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1852-1919)는 1910년 5월 제3대 한국통감부 통감으로 부임하여 한일병탄에 앞장 선 인물이다. 그 공로로 그는 초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게 되는데 일제가 고종황제를 독살하고 황후를 시해한 뒤 빼앗은 조선의 총독이란 결코 한국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없는 인물이다. ▲ 현재 야마구치현립대학에 있는 데라우치문고는 얼마나 많은 조선의 전적류를 약탈해 갔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사진 오른쪽은 조선총독 데라우치 특히 그는 항일운동을 벌이는 독립투사들을 탄압하는데 앞장섰기에 선열들은 데라우치총독 암살을 꾀했다. 최중호 독립투사도 1911년 조선침략의 우두머리인 조선총독 데라우치 암살 계획에 앞장서다 투옥되었던 분이다. 이처럼 선열들은일제의 앞잡이들 처단에 목숨을 바쳤다. 조선인의 머리 꼭대기에서 조선인을 함부로 죽이고 다루는데 앞장선 데라우치는 그런 죄만 있는 게 아니다. 용서 할 수 없는 일이 어디 하나둘이랴만 더 기가 막힌 것은 한국의 고문헌들을 통째로 도둑질한 죄다. 그는 조선총독시절 규장각 등에 함부로 드나들면서 값나가고 귀중한 문헌은 모조리 싹쓸이 해 갔는데 얼마나 많이 훔쳐갔으면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섭씨 50도 물이란 손을 대면 매우 뜨겁다는 느낌이 들 정도인데 이러한 뜨거운 물에 채소를 씻으면 어떻게 될까? 보통 상식으로는 채소가 익어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본에서는 최근 뜨거운 50도 물에 채소를 씻어 먹는 일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한국에도 알려진 기적의 50도 세척법은 지금 일본열도를 열광케 하고 있는 데 이를 발견한 사람은 스팀조리기술연구회 대표 히라야마 잇세이(平山一政)씨다. 그는 지난해부터 기적의 50도 세척법을 개발하여 전국의 티브이 방송예약이 꽉 잡혀 있을 만큼 바쁘다. 한마디로 기적의 50도 세척법은 50도 물에 채소나 과일을 씻어 먹으면 농약이나 채소에 붙은 나쁜 물질을 씻어낼 뿐 아니라 신선도가 유지되어 재료의 맛도 살아난다는 것이다. 이는 50도의 열 충격에 의해 채소가 호흡하는 기공이 열리고 그 기공에서 순간적으로 물을 빨아들여 잃어버린 수분을 보충하기 때문에 채소가 싱싱하게 되살아나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지금까지 주부들은 미지근한 물이나 찬물에 푸성귀나 과일을 씻어 왔는데 히라아먀 씨가 착안한 50도 물 세척법은 그간의 상식을 뒤엎는 일로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한 놀라운 발견이라는 반응이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이준 열사께서 이국땅에서 돌아가신지 올해 107년이 되었습니다. 1907년 헤이그에서 열렸던 만국평화회의에 고종황제의 신임장을 들고 이위종, 이상설 과 함께 참석하려 했으나 입장마저 허락받지 못하고 비통하게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열사께서는 항일 독립운동의 서막을 알렸습니다. 제가 이준열사에 대하여 좀 더 가깝게 알게 된 것은 저희 대학 선배이신 송창주 관장님을 뵙게 된 이후입니다. 헤이그에 이준 열사 기념관 마련하고 거의 이십년을 지키고 계신 분이였는데 제가 동창회장을 맡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서울에 오셔서 한번 만나자고 하셨지요. 그 때 이준 열사님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해주시고 헤이그에 돌아가신 후 관련 책자를 보내주셨습니다. 기념관 운영이 매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어 얼마 안 되는 후원금을 드리려 했는데 이제까지 개인적인 후원금을 받은 바 없다고 하시며 받지 않으셔서 더욱 죄송했습니다. ▲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던 이준, 이위종, 이상설의 모습 선배님께서 그 동안 하신 일이 너무 귀하여 동문회에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추천을 드릴까 하고 나중에 연락을 드리니 한사코 사양하셨습니다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활어를 고르는 사람들 갈치가 주먹만하다 건어물시장이 길게 늘어서 있다 갓김치에 대한 자랑이 한창인 아주머니 늘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은 잘 모른다. 자신이 몸 담고 있는 곳이 어떤곳인지 말이다. 그러나 어쩌다 가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하다. 여수 수산시장은 부끄럽지만 난생 처음이다.특별히 여수 쪽 연고가 없다보니 여수까지 가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향일암이나 오동도 까지는 그래도 발걸음을 해보았지만 여수 수산시장 까지는 발걸음을 옮겨 보지 않았다.