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1868년 고려 평양 서문안 문열사 앞에서 탄생하여 모친은 칠 일만에 죽고 아버지 품에서 여러분의 유즙(젖 : 필자)을 얻어먹고 자라 초 구세에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니 남의 집으로 다니며 머슴살이로 고생하면서 십오 세가 되므로 나이 두 살을 올려 평양 중국의 보단(步段)으로 호병정(胡兵丁) 설(設)할 때 우영(右營) 제 일대대에서 코코수(나팔수:필자)로 사연을 있다가(복무하다가: 필자) 사연을 치고 도망하여 황해도 수안 총령(蔥嶺) 종이뜨는 지막 제지소에 와서 종이뜨기를 배워 삼년을 뜨다가 그때는 어느 때인고 하니 병술(丙戌:1886년) 정해(丁亥:1887년)쯤 되었다.(홍범도 일지-리함덕 등사본) 연해주 협동농장에서 일하던1929년 재혼한 부인 이인복과 손녀의 모습 내가 홍범도 일지를 처음으로 읽은 것은 1993년 여름, 모스크바에서입니다. 모스크바 세레메치예보 공항 가는 방향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던 작가 김세일(세르게이 표도르비치)는 나에게 서가 깊숙이 보관하고 있던 홍범도 일지를 가져와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했지요. 지금은 시대가 좋아 복사기가 있지만 나는 1950년 대 중반. 이 일지를 고려인 노(老)혁명가 리인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이수흥[1905~1929] 선생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경기 이천 출신의 대학자 이식의 후손으로 이천 공립보통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한때 입산하여 승려생활을 하였다. 1923년 19세 때 만주로 망명해 통의부와 참의부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참의부는 국내 진공작전을 활발히 전개하였으나 1925년 일제의 기습 공격으로 고마령에서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었다. 선생은 독립군 활동이 주춤해지자 조선총독을 비롯한 고관들을 처단함으로써 침체된 무장투쟁의 분위기를 되살리고자 1926년 5월 국내로 들어왔다. 선생은 참의부 제2중대 특무정사 자격으로 황해도 평산을 거쳐 경성에 잠입한 후 동소문파출소에서 일제 경찰과 교전을 벌였다. 독립군 자금 모집을 위해 안성 부호의 아들을 처단하고, 이천 현방경찰주재소와 백사면사무소를 공격하였다. ▲ 이수흥 선생 일제 경찰은 선생의 신장이 5척에 불과하다는 단서를 잡고 관내에 거주하던 키 작은 젊은이들 조사하였다. 3천 여 명이 동원된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투쟁을 이어가던 선생은 반역자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선생은 3년의 예심 끝에 경성지방법원으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춘곡 임치정(林蚩正, 1880. 9. 26 ~ 1932. 1. 9 )선생은 1880년 평안남도 용강군 산남면 홍문동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이 되던 1900년까지 약 7~8년간 한문을 수학한 선생은 1903년 하와이 노동이민에 자원하여 아내를 고국에 남겨둔 채 단신으로 도미하였다.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선생은 사탕농장에 배속되어 노동자로서 미주생활을 시작하였다. 1903년 8월 7일 선생은 홍승하, 윤병구, 안정수, 이교담, 박윤섭, 문홍석, 임형주, 김정국 등 주로 기독교 감리교 출신 인사와 유학생들과 함께 구국정신 고취와 항일운동을 목적으로 미주 최초의 정치운동단체인 신민회를 창립하였다. 신민회 창립 후 선생 등은 동족단결, 민지계발(民智啓發), 국정쇄신을 강령으로 설정하고 홍승하를 회장으로 선임하는 한편, 같은 해 12월 2일에는 하와이 카우아이(kauai)와 카파(kapaa) 지방에 지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1907년 8월 27일 이강이 국내로 파견된 것을 기점으로 이재명, 오대영이 파견되었고, 10월 24일에는 이재명의 매국적 처단 협조와 국내와의 통신연락을 위해 선생이 국내로 파견되었다. 선생은 1907년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나의 소원은 모든 나라 사람들이 나의 조국인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국제인이 되는 첫걸음을 내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교토에 고려미술관을 세운 정조문 선생이 고려미술관개관기념 도록에 쓴 인사말이다. ▲ 조각보(고려미술관 소장) ▲ 검은 칠 나전 화조문양 상자 (고려미술관 소장) 일본에서 평생토록 우리 문화재를 수집해 온 고 정조문(1918~89) 선생은 1925년 일본에 건너가 갖은 고생 끝에 사업에 성공하여 교토를 제 2의 고향으로 여기며 살았던 분이다. 