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김동삼(金東三, 1878. 6. 23 ~ 1937. 4. 13) 선생은 1878년 6월 23일 경북 안동시 임하면(臨河面) 천전동(川前洞) 278번지에서 김계락(金繼洛)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긍식(肯植)이고, 종식(宗植)이라는 이름도 사용하였다. 자는 한경(漢卿)이며, 호는 일송(一松)이다. 김동삼이라는 이름은 선생이 만주로 망명한 뒤에 사용한 것이다. 안동에 많은 명문거족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의성 김씨 문중은 퇴계의 정맥을 계승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이후로 명성을 드날렸다. 천전(川前), 곧 내앞마을은 김성일의 부친 청계(淸溪) 김진(金璡)이 들어와 정착한 이래 5백 년을 이어오면서 많은 인물을 배출한 곳이다. 특히 일제 침략기에 독립운동사에 걸출한 인재를 쏟아낸 마을이다. 한 마을에서 20명이 넘는 인물이 독립유공자로 포상되었고, 1910년대 만주 망명자가 150명을 넘을 정도이다. 선생은 안동의병의 최고지도자였던 서산 김흥락(西山 金興洛)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했다. ▲ 김동삼 선생 김흥락은 김성일의 종손이자 퇴계학맥의 중심축을 계승한 인물인데, 1895년 12월 을미의병 당시 안동의병을 일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이동휘 선생[1873~1935] 은 아전 이승교의 아들로 1891년경 18세 때 군수의 시중을 드는 통인(通人)으로 있다가 상경하여 1895년 한성무관학교(漢城武官學校)에 입학수학한 뒤 육군 참령(參領)까지 진급하였으며, 1902년부터는 강화도(江華島) 진위대장(鎭衛隊長)으로 활동하였다. 1906년 계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군직(軍職)을 사임한 뒤, 강화도에 보창학교(普昌學校)를 설립하는 한편,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결성에도 관여하는 등 민족주의 교육과 구국계몽운동에 적극 노력하였다. 1907년 광무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의 해산으로 대한제국이 준식민지화하자, 군동지였던 연기우(延基羽)김동수(金東洙) 등과 함께 강화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투쟁할 것을 모의하였으나, 광무황제의 해아밀사사건(海牙密使事件)에 관련된 혐의로 일경에 피체유배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미국인 선교사 벙커의 주선으로 그 해 10월 석방되었다. 석방 후 1908년 1월경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창립하는데 참여하는 한편, 이동녕(李東寧)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이갑(李甲) 등과 더불어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계몽운동과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중 19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서기 703년 5월 28일 종5위 신분의 신라대사 미노연정마려(美努連淨麻呂)와 학문승 의법(義法), 의기(義基), 자정(慈定), 정달(淨達) 등이 신라로부터 귀국했다. 이는 일본의 정사인 《속일본기》에 나오는 기록으로 일본의 승려들이 신라로 공부하러 떠났다가 돌아온 기록이다. 뿐만 아니라 《속일본기》에는 이 무렵 신라인은 물론 고구려, 백제인들과의 교류 이야기도 흥미진진하게 기록되어 있다. 물론 발해사신이야기도 빠지지 않고 나와 있다. 이 보다 앞서 1월 5일에는 신라에서 김복호(金福護, 신라관직 제8위)와 김효원(金孝元, 신라관직 제9위)등이 효소왕의 죽음을 알리러 왔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런가 하면 4월 4일에는 종5위인 고려(고구려) 약광(若光)에게 왕(王)이라는 호칭을 하사하였다라는 기록도 있다. 이 고구려의 약광왕을 모신 신사가 도쿄 인근 사이타마현에 있는 고마진쟈(高麗神社)이다. 머나먼 2천 년 전 유구한 세월 동아시아에 일찍이 국가를 형성했던 고구려. 여러 나라들의 맹공을 저지하는 강국이면서도 예술과 문화 영지(英知)룰 남기며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아름다운 나라. 