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완연한 봄기운이 도는 요즈음 서울 여의도는 벚꽃잔치(놀이)를 한다고 법석이다. 국회의사당을 둘러싼 윤중로 주변은 흐드러진 벚꽃을 배경삼아 사진 삼매경에 빠진 사람들로 북적인다. 여의도뿐만이 아니다. 전국 곳곳에서 비슷한 벚꽃잔치가 한창이다. 마치 일본 같다. 벚꽃잔치라고 하면 일본의 하나미(花見)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나라꽃인 벚꽃을 일본말로는 사쿠라라고 하는데 이상한 것은 벚꽃잔치를 ‘사쿠라마츠리’라 하지 않고 ‘하나미’라고 부르는 점이다. 하나미(花見)를 직역하면 ‘꽃을 본다’라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달맞이도 ‘츠키미(月見)’라고 하는데 직역하면 ‘달을 본다’라는 뜻이다. ‘꽃놀이’, ‘달맞이’와 같은 우리말과 견주면 좀 맹숭맹숭한 느낌이지만 어쨌거나 벚꽃잔치는 원래 우리의 오랜 습관은 아니다. ▲ 벚꽃잔치인 하나미[花見] 특집을 알리는 광고 일본인들의 꽃놀이 풍습은 나라시대(710-794)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귀족들의 꽃놀이 행사였는데 당시에는 주로 매화꽃놀이였다. 그러던 것이 헤이안시대(794-1192)로 들어서면 서서히 벚꽃으로 바뀐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먼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우리 후손을 위해 풍찬노숙(風餐露宿) 독립 투쟁을 하시다가, 기어히 중국 하얼빈 역에서 민족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시고 조국 대한민국에 신명을 바치신 의사님 영정앞에 깊은 존경과 사모의 마음을 올립니다. 저는 월간 저널 [영웅] 발행인 박창재입니다. 지난 3월 26일은 의사께서 순국하신지 꼭 106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저는 오늘 이 편지를 의사님께 올리면서,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대한제국 국권 침탈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두에서 처단하시고,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시면서 남기신 의사님의 최후의 유묵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에 대하여 그 뜻을 다시 한 번 깊이 새기어 보려합니다. 작년, 2015년 여름의 막바지는 한반도 전역을 뒤흔드는 천둥과 폭우가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온 국민이 숨죽여야 했습니다. 이 천둥과 폭우는 다름 아닌 북측이 설치한 비무장지대 지뢰 폭발로 우리 측 군인 2명이 부상을 입으며 시작된 남북간 긴박했던 대치상황을 말합니다. 다행히 양측 고위급 접촉을 통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의 상징 후지산은 일본인들에게 사랑 받는 산이다. 사계절 그 모습이 아름답지만 아무래도 꽃피는 봄의 후지산은 그야말로 한폭의 그림에 견줄만하다. 후지산의 모습은 하루에도 여러 번 그 모습이 바뀌는 곳으로관광버스로 후지산(중턱까지 버스가 올라감)을 올라가다 보면 실감한다. 산길을 굽이굽이 타고 올라가다 눈앞에 올려다보이던 후지산이 갑자기 구름 속으로 숨어 버린다. 그러다가 나타나는 후지산은 세 번 가서 한번 그 모습을 보면 다행 이라고 할 정도로 정상에 이르도록 일기가 불순하다. 그것은 마치 백두산 정상에서 천지 모습을 선명하게 보는 운과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 벚꽃이 핀 후지5호(湖)에서 바라다 본 후지산 ▲ 오와쿠다니에서 바라다본 후지산, 로프웨이 안에서도 선명히 보인다 후지산 아래에는 후지5호(후지고코, 富士五湖)라고 해서 5개의 호수가 후지산을 아름답게 받쳐주고 있다. 후지5호는 에도시대(江戶時代)에는 후지8해(富士八海)로 불렸으며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이 일반인들이 쉽게 관광버스를 타고 중턱까지 갈 수 있는 길이 없었지만 지금은 1,500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봄 햇살 가득한 어제(26일) 경기도 화성에서는 발안 31 독립만세항쟁의 선구자이신 탄운 이정근(灘雲, 李正根1863-1919) 의사 순국 97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마침 이날은 안중근 의사 순국 106주기 날이기도 하다. 