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늦은 밤 평범한 대학생이 지친 어깨를 이끌고 이곳저곳 골목길을 헤매입니다. 각박해져만 가는 세상에서 마음 한켠이 무거워 진채 어떻게 이 마음을 짊어지고 미래를 설계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앞길은 막막하고 세상은 많은 것들을 원하고 가고자 하는 길은 불투명 합니다. 꿈도 없이 그저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다가 세상의 기류에 휩쓸려 남들이 갔던 길 그렇게 보이는 길만을 좇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문득 증조부님이 걸어가신 길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증조부님께서 어떤 분이셨을지 또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길이 없는 줄로 알았건만 부족한 제 능력으로 찾아보니 생각보다 많은 곳에 증조부님의 흔적이 남아있었습니다. 비밀결사인 대동단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을 위해 친인척, 동지들과 군자금 모집활동을 펼치시다가 옥고를 치르셨지요. 구체적인 상황은 옛 동아일보와 독립운동관련 판결문을 토대로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시절 대부분의 민중들이 서슬퍼런 일제 치하에서 숨죽이면서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연명하면서 견디어 내고 있을 시기에, 증조부님이 가신 길은 너무나도 좁고 무겁고 죽음을 각오해야만 하는 길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독립이라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류자명 선생[1894~1985]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의열단 단원, 조선혁명자연맹 대표, 조선민족전선연맹 이사,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한, 중국관내지역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 중 한 분이다. 중국대륙에서 활동한 대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중국어에 능통하지 못하고, 중국인사회 속의 외국인으로 고립적인 삶을 살아갔던 데 견주어, 류자명은 중국어 회화와 문장에 능숙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중국인 친구, 동지들과 친교(親交) 차원 이상의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청싱링(程星齡), 바진(巴金) 등 거물급 인물들의 우정과 신뢰는 류자명이 중국사회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었다. 이러한 류자명 선생의 중국사회 적응력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다. 무정부주의사상과의 만남, 중국측 인사들과의 교류 및 그들의 활동에 적극 동참함으로써 자신의 활동공간을 넓혀갔던 사실, 일제 패망 후 중국사회에서 새로운 자신의 삶의 궤적을 남길 수 있었던 사실 등은, 자신의 앞길에 펼쳐지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며 이를 앞질러 나가려 하기까지 한 그의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세계관의 반영으로 해석될 수 있다. ▲ 류자명 선생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헤이안시대(平安時代、794-1185)는 일본 역사상 가장 문화가 꽃핀 시대라고 일컬어지는데 바로 이 시기에 일본문자인 가나문자가 생겨났는가 하면 궁정문화가 농익은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헤이안시대 391년 가운데 천황들의 수명은 후기로 갈수록 짧아진다. 전기의 평균 수명은 54살, 중기는 44살인데 견주어 후기에는 33살로 급격히 천황의 수명이 떨어진다. 후기로 오면서 천황의 수명이 짧아진 것은 정권의 불안정 속에 끝내는 사무라이에게 정권을 빼앗기게 되는 원인에서 찾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와 연관 시키는 견해도 있다. 특히 헤이안 말기로 오면 승려들의 정치개입이 극심해지게 되는데 후삼조천황 집권기인 1072년에는 매사냥이 금지되고 1130년에는 살생금지령이 법률로 정해지게 되어 왕실의 식단이 푸성귀로 일색으로 채워지게 되는 것에 그 원인을 두는 사람들이 있다. 왕실의 식단이 단백질 부족 등 영양결핍의 지경에 까지 이르러 이 무렵의 천황들의 수명은 안덕천황 전의 2조(23살), 6조(13살), 고창(21살)천황의 평균 수명은 19살로 생을 마감할 정도였다. 헤이안 말기 천황의 권력이 쇠퇴하는 한편 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른
