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국문화편지=이윤옥 기자] 저는 할아버지와 조은애 할머니의 아들 김진동의 차녀 수옥입니다. 할아버지가 나라의 자주독립과 남북통일을 실현하려고 노력하시다 납북되어 세상을 떠나신지 어언 65년이 지났습니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실 때 저는 겨우 만 일곱살이었습니다 이제 저는 아들, 딸을 둔 어머니입니다 나라를 잃었을 때는 독립을 위해, 일제의 패망 뒤에는 통일을 위해 온몸을 바치신 할아버지가 세상에서 점점 잊혀 가는 것을 매우 안타까이 여기신 고 송남헌 비서실장님이 고 김재철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분들과 함께 1989년에 우사 김규식 연구회를 창립하셨습니다. 우사 김규식 연구회는 할아버지의 생애와 사상과 업적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지금까지 모두 9권의 책을 펴냈습니다. 저는 김재경 회장, 서중석 교수, 심지연 교수, 김준상 총무, 손장선 서기등과 함께 이 연구회에서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1919년 1월에 개회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러 출발하면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나라 안에서 궐기를 촉구하여 3.1 혁명의 동기를 부여하였으며 강화회의에 가서는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고 대한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또 1922년에는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나는 경술국치에 불평과 불만을 품고 의열단에 가입한 후 조국을 위하여 생명을 바쳤소. 나는 우리 민족에게 각성을 주기 위하여 오늘날까지 살았으므로 사형도 좋소이다. ―선생의 법정 최후 진술 중에서(1923. 8) ― 남정각 (1897~1967) 선생은 1897년 12월 22일 경기도 용인(龍仁)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의 호는 오산(午山)이고, 이명(異名)으로는 남영득(南永得), 남영득(南寧得) 등이 있다. 선생은 1913년 16세까지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이후 상경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 부설 학관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익히며 민족의식을 배양하여 갔다. 그러던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수원(水原)에서 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였고, 이어 독립신문을 등사하여 용인, 수원, 안성(安城) 등지에 배포하여 자주 독립사상을 전파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지역에서의 격렬한 만세 시위운동을 촉발하였는데 일조하기도 하였다. 전국적이며 거족적인 3.1운동에도 선생이 그렇게 바라던 조국 광복은 성취되지 못하였다. 이에 선생은 1919년 8월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학문을 수학하면서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모색하여 갔다. 선생은 중국 장춘(長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정태진(丁泰鎭, 1903. 7. 25~1952. 11. 2) 선생은 1903년 경기도 파주군 금촌읍 금릉리에서 부친 정규원과 모친 박씨 사이의 3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호는 석인(石人),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개신교 집안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개화하였던 선생은 1917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여기에서 4년의 수업과정을 마치고 1921년 3월 졸업한 선생은 그 해 4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이 시절 선생은 6살 위의 동기 동창생인 정인승을 만나 우리말에 대한 사랑을 공감대로 하여 서로 깊은 우정을 맺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후 선생과 정인승은 조선어학회에서 우리말 사전 편찬 업무도 같이하고, 또 조선어학회 사건 때에는 옥중에서 고통도 같이 나누며 동고동락하게 된다. ▲ 정태진 선생 아울러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선생은 국학자이며 실천적 민족주의자인 정인보 선생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자로서 거듭나게 되었다. 