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유동하 선생은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의 하얼빈 방문소식이 보도되자 국민회 원동위원들과 대동공보사 관련 인물들은 이토 히로부미 처단계획을 논의하였고 이 과정에서 선생은 부친의 명을 받들어 안중근과 우덕순을 하얼빈역까지 무사히 동행하고 연락을 담당하여 의거를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이 일로 투옥되어 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석방된 이후 러시아로 복귀하여 러시아 한인사회의 민족운동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거로 체포된 유동하와 우덕순, 조도선 등은 심문과 재판과정 내내 관련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 진술과 위증으로 일관하였으며 안중근 의사는 시종일관 자신의 단독 결행임을 주장하였고 그 외의 관련자들도 사전에 약속한 내용만을 진술하였다. 1909년 10월에 들어서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를 처단할 것을 논의한 결과 명사수인 안중근 의사가 추천되었으며, 유동하의 부친인 유경집과 우덕순,조도선,김성화,탁공규 등이 구국혁신을 맹서하고 연서한 뒤7인 동맹을 조직하였다. 이 동맹은 의거를 구체
[한국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아직 추운 겨울이지만 한라산에서는 복수초가 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2월 18일치 <온라인한라일보>에 “최근 제주시 절물자연휴양림에 '봄의 전령사'인 복수초가 노랗게 하나 둘씩 피어 방문객을 반기고 있다. 새봄을 알리는 복수초는 '얼음새꽃' '설연화' '원일초' 등의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고 있다. 복과 장수를 의미하는 한자어로 구성된 복수초의 꽃말은 '영원한 행복' '슬픈 추억'이다. ”라며 복수초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름만 들어서는 무슨 원한 관계에 있는 꽃인가 싶지만 여기서 말하는 복수초(福寿草)는 복수(復讐)와는 전혀 다른 꽃이다. 노란 햇병아리 같은 어여쁜 꽃 이름이 왜 하필 복수초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복수초(福寿草, フクジュソウ, 후쿠쥬소-)란 이름은 일본에서 부르는 이름을 한자말로 우리가 따다 부르는 것이다. ▲ 눈을 뚫고 올라와 핀 얼음새꽃(국립공원관리공단 제공)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없다.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복수초” 풀이가 있지만 어디에고 꽃이름의 유래는 없다. 풀이를 보자. “미나리아재빗과의 여러해살이풀. 높이는 25~30cm 정도이며, 잎은 어긋나고 세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교토 동지사대학 교정의 매화는 이제 막 꽃망울을 피우고 있었다. 붉은 꽃, 흰 꽃송이가 긴긴 겨울을 이겨내고 곱게 피어났다. 매화꽃 교정을 거닐면서 나는 맑고 순수했던 윤동주 시인의 자취를 행여 느낄 수 있을까 싶어 정문에서 도서관과 예배당으로 이르는 붉은 벽돌의 건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동지사대학 교정에는 홍매화가 가득 피었다. 교토 동지사대학 안의 예배당과 핼리스이화학관 사이에 있는 윤동주 시비는 이제 교토를 찾는 한국인들에게는 명소가 되었다. 내가 이곳을 처음 찾은 것은 1995년 2월 16일 윤동주시인 순국 50돌을 맞아 시비(詩碑)를 세운 몇 달 뒤의 일이었다. 그때는 시비가 들어선지 얼마 안 되어서 인지 학교 정문의 수위 아저씨에게 물어 보아도 시원하게 시비가 서 있는 위치를 잘 설명해주지 않아 여러 건물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헤맸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 쯤 뒤부터였을까? 동지사 정문 수위실에 “윤” 자만 말해도 한글판 “윤동주” 안내문을 내줄 정도로 윤동주는 동지사대학의 유명인이 되었고 나는 해마다 윤 시인을 만나러 동지사를 찾았다. 그가 떠난 교정에 검은 빗돌만 서있는 외로운 모습이지만 그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보고 싶고 그리운 아버지 어머니! 학산 윤윤기 선생 입춘이 지나니 겨울 추위가 한풀 꺾인 느낌입니다. 이제 봄인가 싶지만 바깥세상은 아직도 한 겨울인 듯 어수선하기만 합니다. 아버지 품안에서 한없는 재롱과 어리광 한번 부리지 못한 채 어느새 일흔다섯해의 봄을 맞는 둘째딸 종순이가 아버지 영전에 이렇게 붓을 들어 편지를 올립니다. 