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계봉우 [1880~1959] 선생은함경도 영흥에서 태어나 1910년 함흥 영생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이동휘 선생을 따라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여 구국계몽운동에 투신하였고, 북간도로 망명 후 민족주의 교육에 헌신하였다. 『신한독립사』, 『조선역사』, 『오수불망(吳讐不忘)』 등을 편찬하였으며, 북간도 연길 소재 광성학교(光成學校) 교사로 활동하다가 연해주로 건너가 이상설, 이동휘가 주동하던 대한광복군정부의 책임비서와 「건업신문」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건업신문」에 10회에 걸쳐 『만고의사 안중근젼』을 연재하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한 선생은 하마탕 후하(後河)에 교회와 학교를 세워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다 1916년 11월 하마탕의 자택에서 일제 영사관 경찰의 습격을 받아 체포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 계봉우 선생 출옥 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한 선생은 중국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북간도 대표의원으로 부임하여 1년간에 걸쳐 의정 활동을 하였고 이듬해 중한노공동맹연합회 국민회 대표로 참가하였으며, 유동열, 이탁과 함께 임시정부 간도특파원으로 임명되어 간도지방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위해 노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성탄절 법당을 찾아 가는 발걸음은 묘했다. 오래전부터 성탄절날 스님들이 함께 캐럴송을 부르고 반대로 부처님오신날 개신교 목사님들이 함께 석가탄신을 축하하는 모습은 언론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기자가 직접 그 현장을 찾아 가보기는 처음이다. 열린선원 (원장, 법현스님)은 역촌동 시장 안에 있는 절이다. 절이라고 하기 보다는 도심 속의 포교당이라고나 할까? 재래시장이 주는 이미지에 걸맞는(?) 낡은 2층 건물을 오르자마자 왼쪽에는 교회가 차지하고 있고 그 교회를 거쳐 끝자락에 열린선원이 있다. ▲ 역촌동 열린선원 법당에서는 조촐히 성탄절 축하 케잌을 잘랐다 25일 성탄절 오전 11시인데 교회당 유리문은 닫혀있었다. 아마도 성탄전야 행사를 치뤘지 싶다. 반면 법당은 하나둘 아기예수 나심을 축하하러 오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이날 법당을 찾아온 사람들은 불교신자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었는데 모두 하나같이 타 종교지만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마음은 같았다. 열린선원을 찾아 온 사람들은 손에 손에 케잌을 들고와 법당에서 예수의탄생을 축하하며 촛불을 끄고 케잌을 나눠 먹으며 담소를 즐겼다. ▲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이제 슬슬 한 해가 가고 새해가 다가온다. 우리나라처럼 음력을 세시풍속에 쓰지 않는 일본에서는 모든 것이 양력 기준이다. 설날도 마찬가지다. 설날이라고 해야 우리처럼 차례를 지내는 것도 아니어서 그 분위기 또한 사뭇 다르다. 한국과 새해 풍습이 가장 다른 점은 일본인의 신사참배 모습일 것이다. 같은 신사참배라고 해도 설날에 하는 신사참배를 특별히 하츠모우데(初詣)라 부른다. 하츠모우데란 새해 정초에 신사나 절에서 한 해의 운수대통을 빌며 건강히 소원성취를 이루기를 비는 행사이다. 그래서 이맘때쯤이면 인터넷에서는 전국의 유명한 신사(또는 절)를 소개하느라 야단법석이다. 2006년 경찰청 집계를 보면 1위가 메이지신궁(明治神宮, 도쿄, 310만 명), 2위 나리타산 신승사(成田山新勝寺, 치바현, 275만 명) 3위 후시미이나리대사(伏見荷大社, 교토, 269만명)..... 8위 다자이부천만궁(太宰府天宮, 후쿠오카, 200만 명) 등으로 순위를 매기고 있다. ▲ 2015년 일본 전국의 유명한 하츠모우데 신사(또는 절) 안내 누리집 경찰청에서 발표한 새해 하츠모우데(신사참배)한 인원을 다 더해보면 2006년 통계로 9,373만 명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부정을 행하기보다는 굶어서 죽는 편이 영광이다. 선생님의 지난 활동은 우리의 마음속에 간직되어지금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앞으로도 선생님을 본보기로 삼으며, 또한 저희들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주어야 한다고 느끼게 합니다. 