모처럼 기회에 들른 여수 수산시장은 여느 시장이 주는 활기 그 이상이다. 펄떡거리는 활어가 있는 가하면 잘 말린 건어물도 객지인에게는 구경거리다. 거기다가 갓김치로 유명한 고장답게 수산시장 한켠에서'갓김치'를 파는 아낙은 기웃 거리는 기자에게 한 번 맛보란다. 이쑤시개 하나를 뽑아 잘게 썬 갓김치를 한 입에 쏙 넣어보니 '밥도둑'이란 생각이다. 싱싱하고 맛깔스러운게 입안 가득 갓향이 알싸하다.1킬로그램에 1만원. 수산시장 상인들의 활기찬 모습을 둘러보고 나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박재혁 (1895~1921) 선생은 1895년 부산 범일동에서 아버지 박광선과 어머니 이치수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나 사립육영학교(현재 부산진초등학교)에 들어가 근대적 교육을 받았고, 부산상업학교(구 부산상고 전신, 현 개성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최천택(崔天澤)오택(吳澤)과 의형제를 맺고 독립운동에 몸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 1913년 선생과 최천택 등은 구세단을 조직, 활동하다 체포되기도 하였으나,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에만 전념할 수 없어 1917년 6월 거금 700원을 조달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한 후 중국, 싱가포르 등지에서 무역상으로 일하면서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였고, 1920년 4월경 상해에서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참여하게 된다. ▲ 박재혁 선생 의열단은 1920년대 전반기 암살과 파괴 방식으로 강도 높은 의열투쟁을 벌인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로 주요 일제기관들에 대한 동시 투탄거사 계획을 세우고 준비에 착수하였으나 관련자 20명이 체포되어 거사가 좌절되자 이에 대하여 복수를 결의하게 되었다. 선생은 동지들과 더불어 동래 부산에서 거사를 계획하고, 일제 식민통치의 상징인 총독부를 폭파하려고 하였으나, 일제경찰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1898년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서림면(西林面)에서 김문환과 임천 조씨의 장남으로 태어난 김성숙(1898.3.10~1969.4.12,호:雲巖) 선생은밭일을 도우며, 한문과 소학교 공부를 하였다. 1916년 서간도로 망명하려다가, 양평의 용문사(龍門寺)에서 불교에 입문하고태허(太虛)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8년 경기도 광릉에 있는 봉선사(奉先寺) 월초(月初) 스님의 문하로 들어가, 불교 교리를 공부하고 근대사회과학에 눈떴다. 3.1운동 때에는 양주, 포천 등지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 김사국을 통해 사회주의사상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진 듯하다. 1921년 봄 출옥 후에는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무산자동맹회 활동에 참여하였고, 김한, 조봉암 등과 교류하였다. 1923년 초 승려 5명과 함께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하여, 민국대학(民國大學)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한 선생은 사회주의에 관한 해박한 지식으로 한인 유학생사회에서 이름을 떨쳤다. 선생의 숙소가 한인아나키스트들의 집단거주지였던 사실에서 시사되듯이, 선생은 의열단(義烈團) 단원 및 한인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면서, 진보적인 근대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2013년 2월 옛 일본 조계지였던 곳에 있는 한 집을 소개 받았어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이집이 내집 이라고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집 입구부터 안쪽으로 길게 복도가 늘어서있고 중간에는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있지요. 복도와 나란히 있는 방들은 내 기억 속의 일본 집에 돌아온 느낌입니다. 시댁 식구들은 편한 아파트 생활을 버리고 왜 불편한 집으로 이사 가느냐고 우리를 말렸습니다. 이는 인천관동미술관(갤러리)의 안주인 도다이쿠코 작가의 말이다.1930년 무렵 지어진 허름한 일본 주택을 구입하여 이곳을 미술관으로 꾸민 사람은 사진작가 류은규 씨와 일본인 아내 도다이쿠코 작가다. 어제 (1월 14일) 기자는 인천 중구 관동에 있는 인천관동미술관을 찾았다. 