[한국문화신문= 이윤옥 기자]손정도(孫貞道, 1882. 7. 26 ~ 1931. 2. 19) 선생은 1882년 7월 26일 평안북도 강서군(江西郡) 증산면(甑山面) 오흥리(吳興里)에서 태어났고, 아호는 해석(海石)이며, 자는 호건(浩乾)이다. 6살이 되는 1888년부터 당시의 관습대로 향리에 있는 사숙(私塾)에서 17살이 될 때까지 한학(漢學)을 수학하면서 성장했다. 1895년 13살이 되자 선생은 같은 동리 박용(朴鏞)씨의 장녀로서 2살 위인 박신일(朴信一)과 결혼하였다. 1902년(23세) 선생은 관리가 될 생각으로 평양으로 떠났는데, 가는 도중 날이 저물자 하루 저녁을 우연히 조 목사 집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그날 밤 조 목사로부터 새로운 학문과 세상 돌아가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기독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 손정도 선생 1907년에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이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여 3학년까지 다니다가 휴학하고, 평양 남산현(南山峴)교회의 부목사를 맡았다. 그러면서 이승훈이 세운 영창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이후 북만주 지역의 선교를 명 받은 선생은 먼저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완수하기 위해서 중국어를 배우고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한국에는 남의 눈에 들보보다 내 손톱 밑에 가시가 더 아프다.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상대에게 닥친 큰일이라 하더라도 내 손톱 밑에 가시가 더 긴급하다는 얘기 일 것이다. 나는 왠지 일본의 두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겐자부로 (大江健三, 1935~)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소설가 오에겐자부로는 23살의 나이로 일본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아쿠다카와상(第39回芥川賞) 수상을 시작으로 숱한 상을 받고 이어 1993년 일본인으로는 두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유명한 소설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에게 지적장애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손톱 밑에 가시인 아들을 둔 뼈저린 체험이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개인적 체험을 낳게 하고 훗날 그 가시는 작가 자신은 물론이고 아들의 삶도 바뀌게 했으니 본인에게는 고통스러웠겠지만 그 가시야말로 작가로 하여금 평범한 사람이 넘볼 수없는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 아니었나 싶다. ▲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에겐자부로(왼쪽), 지적장애를 극복하고 작곡가가 된 아들 히카리의 음반 표지 오에겐자부로의 아들 히카리(大江光, 1963~)는 지적장애를 안고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극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이정(而丁) 선생께. 먼저 후학인 제가 아호(雅號)로 부름을 너그럽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이정 박헌영 ▲ 이정 박헌영 제가 예산(禮山)에 올 때 떠올린 두 인물이 있습니다. 추사(秋史)와 매헌(梅軒). 한 분은 문화사적으로 또 다른 한 분은 한국독립운동사에 불멸(不滅)의 자취를 남긴 거인들이시죠. 그 땅에 선생도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의외였습니다. 얼마 전, 선생이 나고 자란 신양 옛 집터와 선생이 서당을 떠나 학업에 입문했던 대흥초등학교에 다녀왔습니다. 또한 선생이 어린 시절 소를 데리고 나가 놀던 신양천의 모습도 보고 왔고요. 흉악한 괴수(魁首)가 아닌 객관적 인물로서 처음 선생을 대할 수 있게 된 것은 대학에 들어와서 입니다. 지도교수께선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 속 선생은 민족의 위대한 독립투사였다고 하시더군요. 물론 선생에 대한 평가가 그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저와 함께 얘기를 나누던 친구에게선 이런 얘기도 나왔으니까요. 박헌영(朴憲永)의 신화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미제의 간첩이었다는 사실이다. 북한에서 그런 평가를 받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남쪽에서도 그런 얘기가 나온다니 참으로 기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조신성 선생은 1873년 평북 의주에서 약 60리 떨어진 비현역 근처에서 출생했다. 선생이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집을 나간 버린 상태였으며, 어머니는 선생이 9세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고아가 된 선생은 고모와 함께 살다가 16세에 결혼을 했다. 그러나 남편은 가산을 탕진한 후 아편을 먹고 자살해 버렸다. 어린 시절과 결혼생활이 모두 불우했던 선생은 이에 낙담하지 않고 새로운 인생의 길을 찾았다. 