어졌지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산 - 허홍구 하늘 아래 엎드리지 않고도 우뚝 일어선 너의 이름은 없구나. 그랬었구나 그래서 큰 산이 되었구나 백성을 위해 엎드릴 줄 알면 그도 큰 산으로 일어설 수 있는 것이로구나 조선시대 임금을 보면 태조부터 순종까지 27명이다. 27명 가운데 뒤에 ‘조(祖)’가 붙은 임금은 태조,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까지 7명, 뒤에 ‘종(宗)’이 붙은 임금은 16명, 폐위된 임금은 연산군, 광해군 2명이다. 여기서 ‘조’와 ‘종’의 쓰임에는 특별한 원칙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태조(太祖)처럼 보통 나라를 세우거나 끊어졌던 정통성을 다시 일으켜 세운 임금에게 ‘조’를 붙인다. 하지만, ‘선조’도 ‘선종’이었던 것을 광해군이 바꿨고, 영조와 정조는 고종이, 순종은 철종이 ‘종’에서 ‘조’로 바꾸어 그런 원칙도 맞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조’와 ‘종’이 붙은 것과 상관없이 우리 국민이 으뜸 임금으로 꼽는 분은 당연히 제4대 ‘세종임금’이다. 그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 등 이루어놓은 업적이 헤아릴 수 없으리만치 많다. 그러나 세종의 뛰어난 점은 그 업적이 문제가 아니다. 2011년 SBS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사흘 뒤면 24절기 가운데 일곱째인 입하(立夏)로 이때는 한창 찻잎을 따는 시기입니다. 일본에서 발달한 녹차는 곡우(穀雨, 4월 20일) 전에 딴 우전차(雨前茶)를 으뜸으로 치지만, 조선시대 차의 성인으로 불린 초의(艸衣)선사는 '우리의 차(茶)는 입하(立夏) 전후가 가장 좋다.'라고 하였습니다. 원래 쪄서 가공하는 우전차는 신선하고 향이 맑기는 하지만 우리의 전통 덖음차는 입하 때 딴 잎으로 덖었을 때 깊고, 구수하며, 담백한 맛을 내는 차지요. 그렇게 다른 까닭은 두 차가 사촌지간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품종이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래 야생으로 맥이 이어져 온 전통차의 가공방법은 솥에 열을 가하면서 비비듯 하는 덖음방식이며, 그렇게 해서 만든 차를 우려내면 빛깔은 다갈색을 띱니다. 한편 일본 녹차는 우리 차나무가 일본으로 건너가 오랫동안 그곳의 토착화 과정을 거치며 녹차(야부기다종)가 되었는데 쪄서 만드는 증제차고 차를 우리면 연두빛을 띠기에 녹차(綠茶)라 부르는 것이지요. 특히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 역으로 들어온 녹차는 주로 전라남도 보성지방에 심으면서 대량생산 체제로 재배하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는 엉뚱한 말에 밀려 본래의 우리말이 잊혀 가는 것이 있는데 그 가운데 바로 “혼인(婚姻)”도 그 하나로 지금은 모두가 “결혼(結婚)”이란 말을 쓰고 있지요. 먼저 혼인이란 말을 살펴보면 혼(婚)은 혼인할 "혼"이기도 하지만 "아내의 친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姻)은 "사위의 집"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혼인이란 말은 아내와 사위 곧 “남녀가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結婚)”이란 말은 인(姻)이 없으므로 남자가 장가간다는 뜻만 있고 여자가 시집가는 것에 대한 뜻은 없습니다. 따라서 “혼인”에 견주면 “결혼”은 남녀를 차별하는 말이라 할 수 있지요. “혼인”이란 말뿐이 아니라 우리 겨레는 혼인하는 시각도 양을 대표하는 해와 음을 대표하는 달이 만나는 시각(해와 달은 하루에 새벽과 저녁 두 번 만난다) 가운데 저녁 시간인 유(酉)시 곧, 5시에서 7시 사이에 치렀는데 이는 음과 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게 하려는 철학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와 함께 남녀의 짝을 배필(配匹)이라고 하는데 이는 유(酉)시에 나(己)의 짝(配)을 맞이한다는 뜻이 들어있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화 장 - 김 태 영 볼 때마다 내가 예쁘다는 사랑 없었다라면 다듬고 가꾼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생각만으로도 행복의 꽃이 핀다. 봄날 아침 거울 앞에 꽃이 핀다. “이 조그만 가슴에 서리고 서려 있는 여인의 봄볕 같은 정을 붓끝으로 어떻게 그 마음마저 고스란히 옮겨 놓았느뇨?” 우리가 익히 아는 미인도는 조선 후기의 화가 혜원 신윤복이 그렸는데 화가는 그림을 그려놓고 스스로 감격에 겨워 그림에 이런 글을 적어 놓았다. 사계절출판사에서 나온 《한국생활사박물관 10》에는 “다리(가체)를 구름처럼 얹은머리에 동그랗고 자그마한 얼굴, 둥근 아래턱, 다소곳이 솟은 콧날과 좁고 긴 코, 귀밑으로 하늘거리는 잔털”이라는 표현으로 이 여인은 우리 전통미인의 전형이자 우리 전통의 아름다움 그 자체라고 평가했다. 