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사시사철 나물을 즐겨 먹는 아주머니가 이웃집에 사는 덕에 심심치 않게 나물반찬을 얻어먹고 있지만 광대나물 무침이라는 소리는 들어 보지 못했다. 그런데 산림청에서 운영하는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 누리집에 광대나물을 소개하길 어린순은 나물로 먹고 한방약으로 달여 먹으면 월경불순, 소아허열, 현기증, 간염, 부종 따위에 잘 듣는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광대나물도 흔히 먹던 나물이었던 것 같다. 어째서 나물이름에 광대가 들어 간 것일까? 누리꾼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싶어 뒤져보니 자칭 들꽃 도사들은 한결같이 꽃모양이 광대 같아서 라고 쓰고 있다. 정말 그럴까?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광대나물 : 꿀풀과의 한해살이풀 또는 두해살이풀. 높이는 25~30cm이며, 잎은 마주난다. 4~5월에 붉은 자주색 꽃이 잎겨드랑이에서 윤산(輪繖) 화서로 핀다. 어린잎과 줄기는 식용하고 전체는 토혈(吐血)과 코피를 멎게 하는 데 쓴다. 밭이나 논에 자라는데 한국, 북아메리카,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한다.고 설명할 뿐 광대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광대라는 말이 들어간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감리교 목사이자 민족운동가인 동오 신홍식 (申洪植, 1872. 3. 1 ~ 1939. 3. 18) 선생은 한국기독교사는 물론 민족운동사에서도 눈여겨볼 만한 인물이다. 기독교인으로서 민족운동을 벌인 이들이 적지 않았으나 부흥사 출신은 많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가 3.1운동 당시 기독교 대표 16인 중의 1인으로 선정되어 감리교를 대표하여 민족대표 33인의 명단에 서명하여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신홍식 선생은 1872년 3월 1일 충청북도 청주군 문의면 문산리에서 부친 신기우(申驥雨)씨와 모친 최살랍(崔撒拉)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양반가문에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사람들로부터 신동 또는 천재라는 칭찬을 들을 정도로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났다고 한다. 13세 때 시율(詩律)을 지었으며, 16세 때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독파할 정도로 한문수학에 남다른 탁월성을 드러냈다. 그는 1887년에 부친이 별세하며 가정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 가운데서 1891년에 결혼하여 분가한 신홍식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어머니를 모시며 25세 때까지 당시 전통적인 유교사회에서 사회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어제 찾은북한산 등산길에는가는잎그늘사초(산거울)가 파릇파릇 싹을 틔우고 있었다. 지난 해 자란 길다란 풀은겨울을 지나는 동안 끝자락이 말려 있어 꼭 할아버지 수염 모습을 하고 있는데 땅 밑에서는 파릇한 싹이 움트고 있어 생명의 신비를 느끼게 해준다. 어릴 때 산에서 머리땋기도하고 하고 아이들 발에 걸려 넘어지라고 함정을 만들어 놀던 이 풀 이름이 가는잎그늘사초(산거울)래요. 머리 땋기하며 놀면 참 재미납니다. 이는 인터넷에 올라 있는 글이다. 남자들은 모르겠지만 시골에 살던 여자애들은 이 가는잎그늘사초(산거울풀)로 머리땋기도 하고 남을 골탕 먹이기도 했던 추억을 하나 쯤 갖고 있을 것이다. 글쓴이 역시 그랬다. ▲ 할아버지 수염처럼 길게 늘어뜨린 산거울(가는잎그늘사초), 북한산에서 글쓴이 찍음 그러나 그때는 이 풀이름을 잘 몰랐고 다만 그 모습이 할아버지 수염같이 생겼다고 해서 코흘리개 우리들은 그냥 할배수염이라 부르며 컸다. 커서 이 풀이름이 무엇인가 했더니 가는잎그늘사초(산거울)란다. 특히 산거울이라는 말은 아무래도 이 풀이름과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할배수염처럼 생긴 이 풀이름을 왜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등대풀이라고 하면 언뜻 바닷가나 섬 같은 곳에 세워둔 등대(燈臺)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등대란 바닷가의 등대가 아니라 일본말로 등잔을 뜻하는 것인데 잘못 번역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어 어원유래사전(語源由來辭典)에 따르면, 등대풀에서 등대란 항로표시를 위한 등대가 아니라 옛날에 집안의 조명기구인 등명대(燈明臺)를 말한다. 