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그대들은 다투지 말라. 나도 잠깐 공을 말하리라. 미누비 세누비 누구로 하여 젓가락같이 고우며, 혼솔(홈질한 옷의 솔기)이 나 아니면 어찌 풀로 붙인 듯이 고우리요. 바느질 솜씨가 그다지 좋지 못하여 들락날락 바르지 못한 것도 나의 손바닥을 한번 씻으면 잘못한 흔적이 감추어져 세요(바늘)의 공이 나로 하여금 광채 나니라." 이는 바느질(침선)에 사용하는 자, 바늘, 가위, 실, 골무, 인두, 다리미를 의인화하여 인간 세상을 풍자한 한글 수필 《규중칠우쟁론기(閨中七友爭論記)》의 인두(인화낭자) 부분입니다. 이젠 잊혔지만, 예전 어머니들이 바느질할 때 쓰던 도구 가운데 화롯불에 묻어 놓고 달구어 가며 옷감의 구김살을 눌러 펴거나 솔기를 꺾어 누르는 데 쓰던 인두가 있었습니다. 인두는 무쇠로 만들며 바닥이 반반하고 긴 손잡이가 달렸지요. 형태는 인두머리의 끝이 뾰족한 것, 모진 것, 둥근 것 따위가 있는데 특히 인두머리가 뾰족한 것은 저고리의 깃ㆍ섶코ㆍ버선코ㆍ배래ㆍ도련 등 한복의 아름답고 정교한 곡선을 만드는 데 썼습니다. 또, 마름질(재단)할 때 재단선을 표시하려고 금을 긋는 데에도 썼는데 지금은 그 역할을 초크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운서(韻書)에 이르기를 ‘동무(同舞)는 바로 마주 서서 춤을 추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동무’라고 하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이 글은 조선후기의 학자 조재삼(趙在三)이 쓴 백과사전 격인 책 《송남잡지(松南雜識)》에는 나오는 말입니다. 이 “동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늘 친하게 어울리는 사람, 어떤 일을 짝이 되어 함께 하는 사람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북한에서 쓰는 말이라고 하여 언젠가부터 쓰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두문불출 골방에 엎드려 한서나 뒤적이는 이가 다 빠진 늙은이는 내 걸음동무다." 이 글은 신경림 시인의 “산동네"라는 시 일부입니다. “걸음동무”는 같은 길을 가는 친구 곧 “동행”을 말하지요. 동무와 비슷한 말로 “벗”과 “친구”도 있습니다. “벗”은 비슷한 나이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을 말하며, “친구(親舊)”는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을 뜻하지요. 김인호 시인은 <어깨동무>란 시에서 “태풍이 지나간 들 / 주저앉아 버린 벼들을 일으켜 세웁니다. / 대여섯 포기를 함께 모아 혼자서는 일어서지 못하는 벼들이 서로를 의지해 일어서는 들판”이라고 노래합니다. 우리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입 춘 - 허홍구 백성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눈보라 치던 황량한 땅 헤치고 너 기어이 일어서서 오는구나 여리고 순한 네 더운 숨결이 꽁꽁 얼어붙은 대지를 녹이고 사랑의 숨결처럼 달려오는구나 이제 부디 향기의 꽃을 피워라 상처 난 몸과 맘을 어루만져주고 만백성이 무리 지어 꽃 피게 하라 넘어진 사람들 일어서게 하여 다시 한번 더 꿈꾸게 하라 후회 없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게 우리는 추운 한겨울 세수하고 잡은 방문 고리에 손가락이 쩍쩍 달라붙었던 기억이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저녁에 구들장이 설설 끓을 정도로 아궁이에 불을 때 두었지만 새벽이면 구들장이 싸늘하게 식었고, 문틈으로 들어오는 황소바람에 몸을 새우처럼 웅크릴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일어나 보면 자리끼로 떠다 놓은 물사발이 꽁꽁 얼어있고 윗목에 있던 걸레는 돌덩이처럼 굳어있었다. 또 눈 덮여 황량한 겨울 들판엔 칼바람 추위 속에 먹거리도 부족하니 사람도 뭇 짐승도 배곯고 움츠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소설가 김영현은 그의 작품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에서 "도시에서 온 놈들은 겨울 들판을 보면 모두 죽어 있다고 그럴 거야. 