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제천의병에서 전군장으로 활약한 안승우[1865~1896]선생을 2016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선생은 경기도 양평 출신으로 유학자 가문에서 태어나 화서학파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생은 1896년 일제의 국권 침탈이 본격화되던 망국적 위기상황에서 강원도 원주에서 거의를 선포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 사진 한장도 없이 의병활동으로 순국한 안승우 선생은 6월의 독립운동가이지만 얼굴 사진이 없어 그림으로 대신하는 것이 안타깝다 이후 제천으로 옮겨 이필희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선생은 군중 사무를 총괄하는 군무도유사(軍務都有司)의 직책을 맡았다. 이때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을 발포하여 전 국민에게 의병에 대한 지지와 응원을 호소하였다. 제천의병은 단양으로 진군하여 관군과 전투를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1896년 2월 화서학파의 종장인 의암 유인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의병 연합전선을 구축하였다. 선생은 전군장을 맡아 의병의 선봉을 이끌었다. 제천의병은 관군과 일본군이 다수 집결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보자기는 예로부터 물건을 싸거나 예쁘게 보이기 위해 장식품으로 쓰던 물건이다. 특히 보내는 이의 마음을 담아 선물을 싸던 것이기도 했다. 일본의 보자기 역시 쓰임 면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보자기를 현대적 감각으로 작품화한 전시회가 인천관동갤러리에서 오는 6월 5일까지 열린다. 모시와 같은 질박하면서도 정감 가는 한국 소재에 기법 역시 한국적인 바탕에 일본 감각을 가미하여 나무의 거친 이미지를 천으로 표현한 보자기 작품들이다. 나무로 된 일본식주택인 갤러리와는 환상적인 궁합으로 관객들에게 다가갈 전시회는 미야자키 테루요(宮崎晃代)의 작품으로 마련한 전시회다. 미야자키 테루요는 아동복 디자이너를 거쳐 보자기를 독학으로 배우며 작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2004년 서울 인사동에서의 한일 보자기 교류전을 시작으로, 도쿄와 서울 등에서 여러 차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무더운 여름에 에어컨이나 선풍기가 있지만 부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더위 쫓는 도구이다.일본의 부채에는 센스(扇子)와 우치와(團扇)의 두 종류가 있는데 형태상으로 보면 센스는 쥘부채 모습이고 우치와는 접이식이 아닌 둥근부채라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이런 모양새의 차이도 있지만 그 쓰임새에도 과거에 보면 구별이 있었다. 보통 우치와(團扇)는 승려나 문인, 은둔자들이 썼고 센스(扇子)는 귀족이나 고급 관리들을 중심으로 썼다. 센스가 의례용(儀禮用)으로 쓰였다면 우치와는 신분 구별이 없이 쓰던 부채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과거의 이야기일 뿐 요즈음 사람들은 거의 구분 없이 쓴다. 아무래도 센스(쥘부채)의 경우는 여성들이 선호하는 부채라고 할 수 있다. 접이식이라 부피도 많이 차지하지 않아 핸드백에 넣어 다니기도 편하고 비단이나 헝겊으로 멋을 부린 고급 부채도 제법 많이 나와 있어 여성들에게 선물용으로도 인기 만점이다. 관광객들도 센스(쥘부채)를 좋아해서인지 교토의 청수사(기요미즈데라) 앞 기념품 거리 등 관광지에는 거의 센스(쥘부채)만 눈에 띌 정도이다. ▲ 우치와(왼쪽), 센스(쥘부채)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나철 선생은 1863년 12월 2일 전남 낙안현 남상면 금곡리(현 보성군 벌교읍 금곡리)에서 부친 나용집(羅龍集)과 모친 송씨(宋氏) 사이에서 3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두영(斗永)이었으나 인영(寅永)으로 개명하였다가 대종교 창교후 철(喆)로 바꾸었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워 29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 권지부정자직(權知副正字職) 등을 거쳐 1905년 징세서장(徵稅署長)으로 재직중 러일전쟁(露日戰爭)에서 이긴 일제의 침략야욕이 내정간섭으로 나타나자 러일전쟁(露日戰爭)에서 이긴 일제의 침략야욕이 내정간섭으로 나타나자 1905년 5월 일제하 부패관리의 실상을 좌시할 수 없다며 관직을 사임하였다. 