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전시(戰時) 상황에서 물자 특히 무기 생산에 필요한 금속자원이 부족하여 그것을 보충하기 위하여 민관이 소유하고 있던 금속류의 회수가 시작되었습니다. 1941(소화16)년 8월 30일 공포하여 같은 해 9월 1일 시행된 국가총동원법에 기초한 ‘금속회수령’이 그것입니다. 금속회수는 관공서, 직장, 가정을 불문하고 어린이들의 완구를 포함한 모든 금속류를 회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아이치현(愛知縣)에 있는 “이누야마고등학교(犬山高等學校)의 역사”에 나오는 일부분이다. 금속류 곧 쇠붙이란 쇠붙이는 모두 전쟁 물자로 쓰기에 바쁘다 보니 이누아먀고등학교는 철제 교문까지 뜯겨 빼앗기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때 상황은 듣기 좋은 말로 ‘금속류 회수’이지 이건 숫제 공출을 넘어 ‘갈취’ 수준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전쟁 중에 일본의 분위기는 사뭇 진지(?)했다. 부인들은 “목숨을 다 바쳐 나라를 위해 몸에 지닌 것을 모두 내놓자”는 구호로 제국주의 정부의 ‘금속류 회수’ 작업에 동참했다. 1943년(소화18) 4월에는 ‘비상회수’ 조치가 내려졌고 11월에는 ‘강제회수’로 까지 진전하고 있었다. 이 무렵의 강제 회수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편강렬(片康烈, 1892.2.28~1929.1.16) 선생의 집안은 경북 김천에서 대대로 살아왔으며 할아버지 대에 황해도 연백으로 이주했다. 선생은 1892년 2월 28일 황해도 연백군 봉서면 현죽리 목동에서 편상훈(片相薰)의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전국 각지에서는 토왜복수(討倭復讐)를 외치며 의병이 일어났다. 1907년 선생은 연고지인 경상도 지방에서 일어난 이강년 의병진의 소집장 겸 선봉장으로 참전하여 경상, 충청도 일대에서 큰 공적을 세웠다. 1908년 전국의 의병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13도 창의대진소(13道 倡義大陣所)를 결성하고 서울 진공작전을 결행하였다. 이때 선생은 중군장 허위(許蔿)의 휘하에서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출하여 싸웠으나 부상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 선생은 일경의 감시를 피하여 평양의 숭실학교에 진학하였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비분강개하여 다시 국권회복운동에 나섰다.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하여 조직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황해도 지회에서 은밀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다가 일제가 날조한 사내(寺內)총독 암살 모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해운대에 올라 이안눌 구름속에 치솟는 듯 아스라이 대는 높고 굽어 보는 동녘바다 티없이 맑고 맑다 바다와 하늘빛은 가없이 푸르른데 훨훨나는 갈매기 등너머 타는 노을 이는 해운대 푸른 바다가 보이는 곳에 세워둔 조선중기 문신인 이안눌(1571~1637)의 노래비에 나오는 시다. 이안눌은 동래부사(선조 41,1608년)로 부임하여 2년 동안 해운대의 아름다운 절경을 소재로 해운대에 올라, 해운대 따위의 주옥 같은 시를 남겼다. 해운대 백사장 위 산책길을 걷다보면 중간 쯤 '책읽는 바다 까페'가 있고 그 언저리에 이안눌의 노래비가 서있다. 그러나 그 앞에 못미처 해운대해수욕장지구 지진해일 대피 안내판이 있는데, 자세히 보니 일본어 부분의 오자가 있어 펜을 들었다. 누가 일본어까지 보겠느냐만 그래도 일본어 표기로 해놓을 때는 오자없이 교정을 제대로 봐서 안내판을 만드는 게 당연한 이치 같아 지적해본다. 오자 부분은 다음 부분이다. 태풍 지진 해일시 알아야 할 사항 : 台風·シナミの時の注意事項 일본어 부분의 밑줄친 부분은 츠나미(ツナミ)가 아니라 시나미(シナミ)로 되어 있다. 아마도 안내판을 만드는 사람이 츠(ツ)와 시(シ)자가 비슷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은 태풍의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해마다 여름이면 초비상이다. 글쓴이가 8월 20일 무렵 일본에 가 있을 때도 태풍 제9호와 10호의 상륙으로 일본열도가 긴장을 늦추지 않더니 9월 6일 기상청 일기예보에는 어느새 발달한 제13호 태풍이 오키나와 남쪽 나하시(那覇市) 180km 부근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보도다. “태풍 제13호는 6일 18시 북동쪽으로 매시간 35km 진행하고 있으며 중심기압 1000hPa、중심부근의 최대 풍속은 20m/s이다. 