조선 후기의 현실적 소재를 다룬 이 미인도는 이 방면 으뜸 걸작으로 꼽히고 있을 뿐 아니라 한국 여인의 전통적 미인상의 한 전형을 보인 작품으로 비단천 먹 채색으로 그린 것이며, 사실적 기법으로 정통초상기법을 따라 머리털 하나하나까지 세밀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또 윤곽선(쌍선)을 그린 뒤 그 안에 채색하는 구륵법(鉤勒法)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황희, 이하 문체부)와 국립국어원(원장 장소원, 이하 국어원)은 ‘클린 뷰티’를 대신할 쉬운 우리말로 ‘친환경 화장품’을 꼽았다. ‘클린 뷰티’는 유해 성분을 배제하고 환경 보호를 고려해 만드는 화장품을 이르는 말이다. 또 이와 함께 차원이 낮은 단순한 기술이나 기본적인 기술을 뜻하는 ‘로테크(low tech)’는 ‘단순기술’로 쓰자고 제안했다. 문체부는 ‘쉬운 우리말 쓰기 사업’의 하나로 국어원과 함께 외국어 새말 바꿈말 제공 체계를 구축해 운영하고 있다. 문체부와 국어원은 지난 4월 6일(수)에 열린 새말모임*을 통해 제안된 의견을 바탕으로 의미의 적절성과 활용성 등을 다각으로 검토해 이처럼 꼽았다. * 새말모임: 어려운 외래말이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다듬은 말을 제공하기 위해 국어 유관 분야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 문체부와 국어원은 ‘클린 뷰티’처럼 어려운 말 때문에 국민이 정보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친환경 화장품’과 같이 쉬운 말로 발 빠르게 다듬고 있다. 꼽힌 말 외에도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다른 우리말 바꿈말이 있다면 사용할 수 있다. 앞으로도 문체부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의 여섯째, 봄의 마지막 절기로, 곡우(穀雨)다. 곡우란 봄비(雨)가 내려 백곡(穀)을 기름지게 한다고 하여 붙여진 말이다. 그래서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 자가 마른다.”, “곡우에 모든 곡물이 잠을 깬다.”, “곡우가 넘어야 조기가 운다.” 같은 속담이 전한다. 옛날에는 곡우 무렵에 못자리할 준비로 볍씨를 담그는데 볍씨를 담은 가마니는 솔가지로 덮어두었다. 밖에 나가 부정한 일을 당했거나 부정한 것을 본 사람은 집 앞에 와서 불을 놓아 악귀를 몰아낸 다음에 집안에 들어오고, 들어와서도 볍씨를 볼 수 없게 하였다. 만일 부정한 사람이 볍씨를 보게 되면 싹이 트지 않고 농사를 망치게 된다는 믿음이 있어서 그랬다. 볍씨를 담그면 항아리에 금줄을 쳐놓고 고사를 올린다. 이는 개구리나 새가 와서 모판을 망칠 우려가 있으므로, 볍씨 담근 날 밤에 밥을 해놓고 간단히 고사를 올리는 것이다. 또 이날은 부부가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는데 땅의 신이 질투하여 쭉정이 농사를 짓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곡우 무렵엔 나무에 물이 많이 오른다. 곡우물은 주로 산 다래, 자작나무, 박달나무 등에 상처 내서 흘러내리는 수액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은 우리가 음악을 듣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카세트테이프나 시디플레이어를 통해 듣는 것도 옛일이 되었고, 요즘은 컴퓨터로 즐기는 것은 물론 음악가들이 직접 연주하는 공연장도 많지요. 그러나 예전엔 음악 듣기가 무척이나 어려웠습니다. 조선시대 후기에 오면 판소리가 유행하는데 이때는 명창을 불러와 들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다가 1860년대 독일 상인 오페르트를 통해서 축음기라는 것이 들어와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축음기(蓄音機)는 말 그대로 “소리를 쌓아두는 기계”인데 이를 처음 본 조선 관리는 이 축음기를 “귀신소리 나는 기계”라고 했다고 합니다. 명창 박춘재는 우리나라에 축음기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고종 황제 앞에서 축음기에 소리를 녹음해 즉석에서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1887년에는 미국의 빅터레코드사로 건너가 음반을 녹음하기도 하였지요. 그 뒤 1930년대 이후 대중가요가 크게 유행하자 덩달아 축음기도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축음기를 사려면 회사원이 몇 달치 월급을 모아야 살 수 있었기에 축음기를 “방탕한 자의 사치품”이라 하였고 그 탓에 축음기를 가진 총각에게는 딸을 시집보내지 않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