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외증손녀인 오영숙 인사 올립니다. 오늘 저는 100년 편지 청탁을 받고,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러 대전 국립현충원을 방문하기로 하였습니다. 가을비가 촉촉하게 내린 늦가을에 할아버지를 만날 생각에 괜히 마음이 설레더군요. 현충원에는 일제의 압제에서도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애쓰신 애국지사 묘역부터 625전쟁 영웅들과 분단국의 아픔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천안함 폭침 희생자 묘역까지 우리나라의 안타까운 근현대사의 현장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묘역에 묻히신 분들은 모두 애국애족의 나라 사랑 정신으로 불같이 뜨겁게 살다 가신 호국 영령들이었습니다. 백합꽃 한 아름과 태극기를 할아버지 묘역에 꽂고 절을 올리고 나자 할아버지께서 저를 반겨주시는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먹먹하여 한참을 할아버지 비문만을 바라보았습니다. 비문에는 이조판서 예안 김백암 선생의 11대손으로 망국 조약 륵결에 비분강개하여 통정대부승정원비서승 벼슬도 버렸고 국치를 당하자 항일독립 전선에 신명 바쳐 싸우셨네. 노백린 장군이 보낸 모금 위임장에 따라 군자금 조달하다 옥고 2년 또 5년 치르며 모진 고문 다 견디고 순국하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형장의 이슬로 순국한 강우규 의사 이윤옥 단두대에 홀로서니 춘풍이 감돈다던 임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봄바람이 불었으리오 별헤는 밤 북간도에서 부르짖은 독립의 외침 해삼위 한인촌서 꽃피우고 조선총독 사이토 처단으로 예순여섯 해 삶 서대문형무소서 마치던 날 흩뿌리던 눈송이는 임의 혼백이어라. *해삼위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의 중국어 표기.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이는 1920년 11월 29일 강우규 의사가 사형을 앞두고 대한의 청년들에게 남긴 유언이다. 강우규 의사는 65살의 고령의 나이에 폭탄의거로 95년 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의 길을 걸었다. 강우규 의사는 지금으로부터 96년 전인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남대문역(서울역)에 도착한 사이토마코토 총독을 향해 힘차게 폭탄을 던졌다. 강 의사는 왜 젊은 사람들도 선뜻 나서기 어려운 폭탄의거에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문창범 [1870~(1938)] 선생은 함경북도 경원 출신으로 어려서 부모를 따라 러시아로 이주하여 재력가로 자수성가한 인물로 연해주 지역 교육 및 언론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권업회가 조직되자 우수리스크지회 대표로 활약하였으며, 당시 해외 독립운동을 이끌던 독립운동가 39인과 함께 만주 길림에서 배포된 일명 무오독립선언서로 알려진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1917년 전로한족회중앙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어 러시아 지역 귀화인과 비 귀화인 등 한인사회 결집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기관지인 한국어 신문, 청구신보를 간행하였다. 1919년 1월 선생은 러시아 니코리스크에서 한족회대회를 개최하고 한인 2백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내를 행진하였으나 주둔 일본군에 의해 해산 당하였다. 문창범 선생의 유일한 사진 1919년 2월 니코리스크에서 러시아, 간도 및 국내 대표들이 참석한 전로국내조선인회의를 개최하여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확대 개편한 대한국민의회를 창설하였다. 선생은 임시정부의 성격을 띤 최초의 조직인 대한국민의회 의장에 취임하였다. 1919년 3월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2만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예전에 한국인들은 날씨가 추워지면 따뜻한 온돌방 아랫목에서 한 겨울을 보냈다. 지금은 보일러가 보급되어 거의 온돌이 사라졌지만 과거 한국인의 겨울철 난방은 뭐니 뭐니 해도 뜨끈뜨끈하게 불 땐 아랫목이었다. 글쓴이의 어린 시절만 해도 아랫목은 겨울철 온 식구가 모여 오순도순 보내던 곳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사정은 어떠한가? 일본은 우리처럼 온돌문화가 아니라 다다미 문화다. 다다미란 돗자리 문화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따라서 겨울철이 되면 방안이 춥다. 