가인 김병로 선생님께서는 지난 일제강점기 시절 항일투쟁에 앞장선 안창호 선생님 그리고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무료 변론을 해주셨고, 또한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인 변호사 단체를 만드신 점에서 선생님은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중에서 절대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장석천 [1903~1935] 선생은 1903년 전남 완도군 신지도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마치고 1918년경 서울로 올라와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일본인 교사의 조선인 차별과 인격적 모멸에 저항하여 보성고보로 전학하였다. 수원고등농림학교에 진학한 선생은 1926년 동맹휴학에 연루되어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하였지만 4개월 만에 광주로 돌아와 청년회 활동에 투신하였다. 당시 광주청년회는 시내 중등학교를 중심으로 비밀결사의 조직과 지원에 힘을 쏟고 있었다. 그 결과 1926년 11월 초에 광주고등보통학교, 광주농업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을 주축으로 '성진회'가 결성되었다. '성진회'는 이듬해 3월 해산되었지만 '성진회' 출신 학생들을 중심으로 각 학교에 연구모임이 지속되었고, 1929년 6월에 독서회로 발전하면서 학생운동이 활성화되었다. 광주청년동맹 집행위원이던 선생은 학생들을 지도하며 독서회 결성을 후원하였고, 아울러 신간회 광주지회 상무간사로서 전남지역 단일 청년연맹 조직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9년 11월 3일, 제1차 광주학생 시위가 일어났다. 한일 학생들 간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이종희 선생은 1890년 4월 19일, 전라도 금구현에서 태어났다. 조선조 정여립사건, 한말 동학 남접의 조직을 비롯하여 금산사를 배경으로 한 미륵신앙의 혁명적 사상과 역사를 토대로 민족의식을 키워나간 선생은 1919년 전후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다. 선생은 망명 후 1919년 조직되어 일본인 관리 암살 및 관청파괴를 주도한 의열단에 정식단원으로 가입하여 의열투쟁에 투신하였다. 1925년 북경에서 밀정 김달하 처단 거사에 참여한 선생은 1926년 1월에 광주로 이동하여 다른 10여 명 단원들과 함께 황포군관학교 제4기 보병과에 입학해 재광동조선혁명군인회와 유월(留#31925)한국혁명동지회에 참여하면서 혁명운동의 열기를 만끽하고 새로운 운동의지를 다져갔다. ▲ 이종희 독립투사 1926년 10월에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소위로 임관한 선생은 남창 주둔 국민혁명군 부대에 배속되어 근무하면서 의열단 남창지부원으로 계속 활동하는 한편 1932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으로서 한인청년 사관 양성에 힘썼다. 이러한 청년 투사 양성 및 조직의 운동역량 강화로 의열단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고, 1935년
[한국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이 터(사직단)에는 이렇게 백성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그런 근대 역사의 흔적을 지우고 왕조적 발상으로 사직단을 복원한다는 것은 참으로 무지한 일이다. 중앙집권적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민족주의 부흥의 제단을 복원하기에 앞서, 사직단의 본래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식량 위기에 처한 국가를 살리는 대책부터 세워야 하지 않을까? 아는 사람이 카톡으로 2014년 12월 16일자 한겨레신문에 실린 조한혜정 씨의 사직단은 누가 왜 복원하려는 걸까? 를 찍어 보냈다. 멋모르는 사람들은 글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하트모양의 이모티콘을 날리고 있다. 찬찬히 그의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어? 이건 아닌데 싶어 몇 자 적는다. ▲ 종묘사직을 대변하던 사직단, 헐리고 축소되어 초라한 모습이다 ▲ 오늘날 사직대제를 지내는 것을 단순히 예산만 잡아 먹는1회성 행사로 보면 안된다. 