하긴 아무것도 눈에 뵈는 게 없으니 그렇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네 민속품 가운데는 쌀을 이는 도구로서 조릿대를 가늘게 쪼개서 엮어 만든 ‘조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해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뜻에서 설날 새벽에 사서 벽에 걸어두는 것을 우리는 특별히 ‘복조리’라 합니다. 복조리는 있던 것을 쓰지 않고 복조리 장수에게 산 것을 걸었는데 일찍 살수록 길하다고 여겼지요. 따라서 섣달그믐 자정이 지나면 복조리 장수들이 “복조리 사려.”를 외치며 골목을 돌아다니고, 주부들은 다투어 복조리를 사는 진풍경을 이루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정월 초하룻날 새벽에 복조리 장수가 집집마다 다니며 복조리 1개씩을 집안에 던지고 갔다가 설날 낮에 복조리 값을 받으러 오는 지방도 있습니다. 그런데 복조리를 살 때는 복을 사는 것이라 여겨 복조리 값은 당연히 깎지도 물리지도 않았지요. 설날에 한 해 동안 쓸 만큼 사서 방 한쪽 구석이나 대청 한 귀퉁이에 걸어놓고 하나씩 쓰면 복이 많이 들어온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복조리에는 실이나 성냥ㆍ엿 등을 담아두기도 했지요. 또 복조리로 쌀을 일 때는 복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라는 뜻으로 꼭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일었습니니다. 그런데 남정네들은 복조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남녘땅 제주에는 볼거리도 많지만 특이한 먹거리도 많습니다. 그런데 2013년 제주도에서는 자리물돔회, 갈치국, 성게국, 한치물회, 옥돔구이, 빙떡, 고기국수 등을 ‘제주도 7대 향토음식’으로 꼽았습니다. 이 가운데 메밀가루 부꾸미에 채 썰어 데쳐낸 무소를 넣고 말아서 만드는 빙떡은 제주도에 가면 꼭 먹어봐야 한다고 하지요. 빙떡은 메밀 부꾸미의 담백한 맛과 무소의 삼삼하고 시원한 맛이 어우러져 독특한 맛을 냅니다. 남원읍에서는 말아 놓은 모습이 흡사 멍석과 같다 하여 ‘멍석떡’이라고 하며, 3대 봉양을 제외한 작은 제사에서 약식으로 제물을 차릴 때 꼭 쓴다고 하여 ‘홀아방떡’ 또는 ‘홀애비떡’이라고 하고 서귀포에서는 ‘전기떡’(쟁기떡)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빙떡은 만드는 방법이 복잡하지 않아 빠른 시간에 적은 돈으로 많은 양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떡인데 이웃이 잔치가 있거나 상을 당하면 ‘대차롱’(뚜껑이 있는 대나무 바구니)에 담아 한 바구니씩 보냈습니다. 이때 부조를 받은 집의 여주인은 떡을 손으로 떼어내어 함께 쫓아온 귀신의 몫으로 밖으로 던져 잡신이 안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한 뒤 모두가 함께 먹는데 남은 것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고려는 일월식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천문과 기상 현상을 관측한 기록을 대단히 많이 후세에 남기고 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려 475년 동안 일식과 월식이 각각 135건과 226건에 이르고, 심지어 맨눈으로 해의 흑점(黑點)을 관측했다는 사실을 비롯하여 해성과 유성(별똥별)이 출현했다는 기록 또한, 많은 양에 이른다고 하지요. 그런데 아쉽게도 조선시대의 천문도는 여럿 알려져 있으나 그 이전 시기의 천문도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안동 권씨 수곡종택(樹谷宗宅) 소장품으로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 수장되고 있는 ‘혼천요의(渾天要儀)’는 여러 면에서 고려시대의 진귀한 천문도일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한국 천문학계의 독보적인 존재인 과학문화진흥원 나일성 이사장이 그의 책 《과학고서해제집》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 ‘혼천요의(渾天要儀)’는 종이에 그린 천문도로서 제법 큰 가로 82.5cm, 세로 72.5cm의 크기입니다. 