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시치고상(七五三)이란 어린 자녀에게 일본 전통 옷인 기모노를 입혀 신사참배하는 것을 보통 일컫지만 최근에는 가족사진만을 찍는 집도 늘고 있다 이는 11월 7일 일본 잡지 러닝파크(ラニングパク)에서 소개한 말이다. 일본에는 우리나라처럼 아이들 돌잔치라는 게 없다. 하지만 남자 아이는 3살과 5살 그리고 여자 아이는 5살과 7살 되는 해를 맞이하여 부모님을 비롯한 일가친척과 함께 신사참배를 하는 습관이 있다. 당신은 아이의 시치고상 준비를 하고 있느냐?라는 질문에 61퍼센트가 그렇다고 답했다. 물론 여기서 그렇다고 한 것은 아이에게 일본 전통 옷을 입혀 신사참배를 한다는 뜻이다. 61퍼센트 외에 18퍼센트는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시치고상을 하긴 할 것이라고 했고 21 퍼센트만이 별다른 계획이 없다고 했다. 말하자면 79퍼센트가 시치고상을 어떤 식으로든지 치루겠다는 이야기다. 시치고상에 해당하는 나이의 자녀가 있는 부모에게 던진 이날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답 1위는 사진관에서 기념촬영을 하겠다.라는 답이 단연 1위였다. 아이가 태어나면 돌잔치를 하는 한국에서는 돌잔치 사진이 중요하듯 일본 부모들은 기모노를 입힌 귀여운 아이의 사진을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유인석 선생은1842년 1월 27일 강원도 춘천 남면 가정(柯亭)에서 태어났는데 가정리는 고흥 유씨 일족의 집성촌(集姓村)이었다. 14세 때 양평의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에게 글을 배웠는데 1868년 화서가 별세한 뒤 중암 김평묵(金平)과 종숙인 성재 유중교(省齋 柳重敎)를 스승으로 모시며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 화서의 문하에서 의병장이 가장 많아 나왔는데,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유중교김평묵의암 유인석 등이 그 정신을 이어받은 당대의 석학들이었으며, 위정척사 사상을 실천에 옮긴이가 의암으로서 병자조약에 반대 상소를 올린 바도 있었다. ▲ 유인석 의병장 1895년 8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거사할 마음을 굳히고 11월 28일 문인인 이필희(李弼熙)서상렬(徐相烈)이춘영(李春永)안승우(安承禹) 등의 의병진에 격려의 글을 보냈다. 당시 의암은 상중에 있었기 때문에 가정리에서 여막(蘆幕)을 지키고 있었다. 이른바 제천(堤川) 의진의 예하 부대들이 제천으로 진군, 양근(陽根)지평(砥平)원주(原州)제천(堤川)에 이르는 일대의 의병이 모두 제천에 집결하게 되어 대부대를 형성하였다. 이렇게 대규모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에는 죠카마치(城下町)라는 이름의 도시가 번성했는데 죠카마치란 말 그대로 성주가 살던 성(城)과 관련 있는 도시다. 아먀구치현 하기시나 기후현의 다카야마시 같은 곳이 죠카마치(城下町)의 대표적인 도시지만 현재 인구 10만 이상의 도시 절반이 죠카마치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죠카마치는 역사가 깃들어 있는 고장이다. 헤이안시대(794-1192) 이후 무사정권 시대의 긴 역사를 가진 일본의 성(城)은 성주를 중심으로 한 절대 권력의 중심지다. 하늘만큼 높이 쌓아 올린 성곽의 높이가 성주의 권력을 대변해주는 것이라도 되는 양 오늘날 남아 있는 성들은 그 규모가 매우 크다. ▲ 효고현의 다츠노성을 중심으로 한 죠카마치(城下町) 풍신수길의 오사카성도 규모면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큰 곳이다. 오사카 성은 성곽의 돌덩이 하나만도 사람 키의 몇 배에 달할 만큼 규모가 크다. 일본의 제2도시 오사카도 오사카성을 중심으로 죠카마치(城下町)의 하나로 출발 했던 것이다. 물론 에도성을 중심으로 했던 곳이 지금의 동경이다. 일본에서 조용한 역사의 고장을 찾고자 한다면 이 죠카마치를 중심으로 찾아 가보면 뜻밖에 좋은 곳을 만나게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저는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자주 갑니다. 전시실 중앙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문화재가 있습니다. 긴 중앙홀 안쪽 끝에 우뚝 서 있는 국보 86호 경천사지 10층 석탑(고려 1348년, 높이 13.5m). 아름답고 독특한 석탑을 볼 때마다 저는 벽안의 이방인 호머 헐버트(18631949)가 떠오릅니다. 헐버트는 미국인입니다. 지금(2015년)으로부터 약 130년 전인 1886년, 23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 땅을 밟은 선교사였지요. 