곧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근대적인 의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배움에 대한 강한 욕구를 가지게 되었다. 24세 되던 해 이화학당과 상동 소재 교원양성소를 졸업한 후 상동 소재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28세 되던 해에는 이화학당 사감으로 재직하였다. 이 때 이준과 함께 한국 최초의 조선부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그 후 그는 도일하여 일본 간다(神田) 성경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귀국 후 부산규범여중학교, 평양진명여학교에서 교육사업을 하였다. ▲ 조신성 선생 1919년 3.1운동 이후 선생은 맹산독립단을 주도적으로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과 군자금 모집을 위해 활동하였다. 1920년 8월 독립단 활동을 하는 도중 독립단원들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이위종(李瑋鍾, 1887~?) 선생은 188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 부친은 이범진(範晉)이다. 이범진은 농상공부대신, 법부대신, 주미공사, 주러공사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할아버지 이경하(李景夏)는 대원군 집권 당시에 낙동염라(駱洞閻羅)라고 불릴 정도로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포도대장이었다. 쇄국정책의 일환으로 대원군이 천주교도들을 탄압하자 이경하는 정부의 명을 받아 이를 집행하였다. 이위종의 부친과 조부는 국정의 요직에 있었던 인물들이었다. 이범진은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는 성향이 달라, 매우 반일적인 인물이었다. 한 때 일본 언론에서는 이범진을 친러파라고 비방하는 기사와 함께 팔방추부(八方醜夫, 여러 모로 추한 남자)라고 조롱한 만화까지 나온 적이 있다. 일본이 볼 때 이범진은 조선 내 제1의 기피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범진은 당시 러시아 사정에 가장 정통한 인물이었다. 그는 을미사변 직후 경복궁에 감금된 처지이던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요컨대 아관파천의 국내 주역이었다. ▲ 헤이그밀사로 파견된 이위종 선생 이위종은 헤이그 평화회의 특사로파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구춘선(具春先, 1857~ 1944. 3. 20) 선생은 함북 온성에서 태어나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1886년 하급 군졸로서 온성군 영달진에서 근무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학식과 인품, 출중한 체력으로 행영(行營)의 도시(都試)에 선발되어 서울의 궁궐을 수비하는 군인이 되었다. 그는 남대문 수문장 등 중앙군의 일원으로 봉직하다가 청일전쟁과 을미사변 후인 1895년 낙향하였다. 그리고 1897년 북간도로 이주하였다. 1903년 간도관리사 이범윤이 사포대를 조직하여 한인의 보호에 나서자 선생은 온성 대안 양수천자(凉水泉子)에 보호소와 병영을 설치하고 만주에 살고 있는 동포 보호에 진력하였다. ▲ 구춘선 선생 1905년 이범윤이 노령으로 망명한 후 한인보호소를 운영할 수 없게 되자 선생은 용정촌으로 거점을 옮겼다. 1907년 캐나다 선교사 구예선(본명: r.grierson)을 만나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같은 해에는 용정시교회, 1913년에는 하마탕 교회 설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1913년 연길현 국자가(局子街)에서 김약연, 백옥보 등이 중심이 되어 한인 자치기구를 조직하자 이에 가담하여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소아마비 소녀 미나코(美奈子)는 태평양전쟁으로 미군의 동경 대폭격이 시작되자 오사카로 내려갔다가 다시 산골마을 나가노 지방으로 피난을 하게 된다. 열 살의 나이로 신체장애자의 입장에서 겪은 전쟁의 참상은 어땠을까? 정상인도 아닌 소아마비 환자가 부모님과 떨어져 낯선 산골에 살면서 겪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전쟁에 대한 쓰라린 기억을 그린 《치쿠마가와 강변에서 (千曲川のほとりで)》라는 동화집이 지난해 나와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이 책을 감수(監修)한 다카모리(高林敏夫) 씨는 기자에게 동화책을 보내오면서 이 책이 일본에서 인권교육, 평화교육, 복지교육에 활용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 책은 신문과 NHK방송 등 일본 언론에서 학동소개(學童疏開) 70주년이라는 주제로 다루고 있는데 소개(疏開)란 공습이나 화재 따위에 대비하여 한곳에 집중되어 있는 주민이나 시설물을 분산을 뜻하는 말로 일본에서는 태평양전쟁 시기에 미군의 집중 폭격을 피해 주민과 학생들의 소개가 자주 있었다. 열 살의 가녀린 소아마비 소녀 미나코는 사랑하는 부모형제와 헤어져 소개지(疏開地)였던 나가노현에서 동경의 장애자학교인 동경도립광명양호학교에 들어가 이 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