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학을 일본말로는 츠루(tsuru)라고 한다. 이 말은 한국말 두루미(turumi)와 유사한 말로 한국어 어원설이 있다. 한자로는 두 나라가 모두 학(鶴)을 쓰지만 고유어는 각각 츠루와 두르(두루미)로 발음한다. 두루미는 예부터 한일 두 나라 모두 길조(吉鳥)로 여겨왔는데 한국에서는 고려청자를 비롯한 병풍, 흉배, 민화, 촛대, 소반, 그릇, 연하장과 같은 일상용품에 두루미가 새겨져있으며 일본 또한 기모노를 비롯하여 오비(띠), 보자기, 예물 장식, 우표 등 자질구레한 일상용품에 이르기까지 두루미가 쓰인다. ▲ 국보 제68호 청자상감운학매병, 간송미술관 인천의 문학산, 청학, 송학, 임학, 학익처럼 두루미 학(鶴)자가 붙은 땅이름이 많이 있듯이 일본에도 두루미 학자가 들어가는 땅이름도 많고 가고시마현(鹿島)에는 철도역 이름에 츠루마루(鶴丸) 역도 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름에도 학(鶴)자는 많이 쓰이는데 역사인물로는 풍신수길의 장남이 츠루마츠(鶴松)라고 일본 위키는 소개하고 있다. 이름에 츠루(鶴)가 들어가기도 하지만 성씨에 츠루(鶴)가 들어가는 경우도 있는데 츠루마루(鶴丸)씨가 그런 경우다.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사람은 누구나 괴로움에서 벗어나 고요하고 흐뭇하고 사이좋게 잘 어울려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도 성남, 짜증, 미움, 싫음, 바람,탐냄, 근심, 걱정, 두려움, 슬픔 같은 괴로움에 쌓여 지낼 때가 더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한 마디로 마음을 다스릴 줄 몰라 늘 마음버릇 종이 되어 헤매는 마음 따라 끌려 다니며 살기 때문입니다. 이는 최한실 선생이 지은 마음닦기 책 머리말에 나오는 말이다. 최한실 선생은 마음을 다스릴 줄 몰라 늘 마음버릇 종이 되어 헤매는 사람을 위해 속리산 자락 밝메(백악산) 기슭 물아이골에서 푸른누리 마음닦는 마을을 꾸려가는 주인장이다. 선생을 알게 된 것은 2년 전으로 이곳 물아이골 푸른누리에서 겨레말 살리는 이들 모임을 갖게 된 것이 계기였다. 그때는 마음닦는 마을이라는 말없이 푸른누리라는 말로 불리고 있었는데 기자가 이곳을 찾은 것은 마음을 닦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기에 마음을 닦는 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왜 마음을 닦아야하는지 따위에 대해서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다. 속리산 자락 밝메(백악산) 기슭에 자리잡은 푸른누리 마음닦는 마을 전경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2016년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뽑힌한시대[1889~1981]선생은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1903년 부모를 따라 미국 하와이로 건너갔다. 부친의 강렬한 민족의식을 물려받아 3대가 독립운동의 길을 걸은 독립운동 가족이다. 선생은 1913년 샌프란시스코로 옮겨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멘티카에서 사탕무 농장을 경영하였다. 1916년 선생은 멘티카에서 부친을 도와 대한인국민회 멘티카지방회를 설립하면서 처음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3.1운동 소식이 미주 한인사회에 전해져 대한인국민회 주관으로 독립의연금 모금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될 때 한시대 선생 가족 구성원 모두가 적극 동참하였다. 선생은 구미위원부를 지원하기 위해 독립공채를 구입하고 외교비 지원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1924년 경 다뉴바 한인국어학교의 교장이 되어 한인 2세의 민족교육에도 앞장섰다. 이후 딜레노로 옮겨 부친의 국어학교인 태극학교 설립 운영을 돕고 있던 중 1930년 딜레노지방회를 설립하고 회장에 취임하였다. 1936년 선생은 재미한인사회의 발전을 위해 실행위원이 되어 대한인국민회를 재건하고 부흥시키는데 앞장섰으며, 193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검은 치마 흰 저고리 보기가 드물구나 신선이 있지 않으니 누구에게 돌아갈까? 행동거지는 훤칠하고 모양은 고아하며 정신은 빼어나고 깃털은 아주 섬세하네 위는 고려 말 학자이자 문장가인 이색(李穡, 1328~1396)의 목은시고(牧隱詩藁) 권22, 詠鶴에 나오는 두루미를 읊은 시의 일부로 두루미는 예부터 시인들의 시에 자주 오르내린 길조(吉鳥)이다. ▲ 인천시 중구 신포동에는 시새(市鳥)를 상징하는 학 상징물이 있다 ▲ 인천시 중구 월미 문화거리 공연장 모습 ▲ 한국 병풍 속의 학 두루미는 문학의 주요 소재였을 뿐 아니라 청자상감매죽학문매병靑磁象嵌梅竹鶴文梅甁)과 같이 고려청자에 학이 그려져 있다거나 조선시대 관복의 흉배는 물론이고 병풍 등에도 고고한 모습의 두루미가 등장한다. 