먼 이국땅에서 넘어온 왕족 고구려왕 약광(高麗王 若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한성수 선생은 1920년 8월 18일 평북 신의주 고진면(古津面) 낙청동(樂淸洞) 102번지에서 한일현(韓一賢)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한정규(韓正奎)는 신의주 일대의 부호로 어릴 적 선생의 집안 형편은 꽤 부유하였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1934년 3월 평북 정주(定州)의 명문 민족사립학교 오산학교(五山學校)에 입학하였다. 당시 오산학교는 수많은 애국청년들과 민족지도자들을 양성한 민족학교였다. 이곳에서 받은 민족교육은 훗날 선생이 중국에서 일본군을 탈출하여 독립운동진영에 투신하고 일제에 온 몸으로 저항하다 순국하게 되는 정신적 밑거름이 되었다. 1939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선생은 1941년 일본 전수대학(專修大學) 경제학과에 유학하던 중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초 선생은 학도병(學徒兵)으로 일본군에 징집되었다. 1943년 조선인학도특별지원병령(朝鮮人學徒特別志願兵令)을 발표하여 한국의 청년학생들을 전선으로 내몰기 시작하였다.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고 후방에서 민족지성의 저항력을 말살하기 위한 일석이조의 조치였다. 외형상으로 지원(志願) 형식을 취하였지만 실제로는 강제동원이나 마찬가지였다. 대학교를 다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비썩 마른 체구의 재일 동포 배동록 씨를 만난 것은 5년 전 일이다. 당시 67살이던 그는 15년째 일본 땅에서 부모님의 강제 징용 사실을 일본인들에게 ‘증언’ 하는 일을 하고 있었고 2010년 11월 10일 치쿠호의 우스이초등학교에서 700번째 증언을 마친 바 있다. “2004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후 몇 번이나 ‘증언’을 그만두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지금까지 지원해주신 양심적인 일본 선생님들 그리고 강연할 때마다 나에게 보내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써내려간 아이들의 감상문에 힘을 얻어 지금까지 해낼 수 있었습니다.” 늙으신 어머니와 함께 일본의 초,중,고등학교를 돌며 재일조선인들의 강제연행과 재일동포의 피눈물 나는 역사를 증언하고 다니던 배동록 씨는 2006년 <조선대학교동창회장려상> 수상 소감에서 “강제 노역 증언”의 고달픔을 토로했었다. ▲ 힘겨운 갱 안의 작업 모습, 자고 먹던 합숙소 ‘함바’ 등 고통스럽게 살아가던 조선인 징용자 삶의 흔적들 배동록 씨의 아버지는 경남 출신으로 야하타제철소로 강제연행 당한 것은 1940년이다. 그 뒤 2년 후에 어머니는 올망졸망한 아이 넷을 데리고 부관연락선에 몸을 싣는
[한국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내일 모레 5월 15일은 교토의 3대 마츠리 가운데 하나인 아오이마츠리 날이다. 아오이마츠리(葵祭)는 고대 한반도와 관련이 있는 마츠리로 가모신사의 마츠리라해서 가모마츠리(賀茂祭)로도 불렸다. 아오이마츠리 유래는 ≪가모신사유래기≫에 따르면 6세기 무렵 긴메이왕 시절에 일본 전역에 풍수해가 심각하여 점쟁이에게 점을 쳤는데 가모대신(賀茂大神)이 노한 것으로 나와 그 노여움을 풀기 위한 제례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노여움을 풀기 위한 수단으로 제주(祭主)는 튼튼한 말을 골라 방울을 잔뜩 달고 기수 얼굴에 동물 가면을 씌워 가모신사 주변을 돌면서 성대한 제례(마츠리)의식을 행하는 것이다. 일본의 마츠리는 대부분이 고대에 기원을 둔 것으로 풍수재해 예방, 전염병 확산 금지, 국태민안, 풍작 등의 기원을 담고 있으며 아오이마츠리 역시 풍수재해 예방 기원으로 시작되었다. 1693년까지는 가모마츠리(賀茂祭)로 불리다가 아오이마츠리(葵茂祭)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아오이란 하트모양의 콩잎 같은 풀 잎사귀가 행렬에 참여하는 우마차 장식에 쓰였다고 해서 붙이게 된 이름으로 지금도 행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머리장식에 빠지지 않고 푸른 아오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맑고 푸른 동해 영흥만에 자리 잡은 바닷가 마을로 행정구역은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 명사십리와 해당화로 유명한 이곳에 1909년 8월 12일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상록수]의 주인공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채영신(본명, 최용신-崔容信) 선생이었다. 