이러한 추위를 견디기 위해 고다츠(こたつ, 火燵炬燵)라는 난방기구가 생겨났다. 요즈음은 전기 고다츠가 주종을 이루지만 예전에는 숯불이 쓰였다. 고다츠를 보지 못한 사람에게 가장 쉽게 설명한다면 난로를 사각 나무판으로 덥고 그 위에 이불을 덮어씌워 놓은 형태로 발을 이불속에 넣는 구조이다. 고다츠는 밥을 먹을 때는 식탁이요, 아이들이 공부를 할 때는 책상으로 쓰고 차를 마실 때는 차탁으로 쓰는 등 용도에 따라 다양하게 쓰이지만 기본적으로 발을 고다츠 속에 넣어 보온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 일본 겨울의 필수품이라고 선전하는 난방기구 고다츠(こた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즈믄해를 몰고 온 바람 소리 고마부에(高麗笛) 타고가슴을 파고드는 밤 꺼진 듯 사라진 고구려 혼레이가쿠샤 손끝에서 다시 부활한 날 동대사 대불전 앞 고구려 고승들깊은 시름 딛고다시 돌아올 고구려 영광되새겼으리. - 이한꽃 고마부에(高麗笛)- *고마부에(高麗笛) : 고구려피리*레이가쿠샤(伶楽舎): 일본아악을 연주하는 단체로 1985년 결성 *동대사 대불전: 752년 개안 공양 ▲ 續日本紀 731년 7월 29일자 기록. 아악료(雅樂寮)에 소속하는 악생(樂生)의 정원은 대당악 39명, 백제악 26명, 고구려악8명, 신라락 4명, 탐라악 62명이라고 나와 있다.. .. 그랬다. 즈문해를 몰고 온 바람 소리가 국립국악원 우면당을 가득 메운 밤이었다. 모든 근심과 걱정을 잠재운 천년의 소리 고마부에(高麗笛)는 그렇게 시공간을 넘나들며 관중들을 매료 시켰다. 18일(수)저녁 8시,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는 아주 특별한 공연이 있었다. 아악, 한일 영혼의 울림 특별공연이 그것이다. 국립국악원이 한일 양국의 국교정상화 50주년을 기념하여 아악(雅樂)을 주제로 한 공연을 마련한 자리에 기자가 청중으로 참석한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1924년 1월 김지섭 선생의 도쿄 의거는침체의 늪에 빠져 있던 독립운동계에 활기를 주었다. 이어서 5월 19일 이의준 선생을 비롯한 참의부독립군 결사대가 압록강을 따라 국경을 순시 중이던 사이토 총독을 기습, 공격하는 쾌거를 이룸으로써 독립운동계에 일대 활기를 불어넣었다. 이 같은 저격 작전을 주도한 선생의 출생과 성장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재판기록에 나타나는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선생의 본적은 평안북도 위원군(渭原郡) 밀산면(密山面) 송주동(松奏洞)이고, 태어난 해는 1893년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선생은 만주에서 대한통의부와 참의부에 소속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할 때 이병준(李秉俊), 한권웅(韓權雄) 등의 이명(異名)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특히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재판 당시 재판장이 선생을 부르자, 언권의 자유를 주지 않으면 공술을 거절한다고 강경히 주장하던 육척 장신에 검은 얼굴의 선생이 나서자 입추의 여지도 없이 들어앉은 방청석에서는 삼국지에서 본 장비(張飛)와 같다고 속삭였다고 하는 기사가 선생에 대한 인상을 간접적으로 전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로 볼 때 선생은 매우 건장한 체격에 의지가 굳은 그야말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일본에서는 가업을 대대로 이어오는 가게들이 많은데 이를 일컬어 시니세(老鋪)라고 한다. 글자 그대로 오래된 가게라는 뜻이다. 이러한 시니세에는 백화점도 있고 된장가게도 있으며 기모노 같은 옷가게는 물론이고 오래된 여관이나 과자점도 있다. 무엇이든 자기 대에서 끝나지 않고 대를 이어 가는 가게라면 시니세인 것이다. 따라서 그 지방의 전통 있는 물건이나 먹거리 따위를 찾는 사람들은 그 고장의 시니세를 찾으면 어느 정도 목적을 달성 할 수 있을 것이다. 품질은 기본이고 무엇보다도 신용을 목숨처럼 여기는 시니세는 시대에 유행하는 세련된 장식이나 점포 분위기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어딘가 모르는 안정된 모습 속에서 정감어린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딱히 시니세가 100년이라든가 몇 백 년이어야 하는 조건은 없지만 그래도 100년은 되어야 시니세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는 창업 100년 이상의 기업이 21,000개나 있다. 200년 이상의 기업은 3,000개가 있다고 한다. 