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하여튼 철저히 나라일 밖에 모르는 분이셨어요. 한번은 중경에서 큰아들이 결핵에 걸렸는데 마이신이 아주 비쌌을 때였지요. 중경은 1년에 안개가 4~5개월이나 껴서 햇볕이 아주 귀하여 결핵환자에게는 안 좋은 환경이지요. 거기다가 중일전쟁 상황이라 영양상태도 나빠서 더욱 치료가 어려웠을 때인데 큰아들에게 마이신 주사 한 대도 못 맞히고 결국 결핵으로 죽게 됩니다. 그때 백범 선생은 임시정부 살림을 맡아 독립자금을 쥐고 계셨지만 그 돈을 아들의 마이신 주사 한 대도 쓸 수 없다고 하실 만큼 공과 사의 선을 분명하게 긋던 분입니다. 이 말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마지막 청사 경교장, 2015, 서울시》에서 김구 주석에 대한 기억을 말해 달라는 질문에 대한 김자동 회장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의 답이다. 김자동 회장은 어린 시절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함께 자란 산증인으로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 동농 김가진 (1846~1922)이다. 동농 선생은 대한제국 시기에 중추원 의장을 지낸 분으로 1919년 항일 비밀결사인 조선민족대동단을 조직해 활동하다가 10월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분이다. ▲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딸 가진 엄마들의 소원은 무엇일까? 전통사회에서는 곱게 키워 출가 시키는 것이겠지만 현대 사회는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활발한 만큼 딸에게 거는 기대와 소원도 다를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도 변치 않는 것은 딸아이의 건강과 올바른 성장'임은 틀림없다. 일본에서는 딸아이가 태어나면 할머니들이 건강하고 예쁘게 크라는 뜻에서 히나 인형을 선물하는 것이 보통이다. 예부터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이 풍습을 히나마츠리(ひな祭り) 라고 한다. 히나마츠리는 혹시 모를 미래에 딸에게 닥칠 나쁜 액운을 덜기 위해 시작한 인형 장식 풍습인데 이때 쓰는 인형이 히나인형(ひな人形)이다. 히나마츠리를 다른 말로 모모노셋쿠(桃の節句) 곧 복숭아꽃 잔치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복숭아꽃이 필 무렵의 행사를 뜻하는 것으로 예전에는 히나마츠리를 음력 3월 3일에 치렀다. 히나인형은 원래 3월 3일 이전에 집안에 장식해 두었다가 3월 3일을 넘기지 않고 치우는 게 보통이다. 3월 3일이 지나서 인형을 치우면 딸이 시집을 늦게 간다는 말도 있어서 그런지 인형 장식은 이 날을 넘기지 않고 상자에 잘 포장했다가 이듬해 꺼내서 장식하는 집도 꽤 있다. 그러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아마 저의 지루한 수험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신의 시 한 구절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라는 구절과 같은 아름다운 말을 만들 수 있었던 까닭은 당신이 시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몇 년간 시험 하나를 목표로 하던 저는 계절마다 당신의 평전을 읽으며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갔고 당신의 시를 읽으며 어떤 생각을 지닌 분인지 깨닫고 싶어 했습니다. 2015년 여름, 오사카행 비행기를 탄 까닭의 하나는 시인의 시비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부산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남짓 날아 다시 기차를 타고 한 시간을 가면 도쿄 도시샤 대학이 나옵니다. 그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교의 교정 한쪽에는 당신을 기념하는 시비가 있습니다. 싱그러운 여름비가 연보랏빛 수국 위로 데굴데굴 떨어지던 날이었습니다. 도시샤 대학 근처에 다다르자 자신이 이 대학의 교수라며 길을 안내해주신 영국인 교수님을 따라 도시샤의 교정을 거닐며 당신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학교 수위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시인의 기념비를 물어보니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길을 안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만리창파에 한 몸 맡겨 원수의 배속에 앉았으니 뉘라 친할고. 기구한 세상 분분한 물정 蜀道(촉도)보다 험하고 泰(태)나라보다 무섭구나. 종적 감추어 바다에 뜬 나그네 그 아니 와신상담하던 사람 아니던가. 평생 뜻한 바 갈길 정하였으니 고향을 향하는 길 다시 묻지 않으리. (萬里飄然一粟 舟中皆敵有誰親 崎嶇世路難於蜀 忿憤輿情甚矣秦 今日潛踪浮海客 昔年嘗膽臥薪人 此行己決平生志 不向關門更問津) -김지섭 선생- 김지섭(金祉燮, 1884. 