그런데 한국에서 그의 삶은 선교사 그 이상이었습니다. 고종 황제의 외교 고문으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분이었기 때문이지요. ▲ 경천사지 10층 석탑 어느 순간 헐버트를 조금씩 조금씩 알게 되었지만, 그에게 푹 빠지게 된 것은 아마도 경천사지 10층 석탑에 얽힌 사연을 알게 되면서부터일 겁니다. 이 탑은 원래 경기도 개풍군(현재 북한 개성시) 부소산의 경천사에 있었습니다. 고려의 수도 개성을 대표하는 멋진 탑이었지요. 그 이국적인 풍모 덕분에 이 탑은 당시 개성의 명물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1907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터졌습니다. 당시 한국을 방문한 일본의 대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이설 [1850~1906] 선생은 충남 홍성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남당 한원진의 학통을 잇는 이돈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문과에 급제하고 사간원 정언과 교리를 비롯하여 동부승지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 계속하여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그때마다 상소를 올려 정국의 문제점과 방향을 비판적으로 지적하였다. 선생을 비롯한 홍주지역 유생들의 사상은 위정척사론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의 위정척사론은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에 따라 척사의 대상을 달리하였다. 초기에는 소중화를 지키고 사학을 물리쳐야 한다는 위소중화衛小中華 척사학斥邪學의 이론을 형성하였으나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항복조약이라고 통박하면서 척왜론을 주장하였다. 1894년 갑오변란에 즈음하여 척왜론은 일본과의 결전을 감행하자는 대일항전론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선생의 위정척사론은 의병투쟁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선생은 1894년 갑오변란에 사직하고 낙향한 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홍주의병에 참여하였으나 반역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김복한과 함께 상경하여 매국적을 처단하고 일본과의 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사슴 뛰노는 절 천년고찰 동대사에 놀러가는 이웃들 오사카 나라 교토 묶어 3박4일 무얼 보고 올까? 동대사를 세운 백제 행기스님 초대 주지 백제 양변 스님 여기서 처음으로 일본 화엄종 강설을 한 신라 심상대덕 ... 우리가 미처 챙기지 못한 세월 속 고승들의 발자취는 지워지고 지금 사람들 단풍든 고찰에 뛰어노는 사슴 쫓아 사진 찍기 바쁘다 ▲ 동대사 사슴은 사람들에게 먹이를 달라고 아양을 부린다. 정말 그렇다. 동대사는 나라시대 일본 최고의 절이자 현재도 천년 고찰로 그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다. 요즈음 한국에서는 오사카, 교토, 나라 이렇게 3도시를 엮어 3박 4일 코스로 떠나는 여행 상품이 즐비하다. 오사카만 해도 비행기로 한 시간 반이다 보니 바로 이웃집 드나들듯이 훌쩍 다녀오는 사람도 늘고 있다. 동대사는 나라공원 안에 있어 사슴이 한가로이 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관광객이 다가서면 사슴이 달려와서 먹이를 달라고 아양을 부려 인기 만점의 절이기도 하다. 동대사(東大寺, 도다이지)는 나라현 나라시 조우시쵸 (奈良市司町)에 있는 천년 고찰로 1300여년이라는 긴 시간 속에서도 일본 불교의 원형을 지금껏 고이 간직하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신언준 선생(申彦俊, 1904. 11. 8~1938. 1. 20)은 1904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부친 신정균과 모친 송씨(宋氏)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호는 은암(隱岩)이다. 선생은 어려서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한 뒤, 1918년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그런데 오산학교는 한말 상공업에 종사하여 크게 성공한 이승훈이 설립한 신민회 계열의 민족학교로 평양의 대성학교와 더불어 서북지역의 민족운동자들의 근거지였다. 