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한국광복군 제1지대장 이준식(李俊植) 선생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으로 건너가 1921년 중국 곤명에 위치한 운남강무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만주 대한통의부에 가입해 항일무력 세력을 재정비하는 등 활발히 활동한 결과, 1924년 정의부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1927년 오동진이 일제에 체포되자 그 후임으로 정의부 군사위원장에 임명되었다. ▲ 제1지대장 이준식 지대장 1928년 만주지역 3부가 통합해 조직된 국민부의 군사위원장에 선임되었고, 1929년에는 국민부의 민족유일당으로 조선혁명당이 창설되자, 조선혁명당 중앙위원 및 산하 무력단체인 조선혁명군 참모장으로 활약하였다. 선생은 노선대립 등으로 만주지역에서의 독립군 활동이 어려워지자 1931년 상해로 옮겨 중국군 고급장교로 복무하면서 한국군인회를 조직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임시정부가 장사, 광주 등지로 이전하게 되자 임시정부 청사를 확보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였다. 1939년에는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화북지구 특파단으로 서안에 파견되어 병사를 모집해 훈련시키는
[한국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친구랑 왔으면 그냥 떠들다가 그냥 갔을지 몰라요. 하지만 엄마랑 와서 보니까 더 찬찬히 꼼꼼하게 보게 되어 좋았어요. 일본의 침략사를 실감하게 된 것 같아요 인천 고잔고등학교 2학년 임시연 양은 인천관동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일제침략사전시회를 둘러본 소감을 그렇게 말했다. 자료로 보는 일제침략전시관 내부 텔레비전이나 드라마 등을 통해서 일제침략의 이야기를 대충은 알고 있지만 이렇게 직접 눈으로 침략의 증거물들을 딸과 보게 되어 의미 깊었습니다. 이런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임시연 양의 어머니 김춘미 씨 역시 공출, 징집, 징용을 중심으로 한 이번 자료로 보는 일제 침략사전을 본 느낌이 남달랐다고 한다. 조선인 쇠뇌에 쓰인 구호성 표어와 포스터 지난 8월 14일부터 인천관동갤러리에서는 인천근대박물관 주관으로 일제침략기에 조선인의 삶을 멍들게 한 공출과 징집, 징병 자료전을 열고 있다. 공출의 경우는 쌀을 비롯하여 놋그릇, 수저, 솥단지 따위는 물론이고 하다못해 목화솜이나 소나무 송진까지 공출 품목에 들어 있으며, 충청도의 한 기록에는 공출용 소나무 가지 숫자까지 기록해 두고 있다. 황국신민임을 암기해야하는'황국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구좌리 문주란 자생지인 토끼섬 앞 건너편에 잠들어 있는 해녀 출신 부덕량 애국지사 무덤을 찾아가는 날은 잔뜩 구름 낀 흐린 날씨였다. 지난 8월 23일,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퍼부을 듯한 날씨 속에서 렌터카의 길찾개(내비)는 구좌읍 하도리 425번지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을 마지막으로 멈추었다. 그러나 사방을 둘러봐도 무덤이 있을 만한 곳이 눈에 띄지 않았다. 기자가 출발 시에 근처에 가면 애국지사묘역이라는 안내판이 있겠지 한 것은 오산이었다. ▲ 해녀항일 독립운동가 부덕량 애국지사 무덤에는 풀이 수북하게 자라있고 제단도 풀에 묻혀 있다 토끼섬 맞은 편 해안가 2차선 도로는 차를 세울 곳도 없어 가까스로 깜빡이를 켜서 도로변에 세워놓고 사방을 샅샅이 뒤지기로 했다. 대관절 부덕량 애국지사 무덤은 어디에 있다는 것일까?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 하지 않는 해안가 도로는 적막감에 쌓여 있을 뿐 드물게 관광객의 렌터카만이 드라이브를 즐길 뿐이라 딱히 어디다 물어 볼 상황도 못되었다.부덕량 애국지사 무덤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그 옛날 어떤 이가 문주란 자생지에 토끼를 풀어 놓아 토끼섬이라고 불리었다는 섬을 기준으로 찾아
[한국문화신문=이윤옥 기자]일본의 된장을 미소라고 하는데 그 색깔은 한국의 누런 된장보다 밝고 연한 노란색에 가까운 느낌이다. 한국인에게 된장국이 필수라면 일본인에게는 미소시루(일본된장국)가 필수다. 두 나라 된장국이 비슷한 것 같지만 그 맛은 서로 다르다. 같은 된장국이라도 일본의 미소시루는 건더기가 별로 없이 후루룩 국그릇을 들고 마실 정도의 느낌이라면 한국의 된장국은 밥을 말아 수저로 먹어야 제 맛을 느낄 만큼 된장국에 들어 있는 건더기도 다르다. 일본의 미소와 한국의 된장 요리 가운데 결정적인 차이를 들라하면 일본의 미소로는 미소찌개를 만들어 먹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한국의 된장으로는 된장국도 끓이고 된장찌개도 만들어 먹는 점이 다르다. 