평생을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동분서주 하시며 민족교육의 올곧은 길을 향해 뛰시던 아버지를 대관절 무슨 죄로 쉰 한 살의 나이에 철사 줄에 묶인 채 처참한 생을 마감해야 했는지 아버지 나이를 훌쩍 넘게 살아오고 있는 이 여식은 그 때 일만 생각하면 참담하고 마음이 아픕니다 옥돌은 가루로 만들어도 색을 변하게 할 수 없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항상 조선인임을 잊지 말라고 가르치셨던 아버지의 제자들은 이제 백발이 성성하지만 지금도 또렷하게 아버지에 대해 회상하고 계십니다. 그러한 조선인들은 옥처럼 푸른빛을 간직한 채 험난한 일제강점기를 헤쳐 나와 기필코 조국을 되찾았으며 아버지가 바라던 8.15 해방날 학교 운동장에 모든 사람이 모였을 때 5세된 저도 끼어서 함게 만세를 외쳤습니다. 북, 장구, 꽹가리,
[한국문화신문 = 교토 이윤옥 기자]대덕사(다이토쿠지, 大徳寺)의 대덕이란 이름은 절이 건립되기 전의 고려(高麗) 연호지요. 그런데 스님은 1459년 대덕사의 주지가 조선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그 한국인 주지가 바로 전대의 주지를 지낸 여소이며 그 스님을 그린 화가 문청도 조선인 이라는 것을 아시는지요? 이는 미국인 최초로 일본미술사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1901~96) 박사가 그의 책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2008』의 대덕사 삼문(三門)의 고려 16나한상 편에서 한 말이다. 기자는 2월 14일(토) 어제 오후 2시쯤 교토시 서북쪽 외곽에 있는 임제종 사찰인 대덕사를 찾았다. 임제종대덕사파 총본산인 만큼 규모도 엄청나서 30만평 부지에 말사만도 23개소에 달하고 있는 절이다. 평소 코벨 박사의 글을 읽기도 했거니와 기자 역시 일본 속의 한국문화를 찾아 글을 쓰는 사람으로 교토에 발걸음을 한 김에 코벨 박사의 발자취도 돌아 볼겸 대덕사를 찾았다. 날씨는 쾌청했으나 약간 쌀쌀했다. 교토역에서 버스로 금각사 방향으로 40분을 달리면 닿는 곳이다. ▲ 삼문(일명 金毛閣) 안에는 고려시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윤동주가 대랍자 소학교에 다니던 1931년 늦가을 윤동주의 집은 명동에서 북쪽으로 30리쯤 떨어진 해란강 하류의 소도시 용정으로 이사했다.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무장단의 출몰이 잦아지자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신변안전이 보장되는 도회지로 이주한 것이다. 용정은 한인들이 모여 사는 거점도시로 일본 간도 총영사관이 위치해 있었다. 중국 관청이 밀집한 연길(延吉)과 더불어 북간도의 양대 거점을 이루었던 용정에서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은 인쇄소를 차리고 도회지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내 실패하고 그 뒤 포목점을 비롯한 다른 사업에도 손을 대어 보았지만 부진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집도 과수원이 딸린 큰 기와집에서 용정가 제2구 1동 36호의 20평 정도되는 초가집으로 바뀌어 옹색한 생활을 해야 했다. 용정에서 윤동주는 1932년 4월 명동소학교 동창인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은진중학교에 진학하였다. 16세 때의 일인데, 이름을 아명인 해환 대신 윤동주로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은진중학교는 영국덕이라 불린 용정 동남쪽 구릉에 위치한 미션스쿨로 명신여학교, 제창병원과 함께 캐나다 장로회 선교부에서 운영하던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윤동주(尹東柱,1917.12.30~1945.2.16)는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견주어 노래한 민족시인이다. 시인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에서 아버지 윤영석(尹永錫, 1895-1962)과 어머니 김용(金龍, 1891-1947)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명동촌은 1899년 2월 함경북도 종성 출신의 문병규(文秉奎), 김약연(金躍淵), 남종구(南宗九)와 회령 출신의 김하규(金河奎) 네 가문의 식솔 140여명이 집단 이주해 세운 한인마을로, 북간도 한인 이주사에 이정표를 마련한 곳이었다. 윤동주 집안의 북간도 이주는 증조부 되는 윤재옥(尹在玉)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윤재옥이 43세 때인 1886년 부인과 4남 1녀의 어린 자녀들을 이끌고 본래 살던 함북 종성군 동풍면 상장포를 떠나 두만강 건너편 자동(紫洞. 