그는 1949년 골동품상이 밀집해 있는 교토 산조(三條) 남쪽 거리를 걷다가 어느 한 가게 진열장에 놓인 둥그런 조선 백자 달항아리를 보고는 그 아름다움에 반해 당시 돈으로도 엄청난 금액을 주고 이 달항아리를 사들이게 된다. 물론 정조문 선생이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그는 달항아리를 사고 싶어 자그마치 1년 동안 돈을 모았고 마침내 달 항아리를 손에 쥐게 되는데 그에게 이 골동품은 호사가들이 손쉽게 사들이는 골동품 이상의 것이었다. ▲ 교려미술관 전경(왼쪽), 정조문 선생이 1년 동안 꼬박 돈을 모아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벽화마을로 알려진 통영의 동피랑(통영의 어시장인 중앙시장 뒤 동쪽 벼랑이란 뜻의 마을에 알록달록한 벽화를 그려 유명한 곳)이 있다면 충남 공주에는 그 보다 더 아름답고 소박한 정취를 자아내게 하는 곳이 있는데 바로 유구문화예술촌이다. 서울행 버스가 들고나는작은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 걷다보면 마을 곳곳에 눈에 띄는 벽화가 나그네의 시선을 끈다. 요즈음 요행하는 벽화마을 인가 싶어 자칫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이곳은 마을 담벼락을 적당히 페인트로 색칠한 곳이 아니다. 비록 지금은 퇴락했지만 이곳은 한때 한국 최고의 자카드 직물을 만들어 내던 섬유산업의 산지(메커)였다. ▲ 유구면 소재지 유구문화예술촌 거리에는 비단을 붙인 집도 있다. 자카드라는 직물이란 커튼 재료 같이 무늬를 새겨 넣은 원단으로 이해하면 좋은데 공주시 유구 일대는 일찍이 우리나라에서 자카드 직물의 대표적인 생산지였다. 이곳은 6.25 한국 전쟁 때 북한에서 섬유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많이 내려와 1970~80년대까지 130개 업체에서 3,000여명의 종업원들이 일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던 곳이다. ▲ 페인트 칠이 아니고 모자이크로 작품 하나하나가 우아하다.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지난번에 제2중부고속도로에 "길어깨 없음"라는 선간판이 눈에 거슬려 사진을 찍어 올린 적이 있는데 어제 또 다시 충청권에서 이 간판을 보았다. 당진대전간 고속도로 금강다리 앞 200미터 쯤 되는 곳에는 "공사중"이라는 팻말이 곳곳에 보이다가 "길어깨 없음"이라는 간판이 서 있다. 이 말은 지금 "갓길"로 고쳐써서 부르는데 한국도로공사는 왜 이 말을 줄곧 쓰는 것일까? 이 말은 일본말 로카타(路肩,ろかた)에서 온 말로 일본국어대사전 《다이지센, 大辞泉》에 보면 “路肩 : 道路の有効幅員の外側の路面” 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번역하면 ‘도로에 유효폭원의 외측 노면’이다. 곧 로카타(路肩)의 한자를 한국음으로 읽어 ‘노견’이라 했으며 한동안 우리가 쓰던 말이지만 이젠 '갓길'로 쓴다. ▲ 당진대전간 고속도로 금강 다리 200여 미터 앞 지점에 서 있는 "길어깨없음" 안내판 ▲ 제2 중부고속도로 갓길에 서 있는 '길어깨 없음' 안내판 원래 이것은 영어의 “road shoulder”에서 온 말로 일본사람들이 이를 직역하여 ‘노견, 路肩’으로 쓴 것이다. 이제 겨우 '갓길'로 정착 되었나 싶었는데 이 무슨 해괴한 표기란 말인가! 오이코시(추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안공근 [1889~1940] 선생은 1889년 7월 황해도 신천군에서 안태훈 진사와 조씨 사이에서 3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부친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으며 1906년 가족과 함께 진남포로 이주하여 삼흥학교 등에서 영어 및 일본어를 배우고 1907년 3월 경성사범학교 속성과를 마친 후 진남포 공립보통학교에서 아동들을 가르쳤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거 직후 중국 대련에서 안중근 의사를 면회하고, 사형이 집행된 후 여순의 공동묘지에 장사지내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일제의 가혹한 탄압이 가해지자, 망명을 선택하게 된다. 형 안정근과 함께 1910년 5월경 평양에서 북간도를 거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들어갔고, 안중근의사의 주요 활동지이자 단지동맹의 근거지인 연추로 옮겨가 안창호선생의 도움으로 정착하였으며, 1912년 6월부터 상트페테르브르크와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어를 배웠으나 경비부족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1914년 4월경에 우수리스크로 돌아와 형이 개설한 상점에서 일하던 중 1914년 9월에 김정국처단사건을 주도하였고 형 안정근과 함께 대규모 농장 경영을 통한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에 힘쓰기도 하였다. 1
