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곽재기[18931952] 선생은 충북 청주사람으로 일찍이 서울에 올라와 경신학교(儆新學校)를 졸업하고 청주 청남학교(靑南學校) 교사를 지내며 1909년 청소년으로 조직한 비밀단체인 대동청년당(大同靑年黨)의 당원이 되어 80여 당원과 더불어 국내외에서 독립을 위한 지하공작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시위운동에 적극 참가하였으며, 같은 해 7월 황상규(黃尙奎)윤소룡(尹小龍)김기득(金奇得) 등과 함께 만주 길림성 동녕현(東寧縣) 소수분(小綏芬)으로 건너가 이성우(李成宇)외 여러 동지와 알게 되면서 동년 11월 9일 김원봉(金元鳳)이성우(李成宇)강세우(姜世宇)이종암(李鍾岩)한봉근(韓鳳根)한봉인(韓鳳仁)김상윤(金相潤)신철휴(申喆休)배동선(裵東宣)서상락(徐相洛) 등과 일제의 관리밀정관공서 등을 주살파괴함으로써 항일정신을 고취하고 무력으로써 독립을 쟁취하려는 강력한 비밀결사인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였다. ▲ 곽재기 선생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경성일보사(京城日報社) 등을 파괴하여 전국의 인심을 자극하기로 결정하고 황상규(黃尙奎)는 먼저 길림(吉林)에서 폭탄의 제조방법을 배우고 그는 김기득(金奇得)과 함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10월 15일은 조선신궁 진좌제(신을 맞아들이는 행사)의 날이다. 내지인(일본인)도 조선인도 속속 돌계단을 오른다. 그러나 배전(신전)의 앞까지 가자 내지인은 모자를 벗고 절을 하고 조선인은 휙 발길을 돌려 돌아갔다. 단 한사람의 조선인도 참배하는 자는 없었다. 《해외신사사》, (1953, 小笠原省 지음) 그런데도 《조선과 건축, 1925.11》에는 조선인이 조선신궁의 건립을 매우 기뻐하며 반긴 듯이 적고 있다. 반도 1,700만 백성의 수호신인 조선신궁은 경치가 뛰어난 남산 허리에 신성한 땅을 골라 어진제가 감행된다. 우리 반도 주민은 기뻐 춤추는 것을 그칠 수가 없으며 이것은 조선 병합의 뜻과 더불어 역사상 가장 고운 빛깔을 더하는 것이다. 설마 조선인이 일본의 신을 모시는 신사 건립에 두 손을 들어 환영했을까? 만일 그런 자가 있다면 그는 친일파거나 민족 반역자였을 것이다. 훗날 친일문학가로 전향한 김기진(19031985)조차도 지금 나의 불평과 울분의 궁극의 도착지는 다만 한곳 밖에는 없다. 모든 것이 밉다. 남산 위로 자동차가 다니게 되었다. 나는 남산이 밉다. 남산이 미워서 못 견디겠다. 고 했을 정도다. 그만큼 남산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철없이 떠나온 야마나시의 청년 조선땅에 첫발 디디던 날 흰 옷 입은 식민지 백성들 따뜻이 맞이했지 백자에 밥을 담아 먹고 백자에 김치를 담아 먹고 백자에 막걸리를 마시는 백자의 나라 제국주의 일본이 최고인줄 알던 스무살 청년 오천년 조선의 역사와 백자를 무시로 쓰는 높은 문화에 그만 빠져 든 세월 조선옷을 입고 조선의 문화를 사랑하다 조선에 묻힌 희고 맑은 영혼 망우리에서 영원히 잠들다 <이윤옥 시, ‘아사카와 타쿠미’> ▲ 아사카와 다쿠미 영화 <백자의 사람>, 다쿠미 생전 모습(오른쪽) 일본 야마나시현 출신으로 조선 문예운동에 힘썼던 아사카와 타쿠미(淺川巧, 1891∼1931)의 무덤이 깨끗한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몇 해 전 찾은 망우리 무덤에는 잔디도 많이 벗겨져 안타까웠었는데 말이다. 서울시가 시립승화원을 통해 지난 9월부터 망우리공원묘지 안에 있는 아사카와 타쿠미의 무덤에 잔디를 새로 심고 계단석도 새로 정비했다니 모처럼 칭찬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를 계기로 일본 야마나시현 호쿠토시 시라쿠라 마사시(白倉政司) 시장 등 '아사카와(淺川) 형제 추모회' 관계자 30여명이 지난 10월 2일 방한했다. 아사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의 패망은 재일조선인들에게는 민족의 긍지를 되찾는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는 계기였습니다. 일본 각지에서 조선인들은 아이들에게 조선말과 모국의 역사, 전통, 풍습, 예절을 가르치기 위해 조선학교를 세웠지요. 한때 일본 내에 조선학교는 500여 곳이 있었는데 이는 조선인들의 돈과 땀으로 일궈낸 것이었으나 일본정부는 강제로 학교 폐쇄를 하고 탄압을 가해 왔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일에 대해 우리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해야 합니다. 지금도 계속되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탄압에 대해 우리 고려박물관은 당당히 맞서 재일조선인의 권익을 위해 싸워 나갈 것입니다. 재일조선인의 풍부한 민족교육을 지키는 것은 일본인의 중요한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라다 쿄오코 씨(原田京子, 일본 고려박물관 이사장)는 유창한 한국말로특별전 인사말을 시작했다. 