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만주에서 일제 군경과 밀정을 처단하기 위해 맹렬히 활동한 대한군정서 소속 독립군 문창학 선생(1882-1923.12.20.,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2016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함경북도 온성 출신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교통총장을 지낸 문창범 선생의 사촌동생이다. 선생은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뒤, 간도로 망명하여 대한군정서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1월 2일 대한군정서 대원들과 함께 웅기항의 일제 기관을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일제 군경의 경계가 심하여 함경북도 경원군 소재 신건원주재소로 공격목표를 바꾸었다. 중국 화룡현을 떠난 대원들은 두만강을 건너 1월 5일 새벽에 신건원주재소에 도착하였다. 주재소를 급습하여 일제 순사를 사살하고 폭탄을 투척하여 일경 숙소를 파괴하였으며, 일제 군경과 교전 후 복귀하였다. 이후 만주 훈춘 등지에서 일제 군경 공격과 밀정처단 등의 활동을 계속하다 1922년 12월 13명의 독립군과 함께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청진으로 압송되었다. 선생은 1923년 5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보자기는 예로부터 물건을 싸거나 예쁘게 보이기 위해 장식품으로 쓰던 물건이다. 일본의 보자기 역시 용도면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보자기를 현대적 감각으로 작품화한 전시회가 인천관동갤러리에서 4월 29일부터열린다. 모시와 같은 질박하면서도 정감가는 한국 소재에 기법 역시한국적인 바탕에일본 감각을 가미하여 나무의 거친 이미지를 천으로 표현한 보자기 작품들이다.나무로 된 일본식주택인갤러리와는 환상적인 궁합으로 관객들에게 다가갈 이번 전시회는 미야자키 테루요(宮崎晃代)가 마련한 전시회다. 미야자키 테루요는 일본 미야자키 현 출신으로 아동복 디자이너를 거쳐 보자기를 독학으로 배우며 작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2004년 [한일 보자기 교류전] (인사동) 출품 이후, 도쿄와 서울 등에서 여러 차례 개인전을 가졌다. 한국의 모시를 중심으로 아시아 각국의 천을 이어 만든 독특한 보자기가 매력적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금당은 동쪽 입구로부터 들어가게 되어 있다. 우리는 그곳(벽화)으로 가기 위해 먼저 본존 앞에서 왼쪽으로 꺾었다. 약사삼존불 앞에 왔을 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서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일렬로 나란히 줄지어져 있는 오래된 불상과 검은 기둥 사이의 서쪽 벽에 아미타불이 밝은 모습으로 합장한 손의 모습까지 확실히 보이는 것이었다. 동쪽 입구에서 조금 먼 거리에 있는 아미타불이 이렇게 확실히 보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이 정도의 거리를 두고 바라다본 벽화의 조각적인 아름다움이 선명하게 눈에 새겨지는 것 또한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벽화에 이르는 길목의 본존불과 좌우 조각에는 눈도 주지 않고 우리는 아미타불쪽으로 내달았다. 이 그림이야말로 동양회화의 절정이다. 꽤 박리된 부분이 있었지만 그 흰 박리(剝離)면조차 벽화의 신선한 생동감으로 느껴졌다. 이 벽화 앞에 서면 아무 생각을 할 수 없다. 아무것도 보태고 더할 것이 없다. 그저 바라다보고 취할 뿐이다. 이것은 금당벽화로 유명한 나라의 고찰 법륭사 금당(대웅전)에 화재가 나기 전 금당벽화를 본 일본의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와츠지데츠로(1889~1960)가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김학규(金學奎, 1900. 11. 24~1967. 9. 20 )선생은 1900년 11월 24일 평남 평원군 서해면 사산리에서 의사인 부친 김기섭(金基燮)의 4남 2녀 중 4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 호는 백파(白波)이다. 5세가 되던 해에 부친이 세상을 뜨게 되자 가세가 기울어 가난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어린 시절을 고향에서 보내다 1910년 일제의 무력과 강압에 의해 국권이 침탈당하고 온갖 만행을 자행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자 선생은 국외로 망명하여 구국항쟁에 나설 것을 결심하고 이갑 선생 등을 따라 만주로 건너갔다. 1911년 12월 엄동설한에 압록강을 건너 만주 통화현 이밀(二密)이라는 황무지 산골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도끼와 호미로 산지를 개간하고 옥수수와 콩을 심어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주경야독에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선생의 온면한 생활로 말미암아 가정형편이 점차 나아졌다 한다. 