주로 이러한 시니세 가게는 술과 전통과자점, 옷가게 따위의 전통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 20세기 초의 건설회사 금강조 회사 직원들 한 조사에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순 국 이윤옥 이국땅 하얼빈 천지를 뒤흔든 안의사 을미년 변란을 막지 못했다며 스무나흘 단식 끝에 절명한 향산 아우내장터와 화대장터의 만세 함성 관순과 풍신 안사람 모은 의병대장 윤희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던 시인 ... 살아 이름 구걸치 않고 조국 위해 바친 목숨 목숨 목숨들 오늘 순국선열의 날 옷깃 여미며 그 이름 석자라도 기억하는 우리 되게 하소서. ▲ 김미경 화가가 순국선열을 생각하며 그린 통곡의 나무 오늘은 제 76회 순국선열의 날이자 105년전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해이다. 누구라도 목숨은 둘이 아니요 애오라지 하나다. 그러한 소중한 목숨을 오직 한 가지 목적인 구국의 일념 으로 버린 선열들에 대한 뜨거운 존경심은 365일 기려도 부족하다. 대한민국에 수많은 국경일과 기념일이 있지만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 만큼이나 값진 날도 다시 없을 것이다. 이 날을 맞아 국내외에서 뜻 깊은 기념식이 열린다. 서울 서대문구 독립공원내 순국선열 현충사(독립관)에서도 제 76주년 순국선열, 애국지사 영령추모제가 열린다.하던 일을 멈추고 우리 곁에서 온전한 나라를 꿈꾸던 선열들의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송계백(宋繼白, 1896~1920)선생은 1896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출생하여 성장하였다. 선생이 성장하던 시기는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러시아와 일제가 각축을 벌이던 때였다. 그리고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일련의 침략 조약을 강요하면서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시기였다. 따라서 국망의 상황을 목격하면서 성장한 선생은 강렬한 애국심과 민족애도 함께 키워갔던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상경하여1911년 보성중학에 입학하였고, 재학 중에 이후 독립운동을 함께 전개할 선배와 동지를 만나게 되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천도교에 입교한 뒤 보성중학의 교장으로 있던(그때까지는 변절하지 않았던) 최린이었고, 또 1기 선배인 현상윤과 1기 후배인 최승만 등이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이들은 모두 선생과 함께 2.8독립운동, 그리고 3.1운동의 계획과 추진 과정에서 서로 연락을 취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그 기반은 이 때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보성중학 졸업 후 선생은 곧 서울 기독교청년회(ymca)학관 영어과에 편입하여 수학하였다. 그리고 1916년 3월 이 학관을 수료한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다시 태어나기 어려운 세상에 / 다행히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서/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가니 / 청산이 비웃고 녹수도 빈정거리는구나. 이는 사형집행을 앞둔 박상진 의사의 절명시다. 박상진 의사는 사나이로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고 했지만 그는 조국 독립을 이루는데 튼튼한 초석을 놓은 분이다. 박상진 의사는 누구보다도 조국을 사랑했고 독립운동의 공이 혁혁한 분이지만 그의 이름 석자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박상진 의사를 재 조명하는 창작 오페라 공연이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선보여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독립운동가 박상진 의사는 울산에서 태어나일찍이 한학을 수학하고 1902년에는 허 위(許蔿) 선생으로 부터 학문적 수업을 쌓았다. 그뒤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양정의숙(養正義塾)에서 법률과 경제를 전공했다.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한 그는 평양법원에 발령을 받았으나 사퇴하고 1911년 만주로 건너가 허 겸(許兼)손일민(孫逸民)김대락(金大洛)이상용(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의 지사들과 교류하며 독립투쟁에 헌신했다. 1912년 귀국한 그는 대구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독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