이는 어제 6일 오후 3시, 건국대학교 상허기념도서관 특별 전시장 개막식에서 한 인사말이다. 상허 특별 전시장에서는 아주 특별한 전시회 개막식이 있었는데 재일(在日)의 민족교육을 묻다(광복 70주년 기념 일본 고려박불관 초청 특별기획전 및 기념 포럼)라는 주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정정화 선생님, 한 말씀만 해 주소서!! ▲ 정정화 여사_상하이 시절 아들 후동(자동)과 함께 1920년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위해 10여년간 모금활동을 하셨다는 기록을 보고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모금은 마음을 사는 일인데, 이미 100년 전에 하셨던 모금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음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박원순시장님의 선거1, 2기를 치르며 후원회에서의 활동이 생각납니다. 구국은 위정자들만의 책무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제야 깨달음은 각자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행동이 구국임을 알아갑니다. 그래서 소시민인 저의 삶과 실천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정정화 선생님, 선생님이 곁에 계시면 어떤 해법을 주실까요? 저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4월 16일 주간입니다. 세월호 1주기를 추모 하느라 광화문은 통곡 하고 있습니다. 18일 토요일과 19일 일요일에는 대답 없는 국가의 답을 듣고자 우중에도 많은 시민이 나와 노란바다를 이루었습니다. 딱 1년 전 수학여행을 다녀오겠다고 새신을 신고, 새 가방을 둘러메고 나간 아이들이 295명 사망, 9명이 실종 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기울어져 가라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동우 이탁(東愚 李鐸, 1889-1930) 선생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이탁 선생은 평남 평원 출신으로 1908년 평양 대성학교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지도를 받았다. 1910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강습소 설립에 참여하였으며, 1913년 만주 일신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1914년 신흥무관학교 경영에도 참여하였다. ▲ 이탁 선생 1919년 매국 7적을 응징할 목적으로 27결사대를 결성하여 서울로 잠입하였다. 1920년 대한청년단연합회 대표로 임시정부에 파견되었으며, 서간도지역 임시정부 군사기구인 광복군총사령부 참모장과 임시정부 동삼성외교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20년 7월 미국 의원단 내한 때 3개 결사대를 국내로 파견하여 일제 통치기관을 파괴토록 하였다. 1921년 상해에서 한중국민호조사를 조직해 문서과 부주임으로 활동하였다. 8월에는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 서무간사로 선임되었고, 시사책진회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1922년 상해 대한적십자사 감사로 선임된 후 국민대표주비회(國民代表會籌備會)가 조직되자 서기로 임명되어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19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건국대 아시아디아스포라연구소(소장 신인섭 교수)에서는 10월 6일부터 16일까지 건국대 상허기념도서관에서 광복 70주년 기념 일본 고려박물관 초청 특별기획전 : 재일의 민족교육을 묻다!를 연다. 재외동포재단과 건국대학교가 후원하는 이번 전시회에서는 일본에 있는 조선학교의 민족교육에 관한 자료, 식민지하에서부터 국제화시대에 이르는 역사적 기억을 묻는다. 또한 이 전시회에서는 일본 내에서 공생을 위해 실시된 한국인의 다양한 투쟁지원연대, 그리고 미래를 향한 다문화 교육 등에 대한 자료 등을 사진과 함께 전시한다. 동시에 개막일인 6일에는, 야마다 사다오(山田貞夫, 전 고려박물관 이사장) 씨, 하라다 교코(原田京子, 현 고려박물관 이사장) 씨, 일본의 민족교육 그룹 관계자들과 한국 연구자들이 모여 특별 기념 포럼을 연다. 일본의 아베수상은 지난 9월 19일 전쟁 할 수 있는 나라로 대변되는 집단자위권법(일본에서는 안보관련법이라함) 법안을 통과 시켜 침략의 고통을 겪은 한국과 아시아 여러나라로 부터 심한 질타를 받고 있다. 이 법안은 말로는 평화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언제든지 군대를 파견하여 무력을 맘대로 행사하겠다는 취지다.제