그 당시 통화현의 고산지역에는 일찍부터 이시영, 이회영, 이상룡 등 많은 애국지사들이 들어와 독립군 기지건설에 노력하고 있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 아래 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뜻하지 않은 지진으로 지금 큐슈지방의 구마모토는 불안의 연속이다. 그걸 반영하듯 뉴스에선 시시각각으로 작은 여진이라도 보도하느라 바쁘다. 하루빨리 여진이 멈춰 불안에 떠는 주민들이 지진복구에 힘쓰길 빌어본다. 구마모토(熊本)라고 하면 일본의 3대성으로 꼽히는 구마모토성(熊本城)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이밖에 나고야성(名古屋城), 오사카성(大阪城)을 합쳐 3대성이라고 할 만큼 구마모토는 성곽도시다. 성곽도시는 성주들이 각각 있게 마련이다. 각 성주들은 성곽 안에서 만큼은 왕과 같은 존재이다. ▲ 아름다운 구마모토성(熊本城)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시대부터 왕권이 아니라 장수들이 각 성을 중심으로 권력을 서로 쥐고자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조선이 중앙집권체제였다면 일본은 일찍부터 지방분권제가 발달한 셈이다. 성주들은 서로의 성을 지키고자 전쟁을 일삼았으며 빼앗았는가 하면 빼앗기는 일이 반복되기를 무신정권 내내 근 700여 년간 크고 작은 전쟁 속에 살아야 했다. 풍신수길의 오사카성이 철통같이 방어 된 것 같아도 결국은 덕천가강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에도성에 그 명성을 넘겨주지 않았는가 말이다.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아! 사월십구일 붉은 꽃 몽우리 무덤가를 다 덮어도 그날 아들딸 흘린 피 다 말하지 못해 무상한 정권에 눈멀고 귀먹은 이들이 저지른 죄악 언제나 우리의 아들딸이 지켜낸 것 하늘은 알지 다시는 더러운 욕심으로 금쪽같은 내 새끼 내몰지 말라고 마른하늘에 벼락도 치는 법이니 위정자는 들으라 불의로 정의를 매도하지 말길! - 이한꽃 '아,사월십구일'- ▲ 수유리 4.19 무덤가에는 붉은 영산홍이 그날의 처참함을 말해주고 있다. 419 민주혁명, 419 학생운동, 419 의거, 4월 의거, 4월 혁명, 미완의 혁명 등으로 불리는 4.19 혁명은 문민정부 때부터 혁명으로 승격되었다. 오늘은 56년전 학생과 시민들이 이승만 정권의 불의에 목숨을 걸고 항거한 날이다. 4월 11일 마산에서 김주열 학생 시신이 발견된 게 도화선이 됐죠. 서울 지역 총학생회 간에 물밑 논의를 통해 19일 오전 9시 일제히 경무대와 중앙청 앞에 집결하는 것으로 행동 지침을 정했습니다. 서울 서부지역에선 홍익대와 연세대가 시위를 주도했죠. 경무대 앞엔 대학생만 2만여 명을 헤아릴 만큼 엄청난 군중이 몰렸습니다. 여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신팔균(申八均, 1882. 5. 19(음)~1924. 7. 2) 장군은 1882년 5월 19일(음) 서울 정동 현재의 영국 대사관 자리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신석희(申奭熙)는 병마절도사, 포도대장 등을 거쳐 한성부판윤, 내부협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조부 신헌(申櫶)은 삼도수군통제사, 병조판서 등을, 고조부 신홍주(申鴻周)는 순조(純祖)때 훈련대장을 지냈다. 특히 조부는 전권대관(全權大官)이 되어 1876년 강화도에서 일본측 전권변리대신(全權辨理大臣) 흑전청륭(黑田淸隆)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체결하고 1882년에는 미국의 r. w 휴페펠트와 조미수호조약(朝美修好條約)을 체결하여 조선의 최초 개항에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던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명문가(名門家)에서 출생한 장군은 천성적으로 무관(武官)의 기질이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유학(儒學)과 고금병서(古今兵書)에 능통하였고 성품이 청렴(淸廉) 강직한데다가 문장 또한 비범하여 칭송이 자자하였다. 1900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육군 무관학교 보병과에 입교하여 군사교육훈련을 받은 후 1903년 9월 육군 참위(參尉)로 임관하여 시위연대 제3대대에서 복무하였다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에서 27년간 독립운동을 해왔습니다. 