때문에 1911년 초 일제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 인사들을 탄압할 때 오산학교와 대성학교는 그 주된 표적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 때 대성학교는 폐교되었고, 오산중학교는 교주인 이승훈이 피검되어 폐교의 위기를 맞기도 하였던 서북지역 민족교육의 본산이자 민족운동의 요람이었다. 더구나 이승훈은 출옥 후 기독교측 대표로 일제하 최대의 민족 독립운동인 3.1운동의 불꽃을 지핀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으로 활약하였다. ▲ 신언준 선생 이에 영향을 받은 오산학교의 교사들과 학생들 또한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타오르던 시기인 1919년 3월 31일 태극기를 앞세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우지차를 마시며 지인이 주고 간 말차를 연거푸 대솔로 저어보지만 녹지 않고 남는 알갱이는 어쩔 수 없다 가루라고 다 물에 녹는 건 아니다 명차의 고장 우지는 일본인에게 평등원의 추억이 크겠지만 내게 우지는 우토로의 슬픔이 크다 더러운 골목 양철지붕 안 툇마루에 쪼그리고 앉은 주름 가득한 할매 손잡은 내게 아지매 아지매하고 따라나선다 고향이 경상도였을까? 두 살 때 강제 연행된 아버지를 따라 나선 걸까? 사라진 기억 속에 맴도는건 무엇일까? 유네스코에 빛나는 역사의 고장 명차로 유명한 우지에는 버려진 내 동포가 사는 곳 우토로 마을이 있다 일본의 우지 (宇治)는 천년고도 교토 가까이에 있는 도시로 차(茶)로 유명하다. 또한 일본인이 자랑하는 무라사키시키부가 지은 겐지이야기의 무대이자 일본 최고의 아름다운 건축물인 평등원(平等院)이 있는 이름난 곳이다. 바로 그 근처에 일제강점기 강제 연행되어 힘겹게 살아가는 내 동포들의 마을 우토로가 있다. 이곳 우토로 마을에 조선인이 살기 시작한 것은 1941년 무렵부터다. 일제는 태평양 전쟁 중 교토 군비행장 건설을 기획했는데 이때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이 함바(노동자 합숙하던 임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천년고도 교토의 3대 마츠리라고 하면 5월 15일의 아오이마츠리 (葵祭), 7월 17일의 기온마츠리 (祇園祭), 10월 22일의 지다이마츠리(時代祭)를 꼽는다. 오래된 순서를 꼽으라면 아오이마츠리 (567년), 기온마츠리( 863년), 지다이마츠리(1895년) 순으로 꼽을 수 있다. 성격으로 따지자면 아오이마츠리는 궁정에서 시작한 마츠리(국가의 제사 형식)로 볼 수 있고 기온마츠리는 서민(전염병 퇴치의 제사)층에서 향수하던 마츠리다. 내일 10월 22일에 열리는 지다이마츠리는 명치정부가 교토 천도(헤이안 천도, 794년) 1100년째를 기념하여 명치28(1895)년에 새로 시작한 마츠리다. 명치정부는 교토 천도 당시의 환무왕(桓武天皇)을 모시기 위한 사당으로 헤이안신궁(平安神宮)을 만들고 그해 10월 22일부터 10월 24일에 걸쳐서 성대한 마츠리를 거행했는데 올해로 120년을 맞이한다. ▲ 10월 22일 열리는 지다이 마츠리의 한 장면 지다이마츠리에 등장하는 사람이나 도구, 행렬 시간 등을 따지자면 7월의 기온마츠리(祇園祭)가 가장 성대하지만 5월의 아오이마츠리(葵祭)나 10월22일의 지다이마츠리(時代祭)도 꽤 볼만하다. 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아사삭, 아사삭. 붉게 익은 대추를 입안에 넣고 씹어 보니 그 단맛이 입안에 쏴하니 퍼진다. 생대추가 이렇게 달콤할 수 있을까? 사과나 배에 견줄 수 없는 단맛의 대추를 맛보러 몰려든 것인지 2015 보은대추축제장에는 몰려든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인산인해다. 보은은 예로부터 왕실에 진상하는 대추의 명산지로 세종실록 지리지 충청도 청주목 보은현 편에도 그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토공(土貢)은 꿀밀[黃蠟]느타리석이종이칠지초대추족제비털호도잣[松子]노루가죽삵괭이가죽이요, 약재는 연꽃술인삼오가피백복령승검초뿌리[當歸]수뤼나물[葳靈仙]북나무진[安息香]이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보은 생대추 보은군이 주최하고 보은대추축제추진위원회가 주관하는 2015 보은대추축제는 10월 16일(금)부터 25일(일)까지 보은 뱃들공원 주변에서 열리며, 수안면, 내북면 등 관내 11개 읍면에서 출품한 질 좋은 대추와 보은 지역의 농수산물을 값싸게 살 수 있는 대규모 장터가 마련되어 있다. 뱃들공원 천변에는 각 고을단위의 판매 부스가 끝이 안보일 정도로 마련되어 있으며 대추 굵기에 따라 다르지만 생대추는 1만원~2만 원선, 건대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