활짝핀 산수유 꽃이 아름다운 향남읍 삼천병마로 283-6번지에 자리한 탄운 선생 창의탑에서 11시에 거행된 선생의 추모제에는 광복회 경기도 지부장(염낙원)을 비롯한 탄운이정근기념사업회(회장 김겸) 회원, 탄운장학금 수여자와 학부모, 지역 유지 등 100여명이 모여 탄운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겼다. ▲ 탄운 이정근의사 순국 97주기 추모제 모습 1 ▲ 탄운 이정근의사 순국 97주기 추모제 모습 2 탄운 이정근 의사는 17세에 사서오경을 섭렵할 정도로 학문이 깊었으며 33세 때는 대한제국 궁내부 주사직에 임명되었으나 선생은 치욕적인 을사늑약을 지켜보면서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팔탄, 우정, 장안, 정남, 봉담, 남양 등 7개 면을 중심으로 인재육성에 들어갔다. 당시 탄운 선생은 왜왕 3년(倭王) 이라는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연길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달렸다. 열차 안 중국인들은 해바라기 씨를 씹으며 무료함을 달랬지만 조선인 피를 받은 기자는 하얼빈이라는 세 글자가 찍힌 차표를 손에 쥐고 열 두 시간 내내 가슴이 아렸다. 이 길을 안 의사님도 열차로 달렸으리란 생각에 잠시라도 눈을 붙일 수 없었다. 조국이 무엇이기에,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던진단 말인가! 2년 전 기자는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끝 모를 대륙의 열차 안에서 그렇게 안 의사의 삶을 되새겨 보고 있었다. ▲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역에 있는 안중근의사 기념관 전시실 안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30분 역사 1번 플랫폼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했다. 지금도 하얼빈 역에는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토를 처단한 자리가 표시되어 있다. 거사 이후 안 의사는 곧바로 체포되어 뤼순감옥으로 떠나는 11월 1일까지 하얼빈에서 11일간 머물렀다. ▲ 안중근의사 기념관 안쪽 유리창에서 바라다 보이는 이토히로부미 처단 현장, 열차 앞 부분 바닥에 표시가 되어 있다. 2014년 준공한 하얼빈역사에 있는 안중근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혜관스님은 고구려 사람이다. 수나라에 들어가서 가상대사 길장에게서 삼론의 요지를 배워 스이코 33년(625) 을유년 봄 정월에 고구려에서 일본에 왔다. 칙명으로 원흥사에 주석하였다. 그해 여름 크게 가물었다. 임금께서 혜관에게 조칙을 내려 비를 빌게 하였다. 혜관이 푸른 옷을 입고 삼론을 강설하니 곧바로 비가 내렸다. 왕께서는 매우 기뻐하시며 그를 발탁하여 승정으로 삼으셨다. 그 뒤 가와치의 정상사(井上寺)에서 삼론종을 널리 폈다. 도녕스님은 백제 사람이다. 하쿠호(684) 가을 8월 천하에 큰 가뭄이 들었다. 도녕에게 명을 내려 불법으로 비가 내리게 하였다. 효과가 있어서 큰비가 쏟아져 내렸다. 왕이 후하게 상을 내렸다 이는 14세기 일본의 승려 코칸시렌이 지은 불교통사 《원형석서, 겐코샤쿠쇼》에 나오는 기록이다. 지금은 멸망한 나라의 스님들이지만 일본의 사서에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인물로 남아 있다. 백제 성명왕이 서기 552년(538년 설도 있음)에 불교를 전해준 곳을 아스카땅이다. 이어 인접해있는 지역 나라(奈良)로 왕실이 천도하게 되면서 동대사를 비롯한 수많은 절들이 생겨나게 되는데 초기의 절 건축과, 불상, 불탑, 경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존경하는 신명균 선생님, 저는 선생님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고 가슴이 먹먹합니다. 일제의 멸망을 보기 전에 돌아가시다니, 너무도 가슴이 아픕니다. 선생님이 지킨 우리 말글은 광복 71주년이 되는 올해에도 당당히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민족 문화의 상징인 성과 이름을 말살한 일제에 맞서 순국한 선생님의 노선을 계승하여, 현재 우리 민족은 우리의 성과 이름을 당당히 쓰고 있고, 한자와 한자말이 아닌 순우리말과 한글로 지은 이름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저는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조선어학회 사건 예심 판결문을 통해 선생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판결문에 선생님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였습니다. 이극로, 최현배, 이윤재, 신명균 선생이 중심이 되어 조선어학회의 사업을 추진하였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추적하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결과를 얻어내었습니다. ▲ 신명균 선생의 모습(1927년 보성전문학교 졸업앨범) 신명균 선생님은 주시경의 직계제자로 우리말과 글을 수호하는 국어학자로서, 독도(뚝섬)공립보통학교와 동덕여고보에서 교육에 종사한 교육자로서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백정기(白貞基, 1896. 