동양의 길조(吉鳥)인 두루미는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에서도 오래도록 사랑받아왔는데 인천관동갤러리(관장 도다 이쿠코)에서는 2016년 설 명절을 맞이하여 특별기획전 한중일 길상(吉祥)의 이미지 두루미 전을 오는 2월5일부터 3월20일 까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맹추위가 계속 될 때는 뭐니 뭐니 해도 온천만한 것이 없다. 특히 온천 천국인 일본의 겨울은 온천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계절이다. 도쿄 주변의 온천으로 유명한 곳은 하코네를 꼽을 수 있지만 군마현(群馬)의 이카호온천(伊香保溫泉)은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온천지역이다. 도쿄에서 1시간여면 갈 수 있는 군마현에는 27개 시정촌(市町村)에 자그마치 455개의 온천이 있으며 숙박시설을 겸한 온천만도 105개소에 이른다. 이카호온천은 군마현의 중앙부에 솟아있는 하루나 산 북동쪽 기슭, 표고 720~820 미터의 고지대에 계단 모양으로 발달한 온천이다. 주로 황산염천, 탄산광천으로 알려져 있으며 목욕 타올이 빨갛게 물들 정도다. ▲ 이카호온천의 명물 미즈시와우동 노천온천(로텐부로) 머리 위에서는 흰 눈이 펄펄 내리지만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춥다는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는다. 뭐라 할까? 정신은 맑고 몸은 따뜻한 느낌이랄까? 온천을 하고 나와 군마의 명물을 먹어보는 것도 온천욕의 재미 가운데 하나다. 대부분 온천 주변은 먹거리가 풍부하지만 이카호온천 지역은 먹거리도 타 지역 못지않게 많은 편이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제와 맞서 언어독립투쟁을 전개한 이극로 선생의 부인되시는 김공순 여사님께 편지를 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이극로 선생을 연구하면서, 김공순 여사님에 대해서도 글로 쓰고 싶었습니다. 이제야 여사님에 대해 쓰게 되었습니다. 이극로(18931978) 선생은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학업을 마치고, 1929년 1월에 귀국하여 우리 말글을 지키는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1929년 10월 우리말사전을 편찬하고자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였고, 위원장에 뽑혔습니다. 그해 12월 24일에 김공순(1907?) 여사님과 결혼하였구요. 그의 나이 37세가 되는 해였습니다. 여사님의 나이는 23살이었지요. 김공순 여사님은 안중근에게 권총을 넘겨준 김창걸의 막내딸이었는데 김창걸은 이 일로 일제 경찰에 잡혀 희생되었습니다. 김공순 여사님은 평남 강서 진남포에서 출생했고, 평양여고와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일제시기 보통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였지요. 이극로 선생은 다른 회원과 달리 언어독립운동인 한글운동만을 전담하고자 직업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돈을 벌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서 한글운동을 추진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송병조 선생(1877.12.23 ~ 1942.2.25)은 평북 용천(龍川) 출신으로 1914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기독교 목사가 되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시위를 주동하였으며, 동년 10월 2일에는 평양에서 전국 각도 대표 24명이 모여 대한국민총회(大韓國民總會)를 조직하게 되자 향촌회, 부군회(府郡會), 도(道)대회, 국민총회 등의 대표들이 박인관(朴寅寬)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그는 양석진(梁錫鎭)채필근(蔡弼根)김태희(金泰熙) 등과 함께 평의원(評議員)에 선출되어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하였다. 송병조 선생 그러나 일경의 위협과 감시가 점차 가중되자 그는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재무부 참사(參事)가 되었다. 1921년에는 한중 양국민의 친선과 대일항쟁을 도모할 목적으로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설립하여 유종주(兪宗周)윤기섭(尹琦燮)김홍서(金弘 )여운형(呂運亨)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 기독교 목사 손정도(孫貞道)이원익(李元益)김병조(金秉祚)김인전(金仁全) 등을 중심으로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를 조직하여 국내외 각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누구요?, 이승만 대통령은 뭐이라할까. 