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이 그림은 제 마음대로 그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작품 구상이 있기는 하나 그리다 보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붓끝이 움직이기도 합니다. 이는 곧 이 그림이 한 개인의 의지대로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부처님이 원하시는 대로 그려질 수밖에 없음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그림들은 40여 년 수행 끝에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 태어난 그림이라는 것이지요.” 김태황 작가는 대담에서 자신이 용호도 등을 그리는 정황을 얘기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그림을 볼 때 단순한 그림으로 보지 말고 그림에서 부처님의 가피를 찾기 바란다는 바람을 강조했다. “현몽에 보였다고 해서 무조건 그리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꿈에 보이는 것이 귀신이 장난하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 또 확인합니다. 만일 귀신의 장난을 그린다면 수행하는 중으로서 할 일이 아니죠. 처음 현몽했을 때 얼핏 보이는 형상이 바로 작품을 그릴 수 있는 기법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 뒤로 7년여를 시행착오도 거치면서 그리고 또 그린 끝에 용호도는 태어나게 됐습니다. 제가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렸기 때문에 가능했지, 만일 일반 개인이라면 할 수 있는 일이 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애국가 작사자 규명을 위한 공청회가 국회에서 열린다. 더불어민주당 안민석 국회의원과 ‘애국가바로잡기국민운동(상임대표 임진택)’은 <애국가 작사자 규명 - 정부의 공식 재조사가 필요하다> 공청회를 2021년 8월 11일(수) 16시 국회 제1간담회실에서 진행한다고 밝혔다.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을 참작해 비대면 토론으로 진행하며, 유튜브 채널(안민석 TV)을 통해 실시간 중계할 계획이다. 애국가가 작자미상의 곡으로 남겨진 책임은 일차적으로 정부에 있다. 1955년 애국가 작사자 규명을 위해 소집된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문교부 산하 국사편찬위원회 소속, 3달 만에 해체)‘가 안창호 작사설을 배제하고 윤치호 작사설을 유력시하다가 작사자 미상으로 결론 내림으로써 오히려 진상을 가리고 진실을 왜곡한 데에서 애국가 작사자 논란이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애국가 작사자 규명> 공청회는 작사자 규명에 있어 정부의 책임과 의무를 분명히 하고, 정부(구체적으로는 교육부 산하 국사편찬위원회)가 결자해지의 자세로 애국가 작사자를 밝히는데 나설 것을 요구하고자 마련되었다. 공청회를 주관하는 ‘애국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양평군(陽平君) 허준(許浚)은 일찍이 선왕 때 의방(醫方, 병을 치료하는 기술)을 펴내라는 명을 특별히 받들고 몇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심지어는 유배되어 옮겨 다니고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가운데서도 그 일을 쉬지 않고 하여 이제 비로소 책으로 엮어 올렸다. 이어 생각건대, 선왕께서 펴내라고 명하신 책이 과인이 계승한 뒤에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내가 비감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다. 허준에게 숙마(熟馬, 길이 잘 든 말) 1필을 직접 주어 그 공에 보답하고, 이 방서(方書, 치료술을 엮은 책)를 내의원이 국(局)을 설치해 속히 찍어내게 한 다음 조정과 민가에 널리 배포토록 하라." 위는 광해군일기[정초본] 32권, 광해 2년(1610년) 기록으로 허준이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했다는 내용입니다. 《동의보감》은 2009년 7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랐고, 2015년에는 보물 제1085-1호에서 국보 제319-1호로 승격되었으며, 올해(2021년)에는 국립중앙과학관에서 주관하는 ‘국가중요과학기술자료 과학기술사-3-2(2020)’로도 등록되었습니다. 