1. 19(음)~1934. 6. 5) 의사(義士)는 1896년 1월 19일(음) 전북 정읍군 영원면 은선리 농가(農家)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구파(鷗波), 자(字)는 용선(溶善)이며, 수원 백씨(水原白氏)이다. 어릴 때 엄친(嚴親)을 여의고 편모(偏母) 슬하에서 성장하는 등 어려운 가정환경과는 달리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고 활달하며 글읽기를 좋아하여 낮에는 농사일을 돕고 밤에는 독학(獨學)으로 공부를 하였으며 의리가 강하였다.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어린 소년의 가슴에 항일의식이 싹트다 의사(義士)가 15세가 되던 1910년에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게 되자 어린 소년의 가슴에는 울분과 굴욕감을 가져 나라를 구하겠다는 구국일념(救國一念)이 싹트고 있었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항일의식은 이미 10대 소년시절부터 민족의 앞날을 염려하며 일제를 타도하는 일에 신명(身命)을 바칠 것을 결심하게 하였다. 시대적 갈등과 마찰 속에서 스스로 고민에 빠지곤 했던 의사는 애국의 길이 무엇인가를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정읍(井邑)같은 시골에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서울에는 사람도 있고 문화도 있고 기댈 곳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지난 며칠간 인공지능의 바둑 프로그램인 알파고와 인간 최고의 바둑 고수인 이세돌 9단과의 격돌을 놓고 온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결국은 이세돌 9단이 4대 1로 졌지만 이에 대한 평가는 다채로운 것 같다. 애초부터 인간과는 게임이 안되는 대국이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또 한편으로는 인공지능의 컴퓨터에 대한 우려의 소리도 들렸다. 모두 나름대로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이세돌 9단의 침착한 대국 모습이 인상으로 남는다. 특히 그가 한 말 가운데 나는 최대한 바둑을 즐겼다라는 말은 바둑의 철학이 깔린 말 같아 인상 깊게 들렸다. 기자는 바둑의 세계를 잘 모르지만 이번 세기의 바둑 잔치를 보면서 무엇엔가 몰입하여 승패를 초월한 도전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런데 왜 하필 구글에서 개발한 인공지능 바둑프로그램이 알파고였을까 궁금하다. 다음국어사전에는 발 빠르게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알파고: 구글 딥마인드(DeepMind)가 개발한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이다. 알파고(AlphaGo)의 고(Go)는 바둑을 뜻한다. 딥마인드는 구글이 2014년 인수한 인공지능 관련 기업으로 201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 나라의 역사 깊은 큰 절 동대사(東大寺, 도다이지)를 세운 스님은 백제스님 양변(良弁, 로벤)이다. 양변스님을 흔히 매가 키운 스님이라는 별명이 붙어있는데 이에 대한 스님의 재미난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오우미국(近江國) 백제씨(百濟氏) 출신인 스님이 어렸을 때 일이다. 양변스님 어머니는 뽕 밭일을 하기 위해 어린 아들을 데리고 밭으로 나갔다. 아들을 뽕밭 한켠에 두고 뽕잎을 열심히 따고 있는데 어디선가 커다란 매 한 마리가 머리 위를 빙빙 돌더니 어린 아들을 물고 가는 것이 아닌가! 놀란 나머지 하늘 높이 날아가는 매를 넋 놓고 쫓아갔지만 허사였다. 어린 아들을 물고 간 매는 동대사 이월당 삼나무에 걸어놓고 가버렸다. 한편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 나온 사람은 당시 승려의 최고 직책을 맡고 있던 았던 백제계의 의연(義淵)승정이었다. 그때부터 양변스님은 의연승정의 제자가 되어 수행을 쌓은 뒤 동대사 건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는 마침내 초대 주지 직에 오른다. 이러한 이야기는 일본 최초의 불교통사인 《원형석서》를 비롯한 《곤쟈쿠이야기》 등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 어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