다만 천문도 맨 위에 어색한 모양으로 ‘渾天要儀’라고 쓰여 있을 뿐 제작자 이름이 없고, 제작연대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를 찾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일성 이사장은 혼천요의 오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은 우리 이천만 겨레를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와 승리를 얻은 세계 여러 나라 앞에 우리가 독립할 것임을 선언하노라.” 위는 3.1만세운동에 불을 지핀 도쿄 2.8독립선언서의 일부분입니다. 1910년 조선은 일제의 강압으로 “한일강제병합"을 당하는 수모를 당해야 했습니다. 이로부터 9년 뒤 도쿄에 유학하고 있던 조선 청년들은 조국의 아픔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1919년 1월 도쿄 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결의한 뒤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고 <민족대회 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2월 8일 선언서와 청원서를 각국 대사관, 공사관과 일본 정부, 일본 국회 등에 보낸 다음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대회를 열어 독립선언식을 거행했지요. 그러나 이들은 가차 없이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나라 밖으로 파견된 사람을 뺀 실행위원 모두를 포함 27명의 유학생이 검거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체포되지 않은 참가자들특히 김마리아, 차경신 지사 등이 조선에 잠입하였고 이후 3.1 독립선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고 향 - 장 만 영 그대 고향에 다녀왔다니 묻노네만 내 살던 창가에 옛 피던 매화는 피었던가 아직은 이르던가. “서양 시인들은 녀자와 장미 (薔薇)를 노코는 시를 못 지으리만큼 녀자와 장미를 노래하엿다 하면 동양의 시인들은 술과 매화가 업고는 시를 지을 수가 업스리만큼 술과 매화를 을펏슴니다. 그는 지나(중국) 시인이 그랫고 일본 시인이 그랫고, 우리 조선의 시인들이 또한 그랫슴니다. 그리고 정다운 고향을 떠나 천리 객장에 몸을 붓친 외로운 손도 고향의 친구를 만나 고향 소식을 무를 때에는 가정의 안부보다도 뜰 압헤 심어잇는 매화의 피고 안 핀 것을 먼저 뭇고 과년한 처녀가 그리운 님을 기다릴 때에도 매화 열매의 일곱 남고 셋 남고 필경은 다 떠러지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생각이 더욱 간절 하얏답니다.” 이는 일제강점기 잡지 《별건곤》 제5호(1927년 03월 01일)에 실린 “매화(梅花)와 수선(水仙) 이약이”에 나오는 구절이다. 왜 그렇게 우리 겨레는 매화를 좋아했을까? 조선 중기 문인 신흠의 상촌집에는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이라는 구절이 있다. 매화는 한평생 추운 한파에 꽃을 피워도 향기를 팔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올해 설 연휴에는 세배와 차례 문화에 많은 변화가 예상된다. 코로나19 방역을 위한 5인 이상의 사적 모임이 금지됨으로써 가족이라도 거주지가 다르면 4인까지만 모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설 연휴에는 객지에 나가있던 가족들이 모여 세배를 주고받는 광경도 보기 힘들 듯하고, 그러다 보니 차례음식도 크게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조현재)은 2017년부터 제례문화의 현대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예서(禮書)와 종가, 일반 가정의 설차례상에 차리는 음식을 조사한 바 있다. 그 결과 예서와 종가에 견주어 일반 가정의 차례 음식이 평균 5~6배가량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주자가례》, 설날 차례 간단한 음식을 차려두고 인사 드려라 제례문화의 지침서인 《주자가례》에 따르면 설날은 새로운 해가 밝았음을 조상에게 알리기 위해 간단한 음식을 차려두고 인사를 드리는 일종의 의식(儀式)이다. 그래서 설날과 추석에는 제사를 지낸다고 하지 않고 차례(茶禮)를 올린다고 한다. 《주자가례》에서는 설차례상에 술 한잔, 차 한잔, 과일 한 쟁반을 차리고 술도 한 번만 올리며 축문도 읽지 않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