이 태풍은 7일 18시에는 무로토미사키(室岬) 남쪽110km에 도달할 예정이니 태풍주변 해역 및 태풍의 진로로 예상되는 부근에서는 경계를 늦추지 말라.”는 일기예보가 하루 종일 TV와 라디오, 신문 따위에서 반복해서 일본 국민에게 알려주고 있다. 같은 시각 한국의 일기예보는 태풍 이야기가 없다. 예부터 일본에서 “210일 날 큰 태풍이 온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는데 210일이란 새해 1월 1일부터 세어서 210일째 되는 날로 9월 1일이나 2일이 이에 해당하는 날이다. 약간 210일설은 벗어나지만 1954년 9월 26일은 일본 태풍 관측사상 가장 큰 태풍이 몰아쳐 사망자와 행방불명자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김찬 선생님, 저는 아들만 둘 뒀습니다. 저는 아들이 16살이 되면 같이 서점에 가서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선물했습니다. 아리랑의 주인공 장지락(김산)이 중국어 사전 하나 끼고 광활한 중국으로 건너간 것이 그 나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아리랑이라는 책은 저에게 감동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아리랑을 왜 미국의 한 ‘아주머니’가 썼어야 했는가에 의문 아닌 분노를 가졌습니다. 제가 님 웨일즈를 ‘아주머니’라는 표현을 했다고 어떤 교수님이 화를 내시더군요. 실제 님 웨일즈는 아리랑 말고, 습작 수준의 소설 정도를 남긴 무명 작가였을 뿐입니다. 제가 분노한 것은 당시 우리나라에도 춘원 이광수를 비롯해 구보 염상섭을 비롯한 많은 소설가와 작가들이 있었지만(물론 심훈의 상록수도 있지만) 아리랑과 같이 감동적인 글을 남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 선배의 역정적 삶의 기록을 외국인의 손에 맡겨야 했느냐는 안타까움입니다. 제가 기회가 되면 외국인이 쓴 아리랑보다 감동적인 일대기를 그려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그래서입니다. 11년 전 저에게 그 기회가 왔습니다. 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님과 같이 중국을 갔을 때입니다. 저는 경향
[우리문화신문= 이윤옥기자] 나중소 선생은 경기도 고양군(현재 서울 정릉) 출신으로 16세에 무과에 급제한 뒤 대한제국 무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대한제국 진위대 부위(副尉)로 재직 중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로 해산 당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등에서 무장투쟁을 벌였다. 1919년 3월 선생은 북간도 왕청현에서 서일 등 대종교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정의단의 교관으로 초빙되어 수백 명의 무장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북로군정서로 개편되자 참모부장에 임명되어 사령관 김좌진을 보좌하며 부대를 이끌었다. 선생은 북로군정서군의 사관연성소 교수부장으로 300여 명의 독립군 사관을 양성하였으며, 청산리대첩에 참전하여 백운평과 천수평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청산리대첩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의 연합부대가 1920년 10월 21일부터 6일 간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 정예군대와 10여 차례 벌인 전투였다. 1,300명의 독립군 연합부대는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을 포함한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하는 등 대승을 거뒀다. 청산리대첩 후 선생은 북간도를 거쳐 러시아 이만 지역으로 이동하여 1921년 4월 36개 독립군 단체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나라에는 오래된 절들이 많다. 도다이지(東大寺), 다이안지(大安寺) , 호류지(法隆寺), 고후쿠지(興福寺)등 일일이 열거 할 수 없을 만큼 고찰들이 있다. 이러한 고찰이 메이지(明治)정부의 훼불로 수난을 받은 이야기는 익히 들어온 바와 같다. 그것은 마치 조선시대의 훼불을 보는 듯 한데 안타까운 것은 절의 문화재가 한순간에 날아갈 뻔 한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때는 1871년(메이지4년) 11월의 일이다. 원래는 절과 신사가 한 경내에 나란히 있었지만 불교를 폐한다는 정책이 발표되고 곧 시행에 들어가자 천년고찰 고후쿠지(興福寺) 승려들은 승직을 박탈당하고 신사(神社)로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고후쿠지(興福寺) 경내에 있던 오중탑의 운명이다. 승려들이 사라진 절 경내는 이내 황폐해지기 시작했는데 이곳에 있는 오중탑과 삼중탑 역시 임자를 찾아 판매에 부쳐졌다. 오중탑은 당시 돈으로 250엔, 삼중탑은 30엔에 미사브로(彌三郞)라는 사람이 사게 되었는데 미사브로는 이 탑을 불태워 없애고 그 대신 탑에 사용된 금붙이를 거둘 요량이었다. 그러나 주민의 반대로 무산되어 다행히도 아름다운 오중탑을 오늘날 보게 된 것이