독립운동의 가장 큰 의미는 대한민족이 불요불굴의 정신과 일본 제국주의에 결코 투항하지 않겠다는 정신을 보여준 것입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해외 중국에서 하루라도 존재할 수 있었고 분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일본이 시종 한국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하지요. 위는 대만국립정치대학 후춘혜 교수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의의에 대해 말한 것이다. 그렇다. 대한민국은 일제에 강제로 나라를 강탈당하고 앉아서 한숨만 쉬고 있지 않았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나라안팎에서 불굴의 투지로 일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했으며 1919년 4월 13일(원래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한 정확한 날은 11일이다)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구성하여 광복의 그날 까지 고군분투했던 것이다. 무겁도다 국민의 혼이여/ 굳세도다 국민의 혼이여! 국민의 혼이 살아있으면 된다. 나라가 외세에 눌리면 산하는 유린될 수 있으나 그 국민의 혼은 감히 움직이지 못한다. 국민의 혼이 어찌 무겁지 않으며 어찌 굳세지 않으랴. 자극을 받아 격동함이 심할수록 더욱 국민의 혼은 크나큰 힘으로 자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듣기에 따라서는 조금은 거부감이 일 듯한 말이지만 지금 일본에서는 유체(遺體)호텔이 슬슬 궤도에 오르고 있다. 매장을 하는 천황가를 빼놓고는 거의 일본인들은 화장을 하는데 죽어가는 사람 수에 견주어 화장장이 턱없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다. 고인의 장례를 원하는 시간에 치루기 위해서는 며칠이고 대기해야하는데 요즈음 1주일 이상 화장을 기다려야하는 경우도 있다고 장의회사 아반휴네스는 말한다. 일본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일본인은 1년에 130만 명이 사망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른바 단괴시대(團塊世代, 1947~49년의 베이비붐시대에 태어난 사람들) 사람들이 80살이 되는 2030년에 이르면 해마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160만 명에 이르러 화장장 부족은 가속화될 전망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를 일본에서는 다사사회(多死社會)라고 하는데 세계 최고령사회에다가 다사사회로 진입하여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걱정이 태산이다. 다사사회의 큰 걱정으로는 바로 화장장 부족을 들 수 있다. 도쿄 복지보건국에 따르면 도쿄도의 사망자 수만 약 11만 명인데 화장장은 26개소로 이들을 제때에 화장처리 하기위해서는 현재 상태에서 1주일 정도를 기다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석농(石農) 오영선(吳永善,1886~1939 ) 선생은 경기도 고양 출신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 선생의 사위이다. 어려서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며 국제정세에 눈을 떴으며,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07년 8월 일제의 군대 강제 해산으로 대한제국 장교의 꿈을 접어야 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배일사상이 문제가 되어 퇴학 처분을 받았다. 고국으로 돌아 온 선생은 1909년 이동휘의 초청을 받아 캐나다 그리어슨 선교사가 함북 성진군에 세운 협신중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면서 소위 이동휘의 교육생이 되었다. 일제의 강제 병합 이후 북간도로 옮긴 오영선은 간민교육회가 1911년 3월 연길현 국자가에 세운 광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1914년 2월에는 간민회 의원에 선출되어 간도 한인의 권익 옹호에 적극 나섰다. ▲ 오영선 독립지사 오영선은 1914년 독립군 장교 양성을 목적으로 이동휘가 길림성 나자구에 세운 대전학교의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대전학교가 폐쇄되자 1917년 1월 이동휘와 훈춘의 대황구로 옮겨 북일중학교를 설립, 교사로 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