상해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종사하다가 귀국한 후, 1922년 봄부터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한 정인보 선생은 우리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조선의 얼을 강조하고 있었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겨울철 따끈한 국물요리는 한국이나 일본 두 나라 모두 추위를 녹이고 입맛을 돋궈주는 요리임에는 틀림없다. 원래 일본에는 한국처럼 감자탕이니 매운탕 같은 ~탕 요리는 없다. 뿐만 아니라 김치찌개니 된장찌개 류도 없고 미역국이니 북어국 같은 것도 없다. 하지만 된장찌개 대신 맑은 된장국인 미소시루가 있고 특히 겨울철에 입맛을 돋우는 나베요리(鍋料理)가 있다. 나베요리에서 나베란 남비를 가리키는 말로 남비에 여러 재료를 담아 끓여 먹는 음식인데 우리의 ~탕 요리에 가깝다. 야후제팬에서는 2015년 특집으로 고향의 맛 재발견 이라는 음식마당이 있는데 12월에는 일본 전국에서 손꼽히는 나베요리 10선(選)이 소개되어 있다. 1위는 야마구치현의 복지리, 2위는 홋카이도의 연어나베 3위는 아키다현의 작은 생선과 특제 간장으로 만드는 숏츠루나베 등등 전국에 내로라하는 나베요리를 그 유래와 사진을 곁들여 소개하고 있다. ▲ 전국 나베요리 가운데 1위인 야마구치현의 복지리(위), 홋카이도의 연어나베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럽다. 이들 음식은 한국의 ~탕과는 사뭇 다른데 고춧가루를 쓰지 않기에 얼큰한 것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에게는 다소 심심한 맛일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김약연(金躍淵, 1868.9.12~1942.10.29) 선생은 1868년 9월 12일 함경북도 회령군 동촌 옹희면 제일리 행영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의 호는 규암(圭巖)으로 8세 때인 1875년부터 10여년 간 함북 종성 출신의 유학자들인 남종구, 오삼열, 주봉의 등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아마도 선생이 개항 이후 외세의 침략과 수탈로 인해 날로 참담해 가는 나라의 운명을 깊이 생각하고, 그 난국의 해법을 맹자의 경세론(經世論)에서 찾아보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즈음의 정세는 급박하였다. ▲ 규암 김약연 선생 1908년에는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에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설립하여 숙감(塾監)을 역임하였으며 1910년에는 명동중학교로 발전시켜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청년들의 애국정신을 함양하였다. 1912년에 이동휘(李東輝)가 명동으로 망명해오자 연변교민회를 발전적으로 해체,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북간도국민회(北間島國民會)를 창설, 초대 회장에 취임하여 독립운동의 선봉에 나섰다. 1918년에는 여 준(呂準)정안립(鄭安立)박성태(朴性泰)박찬익(朴贊翊)정 신(鄭信) 등 38인과 함께 31독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1946년 5월 20일치 자유신문에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의 말로(末路), 음식점 내어 자활이라는 다소 생소한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다. 내용인즉 맥아더사령부의 지령으로 국가의 후원이 없어진 야스쿠니신사는 자활방법을 강구해야했는데 신사 안의 국방관을 단장하여 이곳을 영화 따위를 상영하는 환락업소(원문에는 환락경)로 만들고 또한 경내에는 음식점을 만들어 자활의 길을 걷기 위해 18일 경시청에 정식 허가 신청을 내였다.라는 내용의 기사가 그것이다. ▲ 야스쿠니신사 안에는 유취관이라는 전쟁기념관이 있다.유취관 이층에서 바라다 본 모습, 유취관 안에는 대포, 비행기 등 각종 전쟁 물품과 당시를 미화하는 각종 서적과 비디오등 영상제작물을 판매하고 있다. ▲ 유취관 입구에 자살폭격기가 전시 되어 있다 미국은 당시 전쟁범죄자들을 미화하여 그들을 영웅으로 만드는 일을 중지하도록 야스쿠니에 대한 후원을 금지했으며 후원이 끊긴 야스쿠니는 자활의 길을 모색해야 했던 것이다. 이 신문에서 말하는 국방관이 현재의 전쟁기념관인 유취관(遊就館)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유취관 안에는 2차 대전 때 쓰던 각종 무기와 대포, 폭격기 등을 전시해놓고 있다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백용성(白龍城, 1864. 5. 8~1940. 2. 24)선생은 1864년 5월 8일 전라북도 남원군 하번암면 죽림리(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아버지 백남현과 어머니 밀양 손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수원(水原), 속명(俗名)은 상규(相奎), 법명(法名)은 진종(震鍾), 법호(法號)는 용성(龍城)이다. 