책 제목의 ‘동의(東醫)’란 중국 남쪽과 북쪽의 의학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축음기와 레코드가 소개된 것으로 알려진 1890년 이후 우리나라의 음반 시장은 우리 기술이나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외국인의 마당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는 약 20개 정도 음반회사가 등장하기도 했는데, 1933년 이후로는 콜럼비아ㆍ오케ㆍ빅타ㆍ포리돌ㆍ태평 등 5대 음반사가 음반시장을 장악했지요. 하지만 이런 음반사들은 일본 음반사들의 자회사였기에 광복과 함께 이름마저 사라졌습니다. 광복 이후 민족자본에 의한 음반산업이 등장할 기회가 되었는데 1947년 8월 5일 고려레코드가 처음으로 국산 음반을 제작하면서 국내 음반산업이 걸음마가 시작되었지요. 첫 음반은 광복에 맞춰 '애국가'가 그 문을 열었습니다. 그 소개를 보면 합창에 음악대학 합창단, 독창에 송진혁, 지휘에 김성태, 피아노 반주에 최성두가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이 음반에는 ‘조선의 노래’, ‘건국의 노래’, 해방기념가‘, ’계명의 노래‘ 등도 녹음돼 있었지요. 그런데 일제강점기 음반 제작 기술을 배울 수 없었던 우리로서는 힘겹게 음반제작을 이루어낸 것으로 원반 1장을 다듬는 데만 한 시간 이상 걸렸음은 물론, 가수나 반주자가 조금이라도 실수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인간과 예술의 만남은 구도의 완성점으로 지극히 창조적이다. 예술은 인간의 깨달음의 경지를 열어주고, 깨달음은 창조적 깊이를 더해주는 그림 특히 용호선경도와 달마도 등을 그리는 스님 김태황 작가의 제7화 개인초대전이 8월 5일부터 7일까지 서울 보라매 롯데타워 지하 사회적기업 ㈜뱅기노자의 전시공간 ‘뱅기노자 자르떼갤러리’에서 열린다. 김태황 작가는 15살 때 부산 선암사에서 불문에 입문하여 40여 년 동안 수행과 더불어 그림과 돌로서 부처님의 가피를 표현해 오고 있다. 돌과 그림에 온 정성과 영혼을 담아 정진하던 차 마침내 부처님을 뵐 때마다 소이부답(笑而不答, 그저 웃기만 하면서 답을 하지 않는 것)과 염화시중(拈華示衆,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일)의 화답(和答)을 느끼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특히 이번 개인전은 40여 년 동안 수행과 더불어 그림과 돌로써 가피(加被)를 표현하며, 전통적 용을 민화적 표현이 아닌 일필휘지의 기법으로 선묵화에 담은 <용호선경도>, <칠룡도>, <비룡도> 등을 전시한다. 그리고 이 그림들은 천일기도 중에 현몽을 받고 7년 3개월여의 꾸준한 정진 끝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한낮 땡볕 논배미 피 뽑다 오신 아버지 / 펌프 꼭지에 등대고 펌프질 하라신다 / 마중물 넣어 달려온 물 아직 미지근한데 / 성미 급한 아버지 펌프질 재촉하신다 / 저 땅밑 암반에 흐르는 물 / 달궈진 펌프 쇳덩이 식혀 시린물 토해낼 때 / 펌프질 소리에 놀란 매미 제풀에 꺾이고 / 늘어진 혀 빼물은 누렁이 배 깔고 누워있다" 위는 고영자 시인의 '펌프가 있는 마당풍경' 시인데 무더운 여름날 펌프가 있는 마당 풍경이 수채화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2,000년에 펴내 근세기 한국문학의 고전이라고 평가되는 조세희의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도 “동네 입구로 들어선 꼽추는 헐린 외딴집 마당가로 가 펌프의 손잡이를 눌렀다. 그는 두 손으로 물을 받아 입을 축였다.”라는 대목이 나오는 걸 우리는 기억합니다. 지금 지구상은 온통 불볕더위로 몸살을 앓고 있지요. 이렇게 몹시 더운 날, 예전엔 우물물을 길어 올리는 우물가가 있었지만, 지금처럼 수돗물을 쓰기 전에는 한동안 집집이 마당 가에 펌프가 있었습니다. 펌프는 압력작용을 이용하여 관을 통해 물을 퍼 올리는 기계입니다. 널찍한 마당 한쪽에 놓여 있던 펌프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943년 오늘(8월 3일)은 백산 안희제 선생이 숙원인 광복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둔 날입니다. 백산 선생은 1916년 무렵 고향의 논밭 2천 마지기를 팔아 자본금을 마련하고, 뜻 있는 이들과 함께 부산 중앙동에 포목과 건어물 따위를 파는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세워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소규모였던 상회는 1917년 합자회사로 바꾸고 1918년이 되자 주식회사로 전환했는데 이때 중요 출자자는 안희제, 경주 최부자집 주손 최준, 경상우도관찰사를 지낸 윤필은의 아들 윤현태였지요. 백산무역주식회사는 독립운동자금을 위한 나라 안 독립운동기지로 삼기 위해 영남지역 지주들이 여럿 참여해 조직한 대규모 무역회사였습니다. 