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고속버스를 타기 위해 바쁘게 걸음 하는 도중 눈에 일본말 대합실(待合室, まちあいしつ)이란 글자가 눈에 띈다. 아직도 저렇게 일본말을 버리지 못하는 까닭이 뭘까? 인천공항 가는 리무진대합실도 보이고, 제주도의 우도도항선대합실도 있다.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 쓰인 일본말 대합실 그 뿐이랴 이번엔 연극에도 대합실이 등장하고, 해녀대합실이란 음식점까지 성업중이다. 굳이 잘 쓰고 있는 대합실을 가지고 왜 시비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아름다운 말이 있는데도 일본말을 고집한다면 그건 일제강점기에 추억을 가지고 있거나 내심 그때가 좋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모른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으로 탄광에 끌려간 조선인들이 죽지 못해 입에 밥알 한술 뜨는 좁고 지저분한 곳을 뜻하는 함바를 식당으름으로 쓰는 사람들은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건가? ▲ 제주도의 우도도항선대합실 ▲ 인천공항 가는 리무진대합실 ▲ 연극 이름에 등장한 대합실 ▲ 버젓이 음식점 이름이 된 대합실 그동안 여러가지 일로 말이 많았던 코레일(KORAIL)마저도 저렇게 맞이방이란 아름다운 말을 쓰고 있지 않은가? 새참과 끼니, 시민청 귀빠진 날, 도남도남,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박자헤 선생은 1895년 12월 11일 경기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중인 출신의 박원순이고 어머니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어린시절 아기나인으로 입궁해 약 10여년 궁중생활을 하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궁녀 신분을 벗어난 후 숙명여학교 기예과에 입학해 근대교육을 받고, 졸업 후 사립 조산부양성소를 다녔다. 졸업 후 경제적인 독립을 위해 조선총독부의원 산부인과의 간호부로 취업하였다. 1919년, 간호부 근무 당시 31만세운동으로 병원에 부상 환자들이 줄을 잇자, 많은 부상자들을 치료하던 과정에서 민족의 울분을 느끼고 함께 근무하는 간호사들을 모아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주장하였다. 박자혜 선생 선생은 일제의 기관에서 일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져 직접 행동에 나서기로 하고 선생도 직접 31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간우회를 조직하였으며, 동 병원의 의사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갖고 간호사들에게 동맹파업에 참여할 것을 주창하였고,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었다가 병원장의 신병인도로 풀려났으며, 이후 북경으로 건너갔다. 북경에서 연경대학 의예과에 입학한 선생은 북경생활 1년여를 지낸 1920년 봄, 평생의 반려자 신채호 선생을 만나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오면직(1894. 6. 15. ~ 1938. 5. 16. ) 선생은 황해도 안악 출신으로 양산학교와 평양 대성중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였다. 1920년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 안악지국 기자로 활동하다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 활동을 지원하였다. 선생은 1922년 스승인 김구 선생의 권유로 한국노병회에 가입한 후 한국노병회 파견원 신분으로 중국 하남성 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31년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 상해부 및 남화한인청년연맹에서 활동하였으며, 한,중,일 아나키스트가 조직한 항일구국연맹에서 기관지인 '자유'를 발행하였다. ▲ 오면직 독립투사 선생은 1932년 홍구공원 폭탄 투척 모의에 참가하였으며, 1933년 아리요시(有吉) 주중일본공사 암살을 시도하였다. 1934년 비밀결사대인 한국독립군특무대에서 김구 선생의 비서로 활동하였다. 선생은 1936년 한국맹혈단을 조직하여 친일파 처단 및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일제에 체포되어 1938년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에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의열투쟁으로 일제에 항거한 오면직 선생을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오늘은 1941년 12월 10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극악한 일제국주의에 대해 대일선선포고를 감행한 날이다. 임시정부가 중경에서 당,정,군의 체제를 갖추고 활동을 시작할 때 제국주의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미국의 해군기지인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다. 일본의 선제공격을 받은 미국은 즉각 일본과 전쟁에 돌입하였으며 태평양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이를 흔히 태평양 전쟁이라 부른다. 태평양 전쟁은독립운동가들에게는 하나의 위기로 느껴졌으며이것을 계기로 일본의 지속적인 세력 팽창을 우려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독립운동의 전략도 바뀌는데 그것은 민족의 군대인 독립군을 양성하여 일본이 중국,미국 등과 전쟁을 벌일 때 이들과 함께 대일전쟁을 전개하여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이 당시 주요 전략이자 독립을 위한 계획이었다. 임시정부는 미일간에 전쟁이 일어나자 즉각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발표 하였다. 일제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지 이틀 후인 12월 10일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외무부장 조소앙 명의로 다음과 같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한 것이다. 아래는 그 성명서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선전 중신성명서 우리는 3천만 한인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대한한공 조현아 부사장의 봉지 땅콩 서비스 사건에 대해 일본 언론들이 신이 났다. 지지통신(時事通信)을 비롯한 일본의 많은 언론에서 이 문제를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 한 언론은 영국 가디언 8일자를 인용하여 조현아 부사장은 객실승무원의 서비스 매뉴얼을 문제로 삼았으나 그 보다 더 큰 문제가 불거졌다. 앞으로 대한항공은 절대 안탄다. 차라리 북한의 고려항공을 타는 게 낫다.고 보도하기 까지 했다. 그러면서 한국 누리꾼의 반응도 상세히 보도했다. 이런 부끄러운 일은 일찍이 없었다. 능력 없는 인간이 대한항공의 부사장을 하고 있다는 게 국제적인 창피다., 왜 하필 지을 이름이 없어서 코리언에어(대한항공)라 지었냐? 대한이라는 이름이 들어가지 않는 이름으로 바꿔라., (조현아) 신한류스타 탄생 등 뿔난 누리꾼들의 반응을 여과 없이 보도하고 있다. ▲ 일본 언론들은 대한항공 조현아 부사장의 행동을 대대적으로 보도히고 있다. 한국의 언론보도만으로도 부끄러운데 시끄러운 일본의 언론들이 신이 난듯 보도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 않다. 