선생은 불제자로서의 천품을 타고난 듯 어릴 때부터 자비스런 성품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또한 7세 때인 1870년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는데, 9세에 이르러서는 한시를 지을 정도였다고 하니 선생의 영특한 문재(文才)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선생은 14세 때 꿈속에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느낀 바 있어 남원 교룡산성에 있던 덕밀암(德密庵)으로 찾아가 출가하려 하였으나 부모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16세 때인 1879년 경남 합천 가야산 해인사 극락암으로 출가하여 화월화상(華月和尙)을 은사로, 혜조율사(慧造律師)를 계사로 불법 수도의 길에 들어섰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해인사는 고려시대 불력(佛力)으로 몽고의 침입을 막아보려 조판한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유수한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정신여고 출신의 여성독립운동가 이야기를 듣고 싶어 교장 선생님을 찾아뵙겠다는 편지를 보낸 것은 지난 11월 중순이었다. 편지를 보내자마자 언제라도 좋다는 연락이 와서 기자가 이희천 교장 선생님을 찾아간 날은 11월 30일 월요일 오전 10시였다. 교정에는 늦 단풍나무 한그루가 붉은 옷을 입은 채 서 있었고 바로 옆에는 정신백년(貞信百年, 1887-1987)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돌비석이 있어 정신여고가 오랜 전통을 지닌 학교임을 묵묵히 말해주고 있었다. 정신여자고등학교(교장 이희천) 출신의 여성독립운동가로는 김마리아 선생을 비롯한 김순애,김영순, 신의경, 백신영, 유인경, 이정숙, 장선희 애국지사 등으로 이들은 한국여성독립운동사의 큰 획을 그은 인물들이다. 여성독립운동가의 산실답게 교장실에는 학사모를 쓴 김마리아 선생의 액자가 걸려있었는데 액자 밑에는 순국열사 김마리아(1892-1944), 정신여학교 4회 졸업. 모교의 교사로 재직. 2.8독립선언의 주동인물로 활약.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 3.1 운동 당시 옥고를 치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추서 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 정동여학당(정신여고 전신)학생들과 2대 교장 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이제 슬슬 일본 거리에 시메카자리(注連飾り) 장식품이 나올 시간이다. 시메카자리는 연말에 집 대문에 매다는 장식으로 짚을 꼬아 만든 줄에 흰 종이를 끼워 만드는데 요즈음은 슈퍼 따위에서 손쉽게 살 수 있다. 이러한 장식은 농사의 신(稻作信仰)을 받드는 의식에서 유래한 것인데 풍년을 기원하고 나쁜 액운을 멀리하려는 뜻으로 신도(神道)에서 나온 것이라는 설도 있고 한편으로는 일본의 국신(國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과 관련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시메카자리는 12월 말에 내달고 지역에 따라서 다르지만 대개 1월 7일 이후에 치우는 게 보통이다. 관서지방에서는 1월 15일에 치우고, 미에현(三重縣 伊勢志摩) 같은 지방에서는 1년 내내 장식하는 곳도 있는 등 곳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 일본 연말연시를 꾸미는 시메카자리(注連飾り 또한 연말장식으로 카도마츠(門松)도 빼놓을 수 없는데 이것은 12월 13일에서 28일 사이에 집 앞이나 상가 앞에 세워두고 치우는 것은 1월 15일 전후다. 시메카자리나 카도마츠의 설치와 치우기는 가능하면 지정 된 날에 맞추는 게 좋으며 이를 어기면 복이 반감된다고 믿고 있다. 카도마츠는 일본의 고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 전인 9세기 초에 만들어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설화집이 있는데 그 이름은 《일본국현보선악영이기(日本國現報善惡靈異記》다.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한국에 번역되어 나온 《일본국현보선악영이기(日本國現報善惡靈異記》 나라(奈良)지방의 한 마을에 다데하라도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에는 영험한 약사여래불이 있었다. 때마침 이 마을에는 눈먼 과부가 어린 딸 하나를 데리고 살고 있었는데 이 모녀는 생활이 너무나 어려워 끼니를 잇기조차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모녀는 그대로 앉아서 죽느니 약사여래불에 가서 기도라도 드리다 죽을 요량으로 어린 딸을 데리고 절로 향했다. 그러나 남루한 행색으로 약사여래불당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절집 앞에서 하염없이 기도를 할뿐이었다. 제 목숨은 아깝지 않으나 제 딸아이의 목숨이 안타깝습니다. 한꺼번에 두 명이 죽을 지경이니 바라옵건대 제 눈을 뜨게 해주시옵소서.라고 빌었다. 여자는 절박한 마음으로 약사여래불이 있는 절을 향해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그때 절에서 이 모습을 보던 관리인이 나와 이 모녀를 약사여래불상으로 안내하였고 이들은 더욱 열심히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