비밀결사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고 구국(救國)을 위하여 동경(東京)에서 단식투쟁 그 뒤 강진 출신 오기호, 부안출신 이기(李沂) 지사 등을 중심으로 비밀결사인 유신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그해 미국 루우즈벨트 대통령의 주선에 의하여 러일전쟁이 종식되고 포오츠머츠에서 강화회의를 열게 되자 이 회의에서 우리 나라 장래에 대한 중대문제가 다루어지리라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비구니 법명(法明)은 백제 사람이다. 제명왕(齊明天皇) 2년(656)에 대신 가마타리(鎌子)가 병을 앓았는데 온갖 처방에도 낫지 않았다. 이에 법명이 아뢰길, 유마힐경은 아주 좋은 경전이니 이를 독송해보는 게 좋겠다고 하자 왕이 허락하여 독송하였는데 채 독송이 끝나기도 전에 병이 나았다. 왕과 신하들이 아주 기뻐하였다. 찬하여 이르길, 중국에는 도형이라는 비구니가 있어서 유마경을 강설하면 듣는 이들이 구름처럼 모였다고 한다. 법명이 한 번 더 독송하자 다 읽기도 전에 고질병이 다 나았으니 그 효험이 어찌 도형보다 못하겠는가? 그로부터 담해공(淡海公)은 흥복사에서 유마회를 열었고 백제 비구니의 발자취는 참으로 아름답다. 이는 14세기 일본의 불교책인 《원형석서(元亨釋書)》에 나오는 백제 비구니 법명의 이야기다. 법명은 조정의 권력자인 가마타리의 병을 유마경으로 씻은 듯이 낫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인물이다. 그런가 하면 백제의 법명에 버금가는 비구니가 있는데 그 이름은 이원(理願)이다. 이원은 714년 11월 11일 김원정(金元靜)등의 신라 사신 20명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불법(佛法)을 널리 전하다가 귀국하지 않은 채 일본에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윤세주(1901. 6. 24~1942. 6. 3) 선생은 1901년 6월 24일 경남 밀양군 부북면 감천리에서 부친 윤희규(尹熺奎) 선생과 모친 김경이(金卿伊)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겸손했으나 일본 식민지 통치에 대해서는 온 생애를 통해 저주할 만큼 애국심이 깊었다. 열사는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하기도 하고 국민학교 때 일 왕(日王) 출생 기념일에 받은 일장기를 화장실에 버릴 만큼 일본을 증오했다. 선생은 경남 밀양의 사립 동화(同和) 중학에 입학하면서 항일 인사였던 김홍표(金鴻杓) 교장의 영향으로 항일정신을 키워갔다. 선생은 김교장의 애국사상에 감화되어 학교 내 비밀결사인 연무단(練武團)을 조직했다. 연무단은 당시 금지됐던 개천절 기념행사를 갖고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동화중학은 폐쇄됐다. 그러나 선생의 가슴에 반일, 배일 사상은 영원히 남게 되었다. 서울 만세운동(萬歲運動) 참가 후 고향으로 내려가 독립선언서 낭독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한 그는 만세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고향에 내려가 동지들을 규합했다. 13일 하오 1시쯤 수천 명이 모인 고향 장터에서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동지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쌀을 담기 위해 만든 대형 뒤주이다. 보통의 뒤주가 통나무나 널빤지를 짜서 궤짝의 형태로 만드는데 비해, 이 뒤주는 크고 외형도 독특하다. 크기는 너비 2.1m, 높이 1.8m로, 널빤지를 짜 맞추어 벽체를 구성하고 볏짚으로 지붕처럼 뚜껑을 만들어 씌웠다. 이 고장 출신인 정준섭은 당시의 큰 부자로, 이 집을 찾는 사람들이 매일 수백 명에 이르자 작은 궤짝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결국 안마당에 이러한 초대형 쌀뒤주를 만들었다고 한다. 