[한국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최근 페루 남성에 의한 살인 사건보도에서 일본에서 외국출신자들의 범죄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는 니샨타 씨는 스리랑카인으로 일본에 유학 와서 교수가 된 사람이다. 사회학자이자 방송인이기도 한 그는 아예 국적을 일본으로 바꾼 사람으로 하고로모국제대학(羽衣國際大學)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다문화 사회에서 서로 돕고 힘을 모아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가야하는 판국에 일본 언론이 가세하여 마이너스 보도를 할 때 마다 니샨타 씨는 화가 난다고 했다. 이번 페루 남성이 저지른 살인사건 보도만 해도 구태여 국적을 페루라고 밝힐 이유가 뭐냐는 질책이다. 뉴스 시간마다 페루인의 살인사건이 보도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페루 사람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갖게 된다는 점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번 살인사건을 저지른 사람이 페루 사람이 아니라 일본계 페루인이라는 점이다. 니샨타 씨는 이번 용의자가 일본 국적을 갖고 있는 일본계 페루인 임에도 페루 남성 이라고 하는 바람에 5만 명이나 되는 일본에 사는 페루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 《일본에서 알게 된 행복의 값》의 저자인 니샨타 교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김경천 [18881942] 선생은 만주와 노령에서 독립군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던 중 1919년 동경에서 28독립선언이 있자 민족적 책무를 자각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여 마침내 1919년 6월 6일 이청천과 함께 만주로의 망명을 단행하였다. 만주로 망명한 후 신의주 대안 안동현(安東縣)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8월 총재인 안병찬(安秉瓚)의 체포로 인하여 대한독립청년단에서의 활동도 크게 위축되었다. 이에 김경천은 보다 효율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서간도 유하현(柳河縣)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그후 대일무장투쟁에 필요한 무기구입을 위해 북간도를 경유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으나 그곳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인하여 일본군의 감시와 조선인 체포로 인하여 활동을 전개하기 어려웠다. 이에 산림지대인 수청지역으로 이동하여 산림속에 일단 피신하였다. 그런데 당시 수청지역도 일본의 조정을 받는 중국계 마적들이 수시로 출몰하여 한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에 곤궁에 처해있는 재러동포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 1888-1939) 선생은 일제시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사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선생은 1920-30년대에 중등학교나 신문사에 적을 두고, 주로 신문과 잡지에 계몽성 짙은 역사 관련 글을 많이 발표하였다. 선생은 1995년 독립장이 추서된 독립운동가이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호암 선생은 1910년대 중국 관내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징역 8개월의 실형을 받았고, 또 1920년대 후반에는 신간회(新幹會)와 조선물산장려회에도 참여한 바 있다. 1920~30년대 선생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깊고 다양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선생은 우리말과 역사를 억압하던 식민지 현실에서 우리 역사의 대중화를 시도하였는데,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이었다. 선생의 생애와 학문 또는 저술에 관해서는 그간 자주 논의되어 왔으나, 독립운동가로서의 모습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 부분을 강조하며 선생의 생애를 소개하고, 학문도 언급하고자 한다. ▲ 역사학자요 독립운동가인 문일평 선생 1888년(고종 25) 5월 15일, 압록강 가까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