7. 21~1928. 2. 20) 선생은 1884년 7월 21일 경북 안동군 풍북면(豊北面) 오미동(五美洞)에서 풍산(豊山) 김씨(金氏)인 부친 김병규(金秉奎)와 모친 신천 강씨(信川康氏) 사이에 2남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5세에 인근 예천군 용문면 죽림동(竹林洞) 예천(醴泉) 권(權)씨 가문의 권석희(權錫禧)와 혼인하였다. 불의를 저지르는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대쪽 같은 성격이 남달리 강하였으며, 이러한 성품은 훗날 조국의 독립을 되찾고자 벌인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적인 뒷받침이 되었다. 선생은 일어를 배우기 시작한지 2개월 만에 습득하고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상주보통학교(尙州普通學校) 교원과 금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국 사회도 나이가 들고 병이 생기면 아들딸과 함께 살기 보다는 노인요양 시설로 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물론 여기에도 돈의 힘이 작용하게 마련이라 좀 더 안락하고 쾌적한 시설로 들어가려면 든든한 노후 자금이 필요하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꽤나 값나가는 시설에 들어갔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느냐하면 그렇지도 못하다는 게 문제다. 2월 16일 마이니치신문 보도에 따르면 도쿄 인근 가와사키시 사이와쿠(川崎市幸)에 있는 고급 유료 노인홈 S 아뮤 가와사키 사이와이쵸에서 잇단 노인 추락사를 일으킨 사람이 직원이었음이 밝혀지면서 일본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고 있다. ▲ 일본의 한 요양원 직원, 입원한 노인을 추락사시키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이름하여 입소자 연속 추락 살해 사건을 일으킨 사람은 다름 아닌 이곳에 근무했던 젊은 남자 직원으로 그는 새벽 시간을 틈타 베란다에 나와 있는 노인들을 밀어서 추락사 시켰던 것이다. 범인은 태연하게 추락사한 노인을 처음 발견한양 쇼를 부렸지만 결국 철창신세를 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범인은 노인학대도 서슴지 않았는데 비상시 누르게 되어 있는 빨간 버튼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1910년 2월 14일안중근의사가 중국 하얼빈에서 겨레의 원수 일본의 이등박문을 처단하여사형선고를 받은 날이다. 그런 2월 14일이 언제부터인가 젊은이들 사이에 쵸코렛을 주고 받는 날로 여겨지고 상술이 부추겨 대대적인 기념일처럼 술렁이고있다. 안중근 의사는 공판정에서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하여 적 이등박문을 죽였으니 이런 법정에서 신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하여 재판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또 재판장의 신문에 대하여 이등박문은 대한(大韓)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양국간의 조약과 서명을 무시하고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위협하여 독립을 빼앗으니 이것은 세계인의 적이요, 우리 겨레만대의 원수인즉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안의사가꼽은 이등박문의 15개조 국혼 말살 죄악을보자. 1.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한국의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3.을사보호5조약과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4.독립을 요구하는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정권을 강제로 빼앗아 통감정치 체제로 바꾼 죄 6.철도,광산,산림과 농지를 강제로 빼앗은 죄 7.일본이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여 한국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1919년 3ㆍ1만세운동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반드시 2ㆍ8동경독립선언을 이야기 한다. 엊그제 설날이 바로 97년 전 동경 YMCA에서 유학생들이 나라의 독립을 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적국 일본에서 만세운동을 펼친 날이지만 그만 설날에 묻혀버려 아무도 이 날을 기억하지 않아 씁쓸했다.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조선유학생들은 유학생 학우회 총회를 한다는 명목으로 4백여 명의 학생들이 재일본도쿄조선YMCA (현재의 재일본한국YMCA) 강당에 모였다. 