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사슴이 뛰어 노는 나라(奈良) 흥복사(興福寺, 고후쿠지)에 들른 것은 지난 11일 왕인박사 신사(神社)를 들른 뒤오후 늦은 시각이었다. 저녁 해가 짧아 오중탑에 긴 그림자가 벌써 지기 시작했다. 나라공원(奈良公園)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은 그 유명한 동대사(東大寺, 도다이지)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는 사슴들이 뛰어놀아 고찰 못지않게 인기가 있지만 기자가 찾은 날은 사슴의 뿔을 자르는 시기인지 흥복사 안에는 겨우 한 녀석만 비실거리고 있었다.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일본에서 가장 인상 깊은 곳을 꼽으라면 으뜸인 곳이 나라 교토이다. 그 만큼 이곳은 과거 천년 고도답게 역사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으로 특히 불교를 국교로 하던 나라시대였던 만큼 명찰, 고찰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나라의 속내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기자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관광객들과는 남다른 감회로 다가오는곳이 나라지역이다. 속내란 다름 아닌 일본 고전을 전공하면서 만나게 된 각 유적지의 역사를 뜻한다. ▲ 천년고도 나라 흥복사, 오른쪽 오중탑은 국보 흥복사만 해도 그렇다.긴테츠(近鉄) 나라역(奈良駅)에서 기념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책을 사는 데는 돈을 아끼지 마라 / 하나의 주제에 대해 책 한권으로 다 알려하지 말고 반드시 비슷한 관련서를 몇 권이든 찾아 읽어라 / 책 선택에 대한 실패를 두려워 마라 / 책을 읽는 도중 메모하지 마라 / 남의 의견이나 안내 같은 것에 현혹되지 마라 / 책을 읽을 때는 끊임없이 의심하라 /자기 수준에 맞지 않는 책은 무리해서 읽지 마라 / 읽다가 중단하기로 한 책이라도 일단 마지막 쪽까지 한 장 한 장 넘겨보아라 / 속독법을 몸에 익혀라 이는 일본 지식인의 거장이라는 다치바나 다카시(立花 隆, 1940~)의 독서법 가운데 일부이다. 다치바나는 어릴 때부터 책벌레로 학교 도서관 책을 다 읽어 버린 뒤에는 시립도서관과 현립도서관에서 문학 서적 대부분을 읽었다고 한다. 대학에 입학해서는 고서점 안내지도를 들고 다니며 고서점가를 이 잡듯이 뒤져 싼 책을 사 모으며 독서를 이어 간 것으로 유명하다. ▲ 책과 자료 속에 둘러싸여 대담을 하는 다치바나, 유투부 갈무리 지금까지 80권의 책을 쓴 그는 1권의 책을 쓰는데 적어도 100권의 책을 읽고 정보를 수집해야한다고 했다. 그의 책은 《나는 이런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오사카 날씨는 겨울인데도 마치 이른 봄처럼 화사했다. 이틀 전 반야사에 들렀을 때 활짝핀 수선화 꽃을 보았을 때도 그랬지만 그제(11일) 왕인박사 신사를 찾아 나선 날도 구름 한 점 없이 쾌적했다. 왕인박사(王仁博士)를 모시는다카이시신사(高石神社)는 숙소인 신오사카에서는 약 1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였지만 열차를 세 번이나 갈아타야하는 한적한 오사카 외곽지역에 있었다. ▲ 오사카 다카이시시(高石市)에 있는 과거 왕인박사 신사였던 다카이시신사 전경 ▲ 오사카 히라가타시(枚方市)에 있는 왕인박사 무덤 빗돌 참고로 왕인박사 신사는 다카이시시 다카시하마(高石市 高師浜4-1-19)에 있으며 무덤은 히라가타시 후지사카히가시마치(枚方市 藤阪東町2)에 있다. 이 두 곳은 같은 오사카부(大阪府)에 있지만 열차로 1시간 반 거리에 각각 자리하고 있다. 왕인박사 무덤은 여러번 갔던 곳이라 이번에는 왕인박사 신사를 찾아 나선 길이었다. 다카이시신사(高石神社)를 찾아 가기 전에 기자는 김달수 선생이 쓴 ≪일본 속의 조선문화(日本の中の朝鮮文化, 講談社, 197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저는 박사과정에 들어간 지 10년이 되는 2009년에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한글운동을 중심으로라는 박사논문을 제출하여, 학위를 취득한 박용규라고 합니다. 2012년에는 박사논문을 보완하여 《조선어학회 항일투쟁사》를 펴냈습니다. 제 학위논문과 《조선어학회 항일투쟁사》를 간략히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의 한글운동은 단순한 국어운동이 아닌 항일투쟁이었다는 결론을 얻어 내었습니다. 광복 70주년이 되는 올해에, 이극로(18931978) 선생님께 편지를 드리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이 선생님은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학업을 마치고, 1929년 1월에 귀국하여 우리 말글을 지키는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1929년 10월 우리말사전을 편찬하고자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였고, 위원장에 뽑혔습니다. 