조선 고종초에 제작된 이 뒤주는 70가마 정도의 분량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크고 독특한 건조물로서, 집을 찾는 사람들을 소홀하게 대접하지 않았던 당시의 훈훈한 인심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민속자료이다. 자료:문화재청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가모신사유래기》교토의 3대 마츠리라고 하면 5월 15일 아오이마츠리, 7월17일 기온마츠리, 10월 22일 지다이마츠리를 꼽는다. 초록이 눈부신 5월 15일의 아오이마츠리(葵祭)는 고대 한반도와 관련이 있는 하타씨 일족과 관계가 깊은 가모씨(賀茂氏)와 조정(朝廷)의 행사로 당시 이를 보러 오는 사람들의 주류는 귀족들이라 귀족 마츠리라고도 불렸으며 한편으로는 가모신사의 마츠리라해서 가모마츠리(賀茂祭)로도 불렀다. 《가모신사유래기》에 기록된 아오이마츠리 유래를 보면 6세기 무렵 긴메이왕 시절에 일본 전역에 풍수해가 심각하여 점쟁이에게 점을 쳐보니 가모대신(賀茂大神)이 노한 것으로 나왔다. 점괘가 나오면 해결 방법도 나오는 법으로 점쟁이인 우라베(卜部伊吉若日子)의 해결 방법은 튼실한 말을 골라 방울을 잔뜩 달고 기수는 얼굴에 동물 가면을 쓰고 가모신사 주변을 돌면서 성대한 제사(마츠리)의식을 행하면 풍수해를 잠재울 수 있다고 해서 시작되었다. ▲ 교토 아오이마츠리의 이모저모 일본의 마츠리는 대부분이 고대에 기원을 둔 것으로 풍수재해 예방, 전염병 확산 금지, 국태민안, 풍년 등의 기원을 담고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너의 아버지, 북한에 여러 번 밀파된 것 아냐? 내 선친 남파 김정수 공과 같이 마지막 임시정부 경교장에서 비서를 하시던 오악환 선생께서 나에게 물었다. 너의 아버지, 경교장에 있을 때 김구 선생이 북한에 여러 번 염탐을 보낸 것을 모르고 있단 말이냐? 나는 고개를 떨구고 대답했다. 네 내 선친께서 비밀로 해 오던 것을 친구이시며 황해도 고향 아저씨께서 토로해서 알았다. 내 선친이 자식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을 것 같아서 일부러 꺼내신 것이다. 선친은 내가 경교장에 있을 때 김구 선생과 늘 겸상을 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내 뿌리에 의심이 갈 때마다 선친께 단도직입적으로 묻곤 했다. 그 때마다 내 선친은 단답형으로 대답하셨다. 김구 선생의 심부름으로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안중근 의사 댁을 들렀다가 왔다. 간결했다. 내가 어렸을 때 선친께서 경찰서에 구류를 당했고 또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음력 10월 28일 큰 아버지 김영수 공 생신 때 꼭 잔치를 여셨는데 내 선친을 세 번 살려주신 음덕에 대한 보답이었다. 북한에 염탐을 가서도 죽을 고비가 있으셨는가 보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천평(天平, 729-749) 조각의 작가는 대개가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러나 큰 절에는 반드시 뛰어난 조각가 또는 조각가군(群)이 있었다고 본다. 그것을 담당한 사람들은 어쩜 승려였을지도 모른다. 삼월당(三月堂)의 양변(良弁, 689-774)이 뛰어난 조각가였다는 전설 등은 배척하기 어려울 것이다. 삼월당의 건축이라 함은 당내의 조각을 말하며 양변과 관련 있는 것은 대부분이 일류 걸작품이다. 이는 적어도 양변이 뛰어난 예술가이거나 아니면 매우 뛰어난 예술가를 곁에 두었다는 증거이다. 만일 그 양변상(良弁像)이 자작품이라면 양변은 초일류 조각가이다. 하지만 아니라 해도 그의 곁에 있는 조각가 또는 그 제자가 조각을 했다면 양변은 천하제일의 조각가를 양성한 셈이 된다. 이 글은 사찰순례기의 바이블이라는 《고사순례(古寺巡禮)》를 쓴 일본의 철학자이자 문화사가인 와츠지데츠로(和辻哲郎, 1889~1960)가 쓴 백제스님 양변에 관한 글이다. 나라(奈良) 동대사의 첫 주지였던 백제스님 양변이 조각가였을 것이라는 주장은 어쩌면 생소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 어린 양변을 독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