언니, 큰오빠인 시풍, 작은 오빠인 시창, 여동생 용경 등 3녀 2남 중 차녀였다. 부친은 창희(昌熙), 본관은 경주였다. 고향인 두남리는 원산에서 10리쯤 떨어진 풍광이 아름다운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이곳은 일찍이 기독교 전래와 더불어 교회, 학교를 운영하는 등 서구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조부와 부친도 사립학교를 설립하거나 교육 사업에 종사한 인물이었다.이런 가정환경은 선생으로 하여금 근대교육에 쉽게 접할 수 있게 만들었다. 최용신 선생 어릴 때 선생은 천연두를 심하게 앓아 얼굴은 물론이요, 정강이에도 마마 자국이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선생을 놀리는 등 심하게 구박하였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선생은 깊은 사색에 몰두하면서 자랐다. 8세가 되던 1916년 선생은 마을에 있는 사립학교에 입학하였다. 2년간 이곳에 다니다가 1918년 원산의 루씨여자보통학교로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동자(童子)라고 하면 승려가 되려고 절에서 공부하면서 아직 출가하지 아니한 사내아이라는 국어사전의 풀이처럼 작고 가녀린 어린 동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꽃 가운데 동자꽃이란 게 있는데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이야기는 이 동자가 주인공인 듯 너도나도 퍼 나르기를 해놓아 짬뽕이 되어 있는 상황이다. ▲ 동자꽃(이명호 사진작가) 이름하여 동자꽃의 유래라며 나도는 이야기의 요점은 어느 깊은 산 속에 노스님과 어린동자가 지내다가 한 겨울 추위에 시주하러 내려갔다가 눈길에 막혀 돌아오지 못했고 그러다가 어린 동자는 얼어 죽었는데 눈이 녹아서야 돌아온 노스님은 어린 동자가 가여워 묻어주었더니 그곳에 붉은 꽃이 피어나 동자꽃이라 했다는 게 요지다. 원래 이야기라는 게 한 다리 건너면 살이 붙기 마련인지라 몇몇 신문의 우리풀꽃 칼럼에 나오는 동자꽃은 설악산 암자라고 까지 비약되어 있다. 그러나 이 동자꽃의 유래는 한국이 아니라 일본 교토 사가(嵯峨) 지방의 선옹사(仙翁寺)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일찍이 이를 선옹화 (仙翁花)라고 불렀다. 이 꽃은 일본 식물학의 아버지라는 마키노토미타로(牧野富太郎)가 지은『마키노신일본식물도감(牧野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어제는 일본의 어린이날(고도모노히, 子供の日)이었다. 어린이의 인격을 존중하고 어린의 행복을 꾀함과 동시에 어머니에게 감사드리는 날의 취지로 1948년 제정된 이래 67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어린이날을 제정한 나라는 터키로 1920년 4월 23일이었고 이후 1925년 스위스제네바에서 6월 1일을 국제어린이 날 (International Children's Day)로 삼은 이래 1954년에는 유엔에서 11월 20일을 세계어린이 날(Universal Children's Day)로 정했다. 그러나 나라마다 어린이 날은 약간 씩 다르며 일본은 전통적으로 지내오던 단오날을 오늘의 어린이 날로 삼고 있다. 따라서 어린이 날을 탄고노셋쿠(端午の節句)라고도 하는데 원래 이날은 남자 아이들의 성장을 축하하고 건강하게 자라도록 기원하는 풍습에 기인한다. 이날은 형형색색의 모형 잉어를 띄우는데 이를 고이노보리(こいのぼり)라고 한다. 예전에는 남자 아이가 있는 집안에서는 긴 장대에 모형잉어를 매달아 놓았지만 아파트 생활을 하는 현대는 아파트 베란다에 모형잉어를 장식하기도 한다. 왜 하필 모형 잉어인가? 중국 후한서(後漢書)에 보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갓길을 풀이하길, " 고속 도로나 자동차 전용 도로 따위에서 자동차가 달리는 도로 폭 밖의 가장자리 길. 위급한 차량이 지나가거나 고장 난 차량을 임시로 세워 놓기 위한 길이다. ≒길귀 " 라고 설명하고 있다. 말 그대로 세살 아이도 알아먹을 설명이다. 그런데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심심찮게 '길어깨'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공사 현장에 세워둔 것인데 정말 거슬리기 짝이 없다. 길어깨란 일본말 로카타 < 路肩, 노견>를 그대로 번역한 말이다. 길에 무슨 어깨가 있고 팔이 있다는 말인가! 제발, 이런 표기가 눈에 안띄었으면 좋겠다. 사진은 서울에서 곤지암 가는 고속도로 공사 현장에서 찍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