그 뒤 1931년 우리의 말과 글을 정리하고 통일하고자 조선어학회를 출범시켰습니다. 선생님은 조선어학회에서도 상무간사로 활동하셨구요. 선생님은 조선어학회에 관련된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깨알만한 작은 글씨로 수첩에 적어두고서 학회의 일을 추진했습니다. 이처럼 선생님은 조선어사전편찬회와 조선어학회에서 모두 핵심 역할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예전에 우리나라에서는 설날 복조리를 거는 풍습이 있었다. 요즘도 그런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지만 거의 도심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조리란 쌀을 이는 도구로 설날에 조리를 1년 동안 사용할 수량만큼 사서 방 한쪽 구석이나 대청 한 귀퉁이에 걸어놓고 하나씩 사용하면 1년 동안 복이 많이 들어온다는 민간신앙이 있었다.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의 산촌이나 농촌에서는 설날에 복조리와 아울러 갈퀴도 사두는데, 조리는 쌀과 관련이 있고 갈퀴는 긁어모으는 도구이므로 1년 동안 복을 긁어들인다는 의미가 있어 새해를 맞이하는 설날에는 반드시 이를 장만하여두는 풍습이 있었으나 시대가 바뀌어 농촌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보기는 쉽지 않다. 가정집 대문 위 문패 밑에 걸린 시메카자리 회사의 처마 밑에 걸린 시메카자리 그러나 일본은 다르다. 1월 9일 나라(奈良) 반야사 주변 동네 주택가에서 만난 시메카자리(注連飾り)는 장식하지 않은 집을 찾기가 더 쉬울 정도로 거의 모든 집 대문에 장식으로 매달아 두고 있었다. 시메카자리는 새해를 맞아 집 대문에 매다는 장식으로 짚을 꼬아 만든 줄에 흰 종이를 끼워 만드는데 요즈음은 슈퍼 따위에서 손쉽게 살 수 있다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조희제 (1873-1939) 선생은 조선의 국운이 쇠퇴하던 시기 의병활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항일의식이 투철한 집안에서 자랐다. 일제에 맞서 목숨을 끊은 송병선과 항일투쟁에 나섰던 기우만 의병장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선생은 수십 년에 걸쳐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투사들의 항일사적과 애국지사들의 행적 등 항일투쟁 기록을 모았다. 또한, 법정에서 애국지사들의 재판 과정을 방청하며 기록하기도 하였다. 명성을 떨치고 그 행적이 역사에 잘 기록된 인사보다는 초야에 묻힌 애국지사들의 충절을 기록했다. 선생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책의 표지에 덕촌수록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1질은 책상 위에 두고, 1질은 궤짝에 넣어 마루 밑 땅에 묻었다. 덕촌수록(悳村隨錄) 염재(念齋) 조희제(趙熙濟) 선생이 1895년 을미사변 이후부터 1918년까지 의병장, 애국지사들의 절의실적(節義實蹟)을 모아 전기체로 서술한 6권 2책이다. 염재는 염재야록(念齋野錄) 원고를 완성하고 일제 경찰의 관심을 피하기 위하여 책의 표지에는 덕촌수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덕촌은 염재가 살던 덕치(德峙)를 가리킨다. ▲ 염재 조희제 선생 그러나 염재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나라(奈良) 반야사(般若寺, 한냐지)의 수선화는 한 겨울인데도 곱게 피어 있었다. 어제 9일(토) 오후 3시 찾아간 반야사는 주택가 언덕길을 막 벗어난 곳에 동백과 수선화를 품고 고즈넉하게자리하고 있었다. 반야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대사(東大寺, 도다이지)에는 사람들이 늘 바글거리지만 반야사를 찾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반야사에 머무는 동안 찾아오는 사람이라곤 낡은 카메라를 든 노인들뿐이었다. 아마도 겨울 수선화를 찍기 위해 온 동네 사람들 같았다. ▲ 나라시에 있는 반야사 전경, 왼쪽이 본당이고 오른쪽 탑은 목탑이 주종을 이루는 일본에서는 보기드문 석탑으로 13세기에 만든 것이다. 나라산(奈良山) 아래 언덕 고즈넉한 곳에 자리한 반야사는 아스카시대에 고구려 스님 혜관법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수도가 나라로 천도함에 따라 덴표 7년(735년) 성무왕(聖武天皇)이 헤이죠쿄(平成京)의 귀문(鬼門)을 지키기 위해 대반야경을 기단에 넣어 탑을 세운 것이 인연이 되어 절 이름을 반야사라 부르게 되었다. 