등대꽃을 보면 심지처럼 노란꽃대가 올라와 있고 꽃잎이 그 주변을 받쳐서 마치 등잔처럼 보여 이렇게 부른다 고 풀이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등대풀(灯台草, 도다이구사)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등잔불을 켠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일본인의 눈에 그렇게 보인 것일 뿐이다. 만일 이 꽃이름을 알려주지 않고 한국인에게 이름을 붙이라고 한다면 전혀 다른 이름이 나왔을지 모른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 꽃을 일본말 등대를 따서 등대풀이라고 부르고 있고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말의 유래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다루지 않은 채 식물 생태만 말하고 있다. ▲ 꽃을 자세히 보면 등잔모양을 닮았다. 등잔을 뜻하는 일본말 고어가 등대인 것을 모르고 등대풀이라고 번역해서 쓰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1950~60년대에 미국유학을 갔다가 돌아오지 않아 두뇌 유출된 한국학자들에 대한 보도가 지금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15세기 조선초에도 이런 두뇌 유출이 있었다. 불교나 도교 그림을 그리던 최고 수준의 승려화가들이 조선의 억불정책 아래 활동이 어려워지자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갔다. 당시에는 입국심사나 이민법 겉은 것은 없었다. 일본절에서는 조선의 승려화가들을 우대하여 받아들였으므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 되었다. 이들이 그린 그림들은 모두 일본미술사로 편입 되어 버렸다. 출가한 사람은 속가의 이름을 버리고 법명을 받는다. 이 때문에 그림에 서명된 이름만으로는 그가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 구별이 어렵다. 이는 미술사학자인 코벨의 이야기다. 그는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에서 15세기 일본의 선묵화를 그린 사람 대부분이 조선인이었음을 그의 스승 후쿠이리키치 교수의 발표를 토대로 밝혔다. 그동안 일본 화단에서는 슈분(周文)이라는 일본 화가가 수묵화를 전부 그린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1925년 후쿠이 교수의 조선인 작품을 발표하면서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그리고 그동안 일본발음이 같은 슈분이라는 인물 가운데 조선인 슈분(秀文)이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운강 할아버님! 저는 할아버님이 목숨으로 지켜낸 이 땅에서 시인으로 살고 있는 증손녀 순희 입니다. 다른 집안 같으면 증조부를 그냥 증조할아버님이라고 부르지만 가문에서는 제가 태어날 때 이미 아호 그대로 운강 할아버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른들께 여쭤보지 않았지만 거기에는 우리 할아버님이 의병장, 그것도 전국 의병들의 수장이셨다는 가슴 벅찬 자긍심을 담았던 것입니다. ▲ 운강 이강년 의병장 어린 시절, 고향집에는 할아버님 초상이 걸려 있었습니다. 지금 운강기념관에 있는 무관대례복을 입고 형형한 눈빛으로 바라보시는, 풍채가 크고 잘 생긴 영정 그 모습 말입니다. 저는 오빠들과 함께 할아버님의 초상을 올려다보며 옷깃을 여몄습니다. 아버지께서 크지 않은 목소리로 할아버님의 생애를 말씀하셨습니다. 운강 할아버님은 스물세 살에 무과에 급제, 정3품인 선전관까지 지내시고 갑신정변 때 낙향하셨다.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두 차례 의병을 일으키셨다. 첫 번은 1896년 국가 자존과 민족자존을 지키려고 일어서셨고, 제천의 의암 유인석 의병진과 합류해 세력을 확장한 뒤 수많은 전투를 치르셨다. 그리고 만주로도 가서 투쟁하셨다. 둘쨋 번은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이승희(李承熙, 1847. 2. 19 ~ 1916. 2. 27) 선생은 1847년(헌종 13) 2월 19일(음) 경상도 성주 대포리(지금의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 1동)에서 아버지 이진상(李震相)과 어머니 흥양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5살 때부터 아버지 이진상의 가르침을 받아 이후 가학(家學)을 이어 큰 학자가 되었다. 당시 세상 사람들은 이진상과 이승희 부자의 학문적 계승 관계를 중국 송나라 때의 큰 학자인 채원정(蔡元定)과 채침(蔡沈) 부자의 관계에 견주어 서산씨부자(西山氏父子)라고 말하였다. 선생은1867년 21세 때 흥선대원군에게 성학(聖學),호적(戶籍),전제(田制),선거(選擧),제병(制兵) 등 폐정개혁을 주장하는 글을 올렸다. 