조한혜정 씨는 한겨레신문의 칼럼을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사직단 복원 건으로 전국이 술렁이고 있다. 올해 4월 사직단 복원 촉구 결의안을 통과시킨 국회의원들은 역사성과 민족정기 회복을 위하여 일제에 의해 영역이 축소되고 훼손된 사직단의 복원을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슬슬 연말이 되면 일본 상점가에는 연말연시 집안을 장식하는 물건들이 쏟아져 나와 이방인의 눈을 사로잡는다. 집 대문에 다는 시메카자리(しめ飾り)를 비롯하여 시메나와(注連, 금줄), 카도마츠(門松, 대문 앞에 세워두는 장식 소나무), 카가미모치(鏡餠, 집안에 진설하는 찹쌀떡) 따위가 일본의 연말연시에 집 안팎을 장식하는 물건으로 이것들은 모두 나쁜 액운을 막아주는 신성한 부적 구실을 하는 물건들이다. ≪일본민속사전(日本民俗事典)≫에 보면, 시메나와(注連)를 특히 신성한 장소를 구분하려고 치는 줄로 다양한 모양이 있다고 나와 있다. 말하자면 시메나와는 굵은 새끼줄 모양의 금줄로 흔히 신사(神社)의 신전 입구에서 많이 보는 것이지만 가정에서는 가미다나(神棚, 신전) 또는 도코노마(床の間, 족자를 걸어두는 신성한 곳)등에 걸기도 한다. 이때는 굵기가 가는 금줄을 쓴다. 군마현(群馬縣) 적성산(赤城山) 서쪽 산록지방에서는 마을 입구에 금줄(注連繩)을 쳐두고 이곳을 통과할 때는 항상 언행에 조심하도록 하는 등 지역에 따라서는 금줄 신앙이라고 할 만한 흔적이 남아 있는 곳도 있다. ▲ 시메카자리, 카가미모치, 시메나와, 카도마츠(왼쪽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박찬익 [1884~1949] 선생은1884년 1월 2일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성년이 되기까지 서당에서 유학을 공부한 선생은 20세가 되던 1904년, 서울의 농상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일본인 교사와의 마찰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후보안회에 참여하여 일제의 황무지개척 요구안에 반대투쟁을 하며 민족문제를 자각하게 되었고 신민회에도 가입하여 서북지역에서 계몽교육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11년 2월에 만주로 망명한 선생은 종교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대종교를 받아들이고 대종교 포교와 독립운동에 온 힘을 다하였다. 같은 해 4월에 유하현 삼원포에서 남만주 지역 최초의 독립운동 조직인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설립에 참가해 독립군기지 건설에 앞장섰고 간민교육회ㆍ중광단에 참여하였으며 그 밖에 화룡현에 청일학교(靑一學校), 봉림동과 백초구에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함은 물론, 신흥무관학교에서 중국어와 한국역사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후 임시정부의 좌우합작에도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렇듯 오랜 기간 독립운동에 앞장선 선생은 해방 후에는 주화대표단을 구성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동포들의 귀국을 돕는 등 민족의 안녕을 위해 헌신하였으나 19
▲ 임시정부의 품 안에서, 김자동, 푸른역사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임시정부 가족 일행은 1939년 4월 4일 버스 다섯 대에 나눠 타고 광시성의 류저우(유주)를 출발해 충칭(중경)으로 향했다. 내 나이 겨우 12살에 중국 창장(장강) 이남의 넓은 지역을 두루 여행한 셈이었다. 7살 이전에 상하이(상해), 자싱(가흥) 등에서의 기억은 거의 나지 않지만 그 후 5년 남짓 동안의 여정은 어린 나에게도 큰 경험이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은 이번에 나온 《임시정부의 품 안에서, 도서출판 푸른역사》 책에서 그렇게 말했다. 12살 때 벌써 드넓은 중국 땅 상해에서 중경까지 무려 5천 킬로미터의 임시정부 피난길을 경험한 김자동 회장이야말로 임시정부에서 태어나 중경에서 광복을 맞고 귀국하여 현재도 임시정부 관련 일을 하고 있으니 임시정부의 산증인이라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12월 12일(금) 저녁 6시 광화문 경희궁 뷔페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주최의 송년회가 조촐히 열렸다. 이 자리에서 기자는 김자동 회장이 쓴 《임시정부의 품 안에서》 한 권을 받아와서 바로 그날 저녁 단숨에 이 한 권을 읽어 내려갔다. 김자동 회장은 2년 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