이후 헤이안시대에는 천여명의 학승들이 있을 정도로 번창했으므로 학문사(學問寺, 가쿠몬지)라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김달수 선생(1919-1997)이라고 하면 나는 왠지 모를 그리움을 갖고 있다. 선생을 만난 것은 책을 통해서였지만 왜 진작에 살아 계실 때 찾아뵙지 못했나 하는 후회도 든다. 선생은 장장 21년 동안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며 그곳에 남아있는 조선과 관련된 유적지를 생생하게 답사 형식으로 글을 써서 일본인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선생이 발로 뛰어 현장을 확인하고 쓴 《일본 속의 조선 문화(日本の中の朝鮮文化)》라는 책은 일본어로 쓰여졌다. 이 책은 모두 12권으로 1970년에 시작되어 1991년 12권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는 12권째 머리말에서 이렇게 장기간에 걸쳐 이 책을 쓰게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21년 동안 일본 땅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고대 한국의 문화 유적지를 찾아다닐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한국 고대문화'에 대한 관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김달수 선생은 일본의 황국사관에 대해 매우 우려를 했다. 그는 《일본 속의 조선 문화》를 쓰면서 숱한 독자들로부터 편지를 받았다고 했다. 오사카에 사는 한 독자는 일본의 역사는 다시 써야한다.고 했으며 선생의 일본 속의 조선 문화 유적지 글을 본 독자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김 영 란(金 永 蘭, 1894~1922. 7. 12) 선생은1894년 평안남도 순천군 신창면(新倉面) 신창리(新倉里)에서 4대독자로 출생하였고, 여기에서 성장하였다. 1919년 11월 선생은 이곳에서 잡화상을 경영하고 있었으나 기독교 감리교 신자로 순천군의 만세시위에 참가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할 결의를 다지게 되었다.순천군과 성천군은 평남은 물론 전국에서도 3.1운동 기간 중에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희생자가 많았던 곳으로 유명하였다. 성천군에서는 1919년 3월 4일 군내에서 최초로 만세 시위운동이 발발하여 7일까지 이어지면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또 순천군에서는 3월 2일 은산면(殷山面)에서 천도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1천여 명의 군중들을 이끌고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여 3.1운동의 불꽃을 지폈다. ▲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재판 모습 이어 3월 4일 자산면(慈山面)에서도 천도교인들이 중심되어 만세 시위운동을 벌였고, 3월 5일 신창면에서는 장날을 기하여 기독교인들의 선도로 3천여 명의 장꾼들이 봉기하여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3월 6일 읍내에서 천도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이 합세하여 2천여 명의 군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삼정사의 만종이라 알려진 오오츠시 삼정사(三井寺, 미이데라)에서 지난 28일 범종 청소 스스하라이(煤拂い)를 했다. 승려들은 1년간 쌓인 먼지를 정성껏 털어내고 제야의 종을 치기 위한 준비를 했다. 일본의 3대 명종의 하나인 이 범종은 높이 208센티, 직경 124센티, 무게 2.2톤으로 1602년에 주조되었으며 시가현(滋賀縣)의 지정문화재다. 승려인 니시노보우신유(西坊信祐, 37살)씨는 참배자가 내년에도 건강하게 평화로운 한 해가 되도록 기원을 담아 종을 깨끗이 청소했다.라고 말했다.며 29일 교토신문이 보도했다. 절에서 뿐만이 아니라 신사(神社)에서도 스스하라이를 실시하는데 아오모리현의 이와키야마신사 (岩木山神社)에서도 길이 4~5미터짜리 장대비로 신사 안 구석구석에 쌓인 먼지를 털어냈다는 기사가 보이는 등 전국 각 곳의 절과 신사에서 묵은 때와 먼지를 털어내는 스스하라이 의식에 관한 보도가 넘쳐난다. ▲ 사가현 삼정사(三井寺)에서 스님들이 범종의 먼지를 털어내고 있다. 일본의 풍습 가운데 스스하라이(煤拂い)라는 것이 있는데 우리말로는 청소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여기서 스스(煤)란 검댕이나 그을음을 뜻하는 것이고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