현재의 자동(子洞))에 처음 자리잡으면서, 윤동주 집안의 북간도 생활은 시작되었다. 북간도 이민 초창기에 자동으로 이주한 윤재옥은 부지런히 농토를 일구어 주변에서 부자 소리를 들을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한국에는 예전에 서당이 있어 아이들의 글공부를 전담했다. 그렇다면 일본에도 서당이 있는가라고 묻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있다. 한국의 서당과 같지 않지만 일본에는 테라코야(寺子屋)라는 곳에서 아이들의 교육을 맡았다. 테라코야(寺子屋)는 한자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절집(테라)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에서 유래한다. 한국의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중심으로 한 선비들이 글공부를 통해 과거시험을 치러 정계로 나갔지만 일본에는 가마쿠라 막부 성립 (1192) 이후부터 명치 때까지(1868) 약 670여 년간 무사정권시대이다 보니 차분하게 글공부를 시킬 상황이 되지 못했다. 권력을 장악한 무사들은 자신이 싸워서 쟁탈한 정권을 빼앗기지 않게 늘 방어를 해야 했기에 일본의 670여 년간은 한마디로 사무라이들의 싸움판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내전 상태였기에 글공부를 하고 앉아 있을 여유는 없었다. 붓 대신 칼의 시대였다. 그래도 글줄께나 하던 사람은 절집의 승려들이었다. 따라서 일찍부터 절에서는 아이들 교육을 맡아 했는데 여기서 테라코야(寺子屋)가 한국의 서당 구실을 했던 것이다. 일본의 테라코야의 시작을 흔히 중세의 절에서부터 잡고 있지만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유동열 [1879~1950] 선생은 1879년 3월, 평안북도 박천군에서 아버지 유종식과 어머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나 19살 때 사촌형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 체류하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예비학교인 성성학교(成城學校)에 입학, 이를 계기로 군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선생은 대한제국 장교로서 노백린이동휘 등과 함께 비밀결사 효충회를 결성하여 친일파 대신의 암살을 계획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1909년 대한제국 참령(소령)으로 군대를 떠났으며, 이후 서우학회와 신민회, 서북학회에 관여하는 한편,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중국 북경으로의 망명했다. 이후 선생은 독립군 자금 모집을 위해 북경은 물론 국내각지에서 활동하다 1911년 8월 일제가 조작한 소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으며 신한혁명당, 한인사회당, 고려공산당을 창립하고, 고려군정의회를 설립, 군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한 후 선생은 중국관내에서 중한민중대동맹을 조직하고 임시정부에서는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40년 광복군 창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2월 3일은 일본의 절분(세츠분, 節分) 날이다. 보통 입춘 전날을 절분으로 치는데 새로운 계절이 돌아오는 때 특히 추운 겨울이 끝나고 사람들이 활동하기 좋은 때에 귀신도 슬슬 활동하기 좋은 때라고 여겨서인지 이날 사악한 귀신을 물리치기 위한 콩 뿌리기(마메마키) 행사가 절이나 신사에서 있다. “복은 들어오고 귀신은 물러가라(福は內、鬼は外)”라고 하면서 콩을 뿌리고 볶은 콩을 자기 나이수 만큼 먹으면 한해동안 아프지 않고 감기도 안걸리며 모든 악귀에서 보호 받는다는 믿음이 있다. 절분행사는 예전에 궁중에서 했는데 《연희식, 905년》에 보면 색색으로 물들인 흙으로 빚은 토우동자(土牛童子)를 궁궐 안에 있는 사방의 문에 걸어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인형은 대한(大寒) 전날 밤에 만들어 입춘 전날 밤에 치웠다. 토우동자 풍습은 헤이안시대(794-1185)의 츠이나(追儺)와 밀접한데 이는 곧 귀신을 물리치는 행사로 이후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로 내려오면 토우동자의 장식은 사라지고 복숭아 나뭇가지를 신성시 하면서 콩뿌리는 행사로 변한다. 복숭아 나뭇가지는 고대 중국과 한국에서도 귀신을 쫓는 주술적인 나무로 통했다. ▲ 절분날 볶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