[우리문화신문= 도쿄 이윤옥 기자]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어제(27일) 오후 5시부터는 도쿄 오오츠카역(大塚驛) 근처에서 아와오도리(阿波踊り、Awa Odori) 잔치가 열렸다. 도쿄는 일주일전 태풍 9호의 영향을 받은지 얼마 안 되는데 또 다시 이틀 뒤에 10호가 상륙한다는 뉴스에 모두 염려하던 차에 아와오도리 잔치가 예정대로 열릴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가랑비가 내려 행사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올해로 제 44회째인 오오츠카 아와오도리 (大塚 阿波踊り)는 도쿄상공회의소와 도시마구(豊島區)등이 주최가 되어 해마다 8월에 여는 마츠리(잔치)다. 한마디로 지역상권을 중심으로한 한바탕 잔치인 셈이다. 원래 아와오도리(阿波踊り)는 도쿠시마현(徳島県)을 발상지로 하는 봉오도리(盆踊り)로 에도초기부터 시작한 400년의 역사를 지닌 일본의 전통 예능의 하나이다. ‘오도리(盆踊り)’가 춤을 말하는 것처럼 일본 전통 옷을 곱게 차려입은 여성들이 춤을 추며 가두행진을 하는 것쯤으로 생각해도 무리는 아니다.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으나, 한국의 경우 아리랑 발상지와는 상관없이 각 지역에서 아리랑잔치를 여는 것과 비슷한 예다. 단지 봉오도리는 노래가 아니라 춤이라는 점이 다르다. 아
[우리문화신문=도쿄 이윤옥 기자] 도쿄 간다(神田) 진보초(神保町) 고서점가를 뒤지다가 날이 무더워 진보초(神保町) 뒷골목 북까페에 들어가 냉커피 한잔을 시켰다. 북까페인지는 알았지만 특별히 책을 사고 싶은 마음은 없어 안락의자에 앉아 냉커피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님, 냉커피 나왔어요’라는 소리에 일어서서 커피를 들고 나오다가 마주친 책 제목이 《현대는 무엇을 잃었는가? 언어, 가족, 길거리 풍경...》라는 책이다. ‘소화의 도쿄(昭和の東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이 눈에 띈 것은 전날 서울의 지인과 나눈 한 통의 전화 때문이었다. “며느리가 임신을 했는데 한 달에 한 번씩 초음파를 찍는다고 하여 태아에게 괜찮을까? 라고 한마디 했더니 카톡으로 뭐가 문제냐는 듯이 며느리가 답을 해왔다.”며 야속하다는 전화였다. 그렇잖아도 갱년기 우울증인 지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도 스마트폰이 대세다. 일부 젊은이들은 전철을 타고 내릴 때조차도 스마트폰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지하철 곳곳에 ‘제발 타고 내릴 때는 스마트폰을 쓰지 말라’는 홍보물까지 등장했다.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현대인이 잃은 것은 가족보다도 ‘말(언
[우리문화신문=도쿄 이윤옥 기자]저녁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이었지만 25일 들린 아사쿠사 센소지(浅草寺)는 언제나처럼 사람들로 초만원 상태였다. 도쿄를 대표하는 사진으로 자주 등장하는 센소지 가미나리몽(浅草寺 雷門) 앞에는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도쿄에서 센소지를 보지 않았다면, 서울에서 인사동을 안보고 간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만큼 아사쿠사 센소지(浅草寺)는 일본 관동지역에 몇 안 되는 고찰인데다가 절보다도 절 입구에 들어서 있는 기념품가게(나카미세)가 관광객들에게는 매력 만점으로 꼽히는 곳이다. 더욱 주목하고 싶은 것은 센소지가 고대 한국과 관련이 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이 절은 백제계 어부 형제인 히노구마 하마나리, 다케나리가 서기 628년 스미다가와(隅田川)에서 고기를 잡다가 건져 올린 작은 금불상이 인연이 되어 창건한 절로 《신찬성씨록》에 “히노구마(檜前) 씨는 백제계의 고조(高祖)” 라고 나와 있다. 센소지에 대해서는 백제계 어부형제 뿐만이 아니라 백제계 하지(土師中知) 스님 이야기도 해야겠지만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은 아사쿠사신사(浅草神社)에 있는 고구려개(고마이누, 高麗犬)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곳은 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