개항 이후 1880년대 초에 개화정책의 흐름이 확산되면서 척사파와의 갈등은 고조에 달하였다. 1880년 말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러시아를 막기 위해서는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을 해야 한다는 조선의 외교방략을 담은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일본에서 가지고 와 고종에게 바치자, 이듬해 1월 이만손(李晩孫)을 중심으로 영남유생 만여 명은 연명으로 만인소를 올리기 위해 상주의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바야흐로 벚꽃의 계절이다. 지금 한반도에서는 진해군항제를 비롯하여 각종 벚꽃잔치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이틀 전 모 텔레비전 방송국에서는 낮 뉴스에서 진해군항제 소식을 첫 번째 소식으로 전하면서 해군기지에 몰려든 사람들을 화면 가득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벚꽃의 만개시기를 일기예보처럼 낱낱이 예보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 방송에서 진해의 흐드러진 벚꽃놀이 보도이후 다시 몇 가지 뉴스가 지나간 뒤에서야 “일본의 교과서에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표기하고 있다”는 뉴스를 배치하고 있는 점이다. 독도를 자기들의 영토로 기정사실화하면서 교과서에 실어 “일본 영토”임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도 분노를 억누를 수 없는 상황인데 이런 사실 마저도 한국의 방송은 “벚꽃놀이” 보다 못한 기사로 다루고 있는 것이 속상하다 못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 진해군항제를 상세히 보도하는 방송 일제강점기인 1928년 4월 22일 치 동아일보에는 “불온기사”라고 딱지를 붙인 기사가 눈에 띄는데 불온의 이유인 즉슨 “피폐한 조선인의 경제에도 불구하고 성황리에 열리고 있는 마산의 벚꽃놀이를 비판” 했다는 것으로 이를 문제 삼은 곳은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이었다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무역회사인 이륭양행을 통해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조지우리스. 쇼(george lewis shaw, 1880. 1. 25. - 1943. 11. 13., 건국훈장 독립장 1963 )는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조지 루이스. 쇼는 아일랜드계 영국인으로 중국 안동현(오늘날 단둥시)에서 무역 및 선박회사인 이륭양행(怡隆洋行)을 운영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는 이륭양행 2층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사무국을 설치토록 해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으로 활용토록 하였다. 자신의 선박을 이용해 임시정부 요인들을 수송하였으며, 무기, 출판물 등을 안전하게 수송해 주었을 뿐 아니라 국내에서 조달한 독립운동 자금을 자신이 발행하는 수표로 임시정부에 안전하게 송금해 주었다. 또한,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중요 문서와 물자를 이륭양행 명의의 사서함을 통해 수령케 함으로써 안전하게 운반될 수 있도록 도왔다. 1920년 7월 일제에 의해 내란죄로 기소되어 4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보석으로 석방된 뒤에도 변함없이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 조선의 독립자금을 돕던 단둥의 이륭양행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한국의 장승은 돌이나 나무에 사람의 얼굴을 새겨서 마을 또는 절 어귀나 길가에 세워 잡귀와 나쁜 액운의 출입을 막거나 절의 경계를 표시하는 민간 신앙물이다. 이러한 장승을 마을에서는 수호신으로 믿기도 했다. 장승은 대부분 남녀로 쌍을 이루는데 남자를 가리키는 장승 기둥에는 천하대장군, 여자를 가리키는 기둥에는 지하여장군이라고 새기기도 한다. 그런데 일본에도 이러한 장승이 있다. 도조신(道祖神, 도소진)이 그것이다. 일본의 장승은 대부분 돌장승이 많으며 한국처럼 마을의 경계를 나타내거나 교차로 등에 세우는데 이 장승을 마을신으로 받들고 나쁜 액운이 마을로 들어오지 못하거나 길 가는 나그네의 안전을 비는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 나가노현에 있는 석비 형상이 장승 도조신(道祖神) 일본의 장승은 조각을 하여 어떤 형태를 만들기 보다는 자연석 상태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더러는 석비 형상이나 5층탑 모양 또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도 있다. 이러한 장승은 전국에 널리 분포하고 있으나 흥미롭게도 이즈모신화(出雲神話)의 고향인 시마네현에는 장승이 거의 없다. 아마도 강력한 신앙인 이즈모신사(出雲神社)가 장승신앙을 허락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