자초지종이야 알려진 그대로지만 업무상 비행기를 종종 타야하는 사람들은 이번 조현아 부사장의 봉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중국 하면 북경, 상해와 같은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여행하기 불편한 곳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인식 때문에 도시 이외의 장소는 아무리 유명한 곳이어도 아직 여행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불편함에도 딱 한 곳은 가보고 싶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은 살면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백두산을 방문할 일이 생겼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회사의 사장님의 권유였습니다. 저희 회사는 어린이, 청소년 대상의 금융교육을 진행하는 교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한국의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해 처음 들어보았어요. 내 또래의 젊은이들은 이런 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기회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역사적 진실을 말해주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특강을 계기로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카무라 사쿠라 (한국외대 유학생) 양은 정확한 한국어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어제 8일 오후 6시부터 한국외대 인문관 309호에서는 일본인 유학생을 위한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에 대한 특강이 있었다. 이날 참석한 일본인 유학생들은 연세대, 이화여대, 서강대, 한국외대에서 유학하고 있는 학생 10여명으로 이들은 주로 한마당(ハンマダン)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한일간의 문화교류 등을 하고 있는 윤조자 교수(전 명지전문대 교환교수)와 뜻을 같이 하는 학생들이었다. ▲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있는 일본유학생들(2014.12.8, 한국외대) 이날 강의는 기자가 맡아서 했는데 나는 한국의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해 전혀 사전 지식이 없는 이들을 위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다가 지난 10월 17일 일본 도쿄 쵸후시(調布市)에서 일본시민
[한국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윤병구 [1880~1949] 선생은 1903년 10월 5일,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에 정착하여 목회자로서 그리고 미주사회의 중심인물로서 한인사회의 화합과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에 평생을 바친 분이다. 미국으로 건너가기 이전,한성사범학교에서 헐버트의 영향으로 기독교 목회자의 길을 선택한 선생은 하와이 이민 후 한인 동포를 대상으로 한 전도활동에 전념하는 한편 하와이에서 조직된신민회를 통해 국권회복 활동과에와친목회를 결성하여 일본 상품 배척 및 동포들의 친목과 권익보호를 위해 힘썼다. ▲ 윤병구 선생 1905년 7월 12일, 선생은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러일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 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하고자 이승만과 함께 워싱턴으로 가서 직접 청원서를 전달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미국 정부는 일본과 비밀조약을 체결해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를 묵인한 후였다. 1907년 8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한국특사로 활동한 이상설과 이위종이 이준 열사의 자결 후 뉴욕에 도착했을 때, 박용만의 주선으로 선생도 이들의 외교활동에 합류하게 되었다. 구국 외교활동을 추진하기 위해 유럽순방외교를 떠난 후 약 6개월 후인 1908년 3월
[한국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양근환 [1894-1950] 선생은 1894년 5월 9일 황해도 연백군 은천면에서 태어나 18세에 사립 동명학교를 졸업하고 20세가 되던 1914년에 서울에 올라와 공업전습소를 다녔다. 서울에 머물러 있는 동안 선생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강한 불만을 품게 되었고 한때 조선보병대에 입교하여 일본인과의 다툼으로 체포되어 50일간 구류를 살기도 하였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즉시 고향에 내려가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였고,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에서의 항일투쟁이 어려워지자 일본으로의 유학을 결심하였다. 도항 후 일제에 대항할 힘을 기르기 위해 니혼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하였으나 가난으로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만다. 31운동 이후 일제가 문화정치를 표방하자 친일단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그 중 국민협회는 신일본주의를 내세우며 총독부를 적극 지지하였고 친일파 규합운동에 앞장섰다. 회장인 민원식은 내선일체론을 주장하며 참정권 운동을 주도했고, 1921년 2월 이를 위해 일본 도쿄를 방문하게 되었다. 선생은 민원식의 방문 소식을 듣고, 그를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다. 1921년 음력 2월 16일 도쿄역 호텔 제14호
[한국문화신문= 이윤옥 기자]윤기섭 [1887~1959] 선생은 1887년 4월 4일 경기도 파주의 해평 윤씨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강원도 철원의 문장가 박초양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서울 보성학교를 제1회로 입학하여 1909년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이후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민족교육에 종사하였고, 신민회에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1년 선생은 안명근사건과 105인사건 으로 이승훈 등이 구속되어 옥고를 치르면서 오산학교가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되자, 1911년 8월,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로 망명하여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함께 한인 자치기관 경학사를 설립하고, 산하에신흥무관학교' 를 창립하여 10년간 학감 및 교장을 역임하면서 수많은 군사 인재를 양성하였다. ▲ 윤기섭 선생 1920년 2월 말 임시의정원 서간도 의원으로 상해에 도착한 선생은, 독립전쟁 뿐만 아니라 외교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여 1921년 11월 태평양회의에 참석하는 각국의 대표들에게 독립청원서를 발송하였다. 1926년 12월부터 1935년까지 임시정부 국무원으로 선임되어 군무장 등으로 활약한 선생은 독립운동정당 통합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1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