자기 편한 대로만 생각하신 것 같아요. 편할 때는 나오고 불편할 때는 안 나오시고 한 것 같아요 이 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마지막 경위대장이었던 윤경빈 선생의 말이다. 윤경빈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마지막 청사 경교장》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당시 경교장과 관련이 있던 4명의 증언자(윤경빈, 김자동, 김정륙, 오경자)들로부터 증언을 받아 정리 한 책인데 윤경빈 선생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이러한 말이 나온 배경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경교장에서 연 국무위원회 관련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경교장에서 백범 주최로 전체 국무회의를 했다고 하지만 그건 참으로 쓸쓸한 일이었다. 풍찬노숙으로 목숨을 불사하고 독립운동을 하고 돌아온 백범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고국땅을 밟는 그 순간부터 미군정하에서 홀대를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대한민국임시정부마지막청사 경교장 책 표지 고대하던 광복의 기쁨이 귀국으로 곧바로 연결되지 못한 것은 중국쪽 문제가 아니라 국내 문제 때문이었다. 당시 임시정부는 중국 중경(충칭)에서 광복을 맞이했는데 장개석 총통(188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홋카이도(北海道)라고 하면 눈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그 만큼 겨울이 아름다운 곳이 홋카이도다. 이곳은 2년 전부터 한국의 저가 항공이 취항하게 되어 항공료가 예전보다 훨씬 싸진데다가 여행사들이 계절별로 다양한 여행상품을 개발하여 요 몇 년 새로 홋카이도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특히 겨울엔 삿포로 눈축제(유키마츠리)로 일본은 물론 전 세계 사람들로 삿포로는 들썩인다. 삿포로 눈축제는 지금으로 부터 67년 전인 1950년 삿포로 중고등학생이 6개의 눈조각을 오도리공원에 만들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때 학생들 중심으로 눈싸움, 눈조각전, 축제 등의 행사가 열렸는데 당시 5 만여 명이 찾아와서 깊은 관심을 보였고 이후 눈축제는 삿포로의 겨울 행사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눈축제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눈 조각상이다. 눈축제가 열리는 삿포로 중심가 오도리 공원에는 전년도 가을부터 눈 조각상을 만들기 위한 대규모 준비에 들어가는데 여기에는 육상자위대 병력도 참가하여 눈 조각상을 위한 작업시설 설치 등을 돕는다. ▲ 2016년 삿포로 눈축제 포스터 1953년에는 높이 15미터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양기하(梁基瑕, 1878. 10. 8~1932. 2.) 선생은 1878년 10월 8일 충남 논산군(論山郡) 두마면(豆磨面)에서 태어났다. 호는 하산(荷山)이며, 이명(異名)으로는 기하(基河), 인원(仁元), 그리고 임창주(林昌周) 등이 있다. 선생은 대한제국 말기 공주(公州) 군수 등 관직에 있다가 1910년 8월 경술국치(庚戌國恥)로 주권이 상실되자 국권회복을 모색하기 위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서간도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강원도와 황해도 등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던 박장호(朴長浩) 등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의 문인들과 더불어 교육사업에 종사하면서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군 양성에 노력하였다. 만주 광복군사령부 정보국장으로 적정 탐지와 일제에 빌붙은 부일배 색출 그러던 중 1919년 국내에서 3, 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이에 즉각 호응하여 일제를 무력으로 타도하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항일 무장투쟁단체의 조직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3월 15일 박장호, 조맹선(趙孟善), 백삼규(白三圭), 전덕원(全德元) 등 의병 출신 독립운동가들과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에서 대한독립단(大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