건물 외관은 말끔하게 정리되었지만 내부에는 미술관 공사를 막 마쳐 아직잔 정리들이 약간 남아 있었다. ▲ 인천관동미술관 2층과 3층 다락방, 다락방 위에는 천장을 뚫어 자연채광이 들어 오도록 했다. 다락방 아래가 2층으로 지금 개관 준비 중이다. ▲ 1층 미술관 내부, 그림 준비 중 인천관동미술관이 들어선 이곳은 1883년 인천개항과 더불어 건너온 일본인들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왜 당신은 늘 그 모양일까? 왜 당신은 열등감을 극복 못하는 것일까? 왜 당신은 행복을 실감 못하는 것일까? 왜 당신은 과거에 함몰되는 것일까? 이는 한국에서 《미움 받을 용기, 원제 嫌われる勇氣》라는 책으로 출간되어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일본판 책 광고 문구이다. 우리들은 매 순간 남으로부터 미움 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간다. 미움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인정받고 싶고 더 나가서는 사랑받고 싶어 하는 삶을 추구하며 산다. 그러나 그것은 말같이 쉬운 일이 아니다. 주변으로부터 사랑 받고 싶어 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미움 받지 않고 사는 일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미움 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늘 몸과 마음을 긴장해야 한다. 주변인을 의식해야 하는 것이다. 때로는 얼굴표정서부터 말투, 옷차림 하나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태도에서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꾸밈이 필요하고 이러한 꾸밈 때문에 우리는 늘 불필요한 에너지를 써야한다. 바로 이러한 점을 《미움 받을 용기》에서는 과감히 청산하라고 한다. ▲ 《미움 받을 용기》로 한국에서 번역된 책의 일본 베스트셀러 嫌われる勇氣
[한국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1908년 3월 23일 오전 9시30분경 샌프란시스코 페리 부두 정거장 앞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려 한국민족운동사상 첫 의열투쟁이 만천하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장인환(張仁煥,1876.3.10~1930.5.22)과 전명운(田明雲), 두 의사가 한국정부의 외교고문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일제 한국침략의 앞잡이로 광분하던 미국인 스티븐스(durham w. steve ns)를 총살 응징한 것이다. 스티븐스가 일본 정부와 한국 통감부의 특별 밀명을 띠고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페리 정거장에 도착, 승용차에서 내려 페리빌딩에 들어서려는 순간 역사적인 의거가 일어난 것이다. 육혈포라 불리던 권총을 들고 대기 중이던 전명운 선생이 먼저 앞으로 다가서며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실탄이 총열과 맞지 않아 불발하고 말았다. 이에 그는 총대를 잡고 총두로 스티븐스의 얼굴을 맹타하고 돌아서 달아나려 하였고, 스티븐스는 그를 뒤쫓아 잡으려 하였다. 이 순간 스티븐스의 뒤에서 역시 권총을 품고 기다리던 장인환이 세 번 방아쇠를 당겼다. 첫발은 스티븐스와 전명운이 뒤엉켜 움직이는 바람에 빗나가 도리어 전명운의 어깨에 관통상을 입혔고, 제2발은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원수 왜적은 우리 민족을 없애려고 배로 나르고 차로 날라 바다 속에 넣으려 하니, 우리 백성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오호라! 저들이 있고 우리가 없어지든 우리가 살고 저들이 없어지든 사생을 결단해야 하니, 이 형세를 장차 어찌 하리오? 전국의 신민이 모두 창의(倡義)하는 마음으로 뭉쳐 있으니, 4천년 역사와 5백년 종사, 이 어찌 소중하지 않겠는가? 이는 구한말에 덕유산을 무대로 삼았던 의병장 문태수 [1880-1913] 선생이 1908년 2월에 발표한 격문의 한 구절이다. 여기에는 우리 민족의 전력이 투입되어 구국의 성전(聖戰)으로 승화된 의병전쟁이 한창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결사항전을 각오한 선생의 굳은 신념이 생생하게 배여 있다. ▲ 호남의병대장 문태수 문태수 선생은 1880년 3월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신기(장구지) 마을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남평이고, 본명은 태진(泰珍)으로 알려져 있으며, 자가 태수(泰洙) 혹은 태서(泰瑞)였다고 한다. 어려서 선생은 마을 서당에서 사서삼경 등 한학을 공부하여 유교적 소양을 갖추었으며, 17세 되던 무렵 태어난 동네에서 육십령 너머의 장수군 계북면으로 이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