그런데 독립운동자금은 회사의 손익과 상관없이 계속해서 지원해야 했기에 결손이 거듭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도 그걸 알고 있는 주주들은 1921년 한 차례, 1923년 두 차례나 자금을 보태 자금 위기를 막아주었는데 이러한 지원은 장부거래 형식을 띄었기 때문에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광복이 되고 귀국하여 경교장으로 온 김구 선생은 최준 선생을 불러 독립자금 지원에 고맙다는 말을 한 다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이 조그만 가슴에 서리고 서려 있는 여인의 봄볕 같은 정을 붓끝으로 어떻게 그 마음마저 고스란히 옮겨 놓았느뇨?” 우리가 익히 아는 미인도는 조선 후기의 화가 혜원 신윤복이 그렸는데 화가는 그림을 그려놓고 스스로 감격에 겨워 그림에 이런 글을 적어 놓았습니다. 사계절출판사에서 나온 《한국생활사박물관 10》에는 “다리(가체)를 구름처럼 얹은머리에 동그랗고 자그마한 얼굴, 둥근 아래턱, 다소곳이 솟은 콧날과 좁고 긴 코, 귀밑으로 하늘거리는 잔털”이라는 표현으로 이 여인은 우리 전통미인의 전형이자 우리 전통의 아름다움 그 자체라고 평가했지요. 조선 후기의 현실적 소재를 다룬 이 미인도는 이 방면 으뜸 걸작으로 꼽히고 있을 뿐 아니라 한국 여인의 전통적 미인상의 한 전형을 보인 작품으로 비단천 먹 채색으로 그린 것이며, 사실적 기법으로 정통초상기법을 따라 머리털 하나하나까지 세밀하게 묘사한 작품입니다. 또 윤곽선(쌍선)을 그린 뒤 그 안에 채색하는 구륵법(鉤勒法)의 그림이라고 하는데 화폭은 113.9cm x 45.6cm로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또 하나의 미인도가 있습니다. 바로 윤두서의 손자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인도 불교를 전파하려고 중국에 온 스님 가운데 달마대사라는 분이 있었다. 달마대사는 원래 인도 남부에 있던 팔라바라는 왕국의 왕자였는데 중국에 건너와서 새로운 불교 곧 '선종(禪宗)'를 전파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이전까지의 불교가 임금이나 귀족들을 위한 것이었던 것과 달리, 선종은 사람이면 누구나 본래 타고난 마음을 잘 터득하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한 불교다. 달마대사의 이런 가르침은 귀족 종교를 쳐다보기만 하던 보통 사람들에게 큰 환영을 받으면서 널리 전파됐다. 이 달마대사는 신비로운 능력을 갖췄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 달마대사를 그린 ’달마도(達磨圖)’를 통해 사람들은 달마대사를 오래 기억하고자 했다. 그런데 조선 중기 신필로 불렸던 화원 김명국은 특히 달마도로 유명했다. 달마대사 그림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달마대사는 원래 인도 남쪽 지방 출신답게, 눈이 움푹 들어가고 코는 갈고리처럼 그렸다. 또 눈썹은 매우 짙고 수염도 덥수룩하다. 그뿐만이 아니라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으며, 무얼 꿰뚫어 보려는 듯 아주 커다랗고 매서운 눈을 가졌다. 대체로 짙은 먹을 구사하면서도 간결한 구성과 빠른 필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독 재 자 - 허 홍 구 아침마다 수염을 깎는다. 내 몸에서 누리는 저 자유를 사정없이 잘라 버렸다. 오늘도 나는 독재자가 되었다. 제 몸에 생명도 잘라 버리는 무지막지한 권력은 독재자다. 지난 7월 8일 뉴스를 보면 미국의 올해 총기난사 사건이 339건이나 벌어져 사망자가 371명, 부상자가 1천429명으로 집계됐다고 한다. 총기난사 사건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22% 늘었단다. 미국은 현재 등록된 총기만도 3억 9천만 정이라고 하는데 한 마디로 미국 사람들은 총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가 보다. 하지만 그 총부리가 결국 자신들에게도 향한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그에 견주면 우리 겨레는 단군조선 때부터 ‘홍익인간’을 내세우며, 모든 사람이 함께 살기를 갈망했다. 그리고 이 ‘홍익인간’은 우리나라의 건국이념이 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교육법의 기본정신이 되기도 하였다. “찬 서리 /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 조선의 마음이여”라고 김남주 시인은 <옛 마을을 지나며>라는 시에서 입동 즈음 정경을 얘기했다. 우리 옛 조상들은 그 맛있는 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