미소시루만 먹다가 한국에서 된장국이나 된장찌개를 맛본 일본인들의 반응은 한국 고유 된장맛이라면서도 대체적으로 짜다는 평을 하고 있다. 일본의 일반 미소는 샛노란 색깔에 가깝지만 핫쵸미소는 그 색깔이 짙고 붉은 빛이을 도는 게 특징이다. 적갈색의 핫쵸미소의 고장은 나고야지방인 아이치현(愛知縣)이다. 나고야지방에서 맛보는 미소시루는 다른 지방의 미소시루보다는 색이 짙고 맛도 깊다. 이 지방에서는 핫쵸미소와 구분하기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차리석(車利錫, 18811945) 선생은 1904년 숭실(崇實)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대성학교 교사로 후진양성에 전념하였으며,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던 중, 1911년 소위 사내 총독(寺內總督)암살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수년간 옥고를 치르고 1913년 3월 20일 석방되었다. 1919년 31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한 뒤, 상해로 망명하였으며, 동년 8월 독립신문의 기자로서 조동호와 함께 활동하였다. 그 뒤 1921년 6월경 김승학이 동사 사장이 되어 신문발행을 계속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편집국장이 되어 임시정부의 입장을 대변하고, 교포들에게 독립사상과 항일정신을 고취시키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2월에는 임시의정원의 평안도 선출 의원이 되어 정치에 참여하였으며, 1930년에 개최된 의정원회의에서 의장에 이동녕(李東寧)이 피선되고 그는 부의장에 피선되어 활동하였으며 김붕준김홍서와 함께 상임위원회 위원으로도 의정활동에 참여하는 등 1933년 12월까지 의정원의원으로 재직하였다. 1922년에는 안창호(安昌浩)와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가하여 뜻을 같이 하였으며, 시사책진회(
[한국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사쿠라섬(島)은 일본 큐슈남부 가고시마현에 있는 화산섬이다. 원래는 말 그대로 섬이었으나 1914년(대정3년)에 일어난 대규모 분화로 인접한 오오스미반도(大隅半島)와 붙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원래 있던 이름을 바꾸기는 쉽지 않은 듯 여전히 사쿠라섬이라 부른다. 이곳은 현재 활발한 화산활동으로 경계 4 수준의 요주의 지역이다. ▲ 1914년 사쿠라섬 대분화로 높은 신사 도리이가 화산재에 파묻혔다. 일본의 화산 경계 단계는 모두 5단계로 경계 5는 피난, 4는 피난준비, 3은 입산규제, 2는 분화구주변 규제, 1은 활화산이라는 사실에 주의 할 것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처럼 사쿠라섬 말고도 예의 주시하고 있는 활화산은 인구 밀접지역인 관동의 후지산이다. 후지산은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인 1707년에 분화한 이래 잠잠한 상태지만 언제 분화 할지 몰라 일본 기상청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역사적으로 후지산은 3200년 사이에 모두 100번 분화 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는데 평균 30년에 1번 분화한 셈이다. 30년에 1번꼴로 분화한 산이 지난 300년 간 큰 분화 없이 잠잠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니 일본인들이 겁이 날만도 하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연기우(출생과 순국일모름) 선생은 강화진위대 부교 출신으로 1907년 일제의 대한제국군 강제 해산에 격분해 강화진위대 군인들을 이끌고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군대해산 이후 의병항쟁이 전국으로 확산될 때 선생의 의진을 비롯한 주요 의병부대는 이인영을 중심으로 13도창의대진소를 결성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경기도 양주로 모여든 연합의진은 서울진공작전을 감행하여 일본군과 4개월 동안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선생은 서울진공작전 중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으나 일제의 경비가 느슨한 틈을 타 탈출하였다. 1908년 13도창의대진소가 해산되자 선생은 서울, 경기, 황해지역 의진과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임진강을 넘나들며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신무기를 구입해 무장을 강화하였고, 엄격한 군율을 바탕으로 군자금과 물자를 사사로이 사용하지 않도록 하였다. 