[한국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김원식선생은 1907년 7월 이후에 강원도 북부에서 군사를 모아 활동을 전개한 항일의병장이다. 그는 일제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친일파들을 척결하고 한국의 자주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반일활동을 전개한 애국지사이다. 1904년 2월 러일전쟁 이후 일제는 한국에 대한 침략정책을 본격화하였다. 이어 일제는 1905년 11월의 을사늑약과 1907년 7월의 정미조약-군대해산을 통해 한국의 국권을 탈취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일제에게 내정과 외교상의 모든 권한을 빼앗기고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이러한 민족적, 국가적 위기상황 속에서 전국 각지에서 애국지사들이 분연히 일어나 치열하게 항일활동을 펼쳤다. 정미조약-군대해산 이후에 일어나 강원도 북부에서 활동한 김원식도 그러한 의병장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정미조약-군대해산 이후에 강원도 북부의 산악지대에서도 의병이 크게 일어났다. 이들 항일의병들은 1907년 9~10월 2달간 춘천관찰부를 포위하고 거센 공격을 펼쳤을 정도로 세력을 떨쳤다. 당시 평민과 향리의 후손인 박선명, 최천유, 지홍민, 최영석, 길희정 등은 분연히 일어나 춘천 인근에서 항일활약을 펼쳤다. 이로써 강원도의 의병피해자가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경상남도 사천에 있는 보안암은 1947년 5월에 세워졌으나 실제 석굴은 고려 후기에 승려들의 수도장으로 이용되었다고 전해진다. 자연석을 계단식으로 쌓아올린 분묘형(墳墓形)의 석굴로 외부형태는 앞면 9m옆면 7m 가량의 사각형에 가까운 모습이다. 정면에는 둘기둥을 세워서 입구를 만들고 있으며, 윗면은 완만하게 경사를 이룬 둥근 모양이다. 석굴 안에는 높이 1.8m 가량의 석조여래좌상 1구와 자연석을 소박하게 다듬은 16나한상이 있다. 천장은 긴 돌 2개를 동서로 걸치고 다시 그 위에 또 하나의 긴 돌을 걸치고 있는 모양이다. 인공으로 만든 이 석굴은 규모나 평면 형태, 모시고 있는 불상 등에서 비록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석굴암 석굴(국보 제24호)과 군위삼존석굴(국보 제109호)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경상남도사천시문화관광과055-830-4226 1972.02.12 문화재 지정일
[한국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오늘은 92년 전인1923년 김상옥 의사의 일제하 서울 시가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날이다. 1대 1천. 일제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김상옥 의사를 상대로 정예기마대와 무장경관 1,000여 명을 동원하여 체포 또는 사살을 명하였다. 그러나 김상옥 의사는 쌍권총만 지닌 혈혈단신으로 일경 16명을 처단하고 남은 한방으로 자결하였다. ▲ 김상옥 의사 그 애(김상옥 의사)가 자랄 때 온갖 고생을 했어요. 옷 한 가지 변변한 것을 못 얻어 입히고 밥 한술도 제대로 못 먹였으며 메밀찌꺼기와 엿밥으로 살았지요. 어려서 공부가 하고 싶어 '어머니 나를 삼 년만 공부시켜 주세요' 하던 것을 목구멍이 원수라 그 원을 못 풀어 주었습니다. 낮에는 대장간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을 하는데 시간이 급하여 방에도 못 들어가고 마루에서 한 숟갈 떠먹고 갈 때 그저 체할라 체할라 하던 때가 엊그제인데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아들의 주검 앞에서 흐느끼는 어미의 심정을 어찌 다 말로 하랴. 그런 아들 김상옥 의사([18901923)는 야학을 통해 민족의식을 싹 틔우게 되고 급기야는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한 최일선에 서서 그간의 소극적인 방법을 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