동경 경시청에서도 이미 눈치를 채고 오전부터 수십 명의 정사복 경찰을 파견하여 삼엄한 감시를 했다. 그런 가운데 식은 진행되어 회장인 백남규의 개회선언, 최팔용의 조선청년 독립단의 발족 동의, 백관수의 독립선언서 낭독, 김도연의 결의문 낭독에 이어 서 춘이 연설하려 하자, 일본 경찰이 무력으로 개입하여 학생 대표들을 모조리 검거하였다. 송계백 선생도 이날 함께한 유학생이었다. 선생은 평안남도 평원(平原) 사람으로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재학 중, 2ㆍ8 독립선언에 참가한 11명 대표 가운데 한 분이다. 선생을 포함한 재일 유학생들은 자나 깨나 조국광복의 꿈을 키워 왔는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김산 선생님, 선생님의 이름을 부르고 나니 가슴이 먹먹해 오는 나머지, 한참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무슨 연유에서일까요? 문득 선생님이 사신 서른세 해가 깊고 높은 뜻을 펼치기에는 너무 짧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음으로 그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강렬하고 인상적인 삶을 사셨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 1937년 중국 옌안 시절의 김산 제가 선생님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1983년입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30년여 전이었습니다. 미국의 기자 출신 작가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 Song of Ariran에서, 망국의 한을 안은 한 젊은이의 짧고도 치열한 삶을 처음 대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저뿐만 아니라, 많은 독자들이 받은 충격은 가히 필설로 묘사할 수 없는 정도였습니다. 누군가는 우리가 고수해 왔던 기존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고 바뀌는 초유의 경험을 했다고 하더군요. 무엇보다도 선생님의 사후 45년 만에 처음으로 우리에게 당신의 생애가 실체적으로 다가왔다는 사실 이외에도, 님 웨일즈의 표현대로 현대적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송종익(宋鍾翊, 1887. 2. 27~1956. 1. 7)선생은 1887년 2월 27일 경북 대구에서 부친 송인구의 맏아들로 출생하였다. 1905년 일본에 유학하였다가 큰 뜻을 펴고자 1906년 4월에 미국으로 건너가 소학교를 졸업하였으며 당시 한인들의 항일민족 운동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하였다. 1908년 3월에 일제 통감부의 외교고문인 스티븐스(stevens, d. w.)가 샌프란시스코의 각 신문에 일제의 한국의 보호국화를 왜곡 선전하자 전명운, 장인환 의사가 스티븐스를 처단한 사건이 있었다. 이때 선생은 이들 두 의사의 법정 투쟁에 대비하여 조직된 재판후원회의 재무로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송종익 선생 한편 1912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의 리버사이드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와서 맨 먼저 선생에게 흥사단 약법의 초안을 보이고 상의했다. 이때부터 선생은 흥사단의 첫 동지가 되어 일생을 단(團) 운동에 바치게 된다. 흥사단 미주본부를 이끌다 흥사단은 1913년 창단 이후 1920년까지 8년 간 창단위원회에서 운영하였고 1921년부터 이사부와 의사부, 심사부의 3부역원제가 실시되었다. 선생은 1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푸른 하늘을 훨훨 나는 두루미 너는 좋겠다 한중일 국경의 빗장도 풀고 마음의 경계도 없이 훨훨 누천년 날아다니는 네가 부럽다 우리도 너처럼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다면... 이념의 골짜기를 벗어나 막힘없이 통하는 그런 세계 속에 사는 네가 오늘따라 몹시 부럽다 - 한꽃 두루미- ▲병풍 속의 두루미(한국) 한중일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두루미는 어떤 존재일까? 궁금증을 풀어줄 전시회가 인천관동갤러리(관장, 도다 이쿠코)에서 오늘부터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큼지막한 한국의 8폭 병풍이 눈에 확 들어오는데 빨간 바탕에 푸른 소나무 그리고 흰 두루미로만 만들어진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병풍 속의 두루미가 관람객을 반긴다. ▲ 새해 맞이 대문에 붙이는 그림 속의 두루미(중국) 그 옆에는 중국의 부채가 전시 되어 있는데 황금 바탕에 소나무와 흰 두루미 8마리가 자태를 뽐내고 있다. 8자를 좋아하는 중국이기에 두루미가 8마리인가 보다. 그런가하면 전시장 천정에서 길게 늘어진 기모노용 오비(띠) 속의 두루미도 질세라 그 위용을 뽑낸다. 이 오비는 100년 된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