특히, 주민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어 지역 주민들의 두터운 지지를 받았다. 1910년 일제는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감행해 연기우 의병장을 비롯한 경기, 황해지역 의병을 탄압하였다. 이후 연기우 의병장에 대해 1911년 가평에서 일제 헌병대와 전투 중 순국하였다는 설과 1914년 인제에서 부친과 함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일본 말에 애매모호(曖昧模糊)란 말이 있다. 무언가 확실하지 않을 때 쓰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일본말 속에는 ~입니다 라는 말 보다는 말끝을 ~가 아닌가하고 생각합니다. 또는 ~가 아닌가하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것 또한 확실치 않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라는 말투를 흔히 쓴다. 문장으로 가면 더욱 심해서 그 문제는 ~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이것은 확실치 않아 다른 한편으로는 달리 생각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가하지만 반드시 그렇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라서.... 라는 식으로 표현하기 일쑤다. 이런 지경이다 보니 특히 논문 같은 것은 다 읽어도 무엇을 말하는지 아리송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제 발표한 아베수상의 전후 70년 담화(戦後70年談話) 내용 역시 그런 애매모호한 표현의 대표적인 문장의 하나였다. 고베신문(神戸新聞) 오늘자(8월 15일)에는 안전보장관련법안에 반대하는 학생단체인 실즈관서(シールズ関西) 회원인 고베대학대학원생 시오다쥰(塩田潤,24살)이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지 잘 모르겠다. 본심을 감추고 있는 게 아니냐?고 할 정도다. ▲ 고베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미영(美英)은 우리의 적이다 이것은 일제강점기 경성 미쓰코시 백화점 광고에 등장하는 소학교(초등학교) 2학년짜리 광웅(光雄)이 그린 그림이다. 그런가 하면 충청남도의 한 시골 소학교 4학년 이주형 학생이 쓴 천황폐하를 위해 쓴 황국신민의 서사를 연습하던 공책도 눈길을 끈다. 또한 일장기를 다룰 때는 정중하게 게양하되 가장(家長)이 국기를 다룰 것 이라는 일장기 보관 봉투도 예사롭지 않다. ▲ 어린 소녀가 널뛰기 하는 그림에도 일장기가 선명하다 ▲ 초등학교 4학년생의 황국신민서사 연습 공책 이렇게 일제침략기에 조선 땅에서 조선인을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제국주의자들의 증거품 들을 낱낱이 선보이는 전시회가 인천관동갤러리(관장 도다이쿠코)에서 8월 14일부터 열린다. 이번 전시물들은 인천근대박물관 최웅규 관장이 40여 년 동안 혼신의 힘으로 모은 자료 가운데 일제 침략의 현황을 잘 나타내는 공출(供出), 징병(徵兵), 징집(徵集)과 관련한 자료 150 여 점의 전시로 처음 공개하는 자료들이다. 내일 14일 전시 개막을 앞두고 어제 전시 막바지 준비를 돕기 위해 관동갤러리 전시장에서 전시 물품들을 샅샅
[한국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사전이 반드시 만능은 아니란 걸 알고도 낙담하기는커녕 애착이 점점 깊어갔다. 가려운 곳에 손이 채 닿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부분마저도 애쓰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절대완전무결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사전을 만든 사람들의 노력과 열기가 전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얼핏 보면 무기질한 단어의 나열이지만 이 막대한 수의 표제어와 뜻풀이와 예문은 모두 누군가가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쓴 것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끈기인가! 얼마나 대단한 말에 대한 집념인가! 미우라시온은《배를 엮다(船を編む)》라는 책에서 사전 만드는 작업의 어려움을 그렇게 말했다. 정말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 사전 만드는 작업이야 말로 낱말 하나하나를 날실과 씨실처럼 꿰어야하는 작업이니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올해 마흔 살의 작가 미우라시온은 와세다출신으로 취직을 위해 20개 회사에 지원했다가 떨어진 경험을 바탕으로《격투하는 자에게 동그라미를》이란 소설을 쓰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 미우라시온의《배를 엮다(船を編む)》책 표지 숱한 이력서를 들고 취직을 위해 뛰면서 겪은 이야기야 누가 쓰던 오십보백보의 이야기지만 미우라시온의 《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