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일본에서 붓글씨로 유명한 스님을 들라하면 홍법대사 쿠우카이(弘法大師 空海 774-835)를 들 수 있다. 홍법대사도 붓글씨를 실수할 때가 있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학문이 깊고 붓글씨도 잘 썼던 쿠우카이 스님은 일본에서 유명한 스님이지만 그의 스승인 곤조대덕(勤操大德, 754~827)은 그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곤조대덕이 우리에게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이 스님이 고대한국계 출신이기 때문이다. 곤조스님은 신라계로 알려진 하타(秦)씨 출신으로 12살에 나라 대안사(大安寺)에서 출가한 이래 삼론종의 거장으로 알려진 분으로 당시 사가천황(嵯峨天皇)은 곤조스님을 대극전(大極殿)에 초청하여 법회를 가질 정도로 왕실의 신임이 두터웠던 스님이다. 곤조스님에 대한 이야기로 유명한 일화가 있다. 곤조스님이 한 절에 있을 때의 이야기다. 그 절에는 영호(榮好)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영호스님은 늙고 병든 어머니를 절 아래에 살게 하고는 끼니때가 되면 항상 자기의 먹을 것을 동자를 시켜 갖다드리게 했다. 그리고는 동자로부터 어머니의 근황을 듣곤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영호스님이 이름 모를 병에 걸려 갑자기 죽게 되자 더 이상 아랫마을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홍병기 [1869~1949] 선생은 1869년 11월 5일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에서 홍익룡과 한익화 사이에서 2대 독자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무예를 닦아 19세 때인 1887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24세 때인 1892년에 동학에 입교한 선생은 손병희의 휘하에서 무장, 영동, 보은, 음성, 공주 우금치전투 등에 참가하였다. 1905년 12월 동학이 천도교로 바뀐 후 천도교의 중앙총부에서 천도교의 정책과 노선을 결정하는 중요한 교직자로 활동하였다. 이후 1910년 한일합방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갖고 있던 선생은 1918년 말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것을 알고 우리 조선도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하여 독립이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1919년 2월 10일 무렵 권동진을 만나 구체적인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한 선생은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참석하여 민족대표와 함께 독립선언식을 참석하였고 독립선언식 거행 직후 곧 일본관헌에 체포되었다. 홍병기 독립투사 선생은 심문을 받을 때 판사가 피고는 금후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고 묻자, 그렇다. 기회만 있으면 운동을 할 것이다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김도연 [1894~1967] 선생은 경기도 김포(현 강서구 염창동)에서 아버지 김종원과 어머니 초계정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나 7세 때부터 한학을 익히고, 우국인사들이 세운 태극학교(太極學校)에 입학해 근대학문을 배웠으며 졸업 후 보성중학교에 입학하여 민족의식을 함양하였다. 이후 1913년 일본 긴조중학교(錦城中學校) 3학년에 입학한 선생은 반도중학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였고, 졸업 이후 게이오대학(慶應大學) 이재과(理財科)에 들어가 일본 유학생의 중추 조직이었던조선유학생학우회에서 총무로서 학우회의 각종 활동을 주도하였으며, ymca 총무 백남훈을 도와 청년회 회장직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동경 2.8 독립선언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출옥한 뒤찍은 사진(김철수,윤창석,김도연,최팔용,백관수,송제백,서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접한 동경유학생들은 일제의 압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동경시내에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를 펼치기로 계획하여, 약 2개월에 걸쳐 준비한 끝에 1919년 2월 8일 조선ymca회관에서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모임의 명칭을 동경유학생 임시총회로 하기
[한국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술 사케를 좋아하십니까? 예라고 한다면 사케로 유명한 니가타의 술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도 좋을 법하다. 명술의 탄생에 필수 조건으로는 쌀, 물, 기후, 기술을 꼽는데 제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술의 재료가 좋지 않고는 당해낼 재간이 없음을 말해준다. 일본의 북부에 있는 니가타는 곡창지대로 고시히카리라는 쌀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 니가타현의 사케(일본술)는 술을 빚기 위한 술쌀(酒米)을 따로 재배할 만큼 이 지역사람들의 사케 사랑은 각별하다. 이곳의 사케는 니가타산 쌀로만 빚으며 고햐쿠만고쿠(五百万石)는 대표적인 술빚기용 쌀이다. ▲ 벌써 내년 술축제 포스터가 나왔다. 쌀에 이어 니가타의 물을 보자. 니가타에는 땅속에 칼슘과 마그네슘이 거의 없고 강수량이 많은데다가 경사가 급하고 짧은 냇물이 많은 관계로 지하수 체류 시간이 짧아 사케에 좋은 물이 공급된다. 연수는 술을 장기간 발효 시키는데 좋다. 자, 다음의 명주 조건인 기후를 보자. 니가타의 기후는 여름에는 기온이 높고 맑은 날이 이어져 쌀 재배에 좋은 날씨다. 뿐만 아니라 겨울에 산간부를 중심으로 내리는 눈은 너무 춥거나 덥지 않게 적정한 기온을 유지시켜 효모 같은 미생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사랑하는 나의, 우리의 그리고 대한의 벗 그대여! 그대가 걸어온 길, 그 마음 언저리라도 가보고저 그대의 발자취를 따라 걸었소. 참으로 멀고도 먼 곳, 어인 마음으로 그리도 멀리 가셨소. 홀어머니, 아내와 피붙이 즈려밟고 조국 향한 그 마음 하나에, 그리도 멀리 가셨소. 이름 없이 떠나간 수많은 청춘들의 조국 향한 뜨거운 피 자식 기다리는 홀어머니 초롱불처럼, 가는 길 환히 밝혀주는구려. 1909년 10월 26일 09시 30분. 멈춰진 하얼빈역 시계처럼 그대와 우리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구자룡의 시는 죽은 김소월이가 돌아 온 것 같다. 소월이 죽은 지 30년도 넘었는데 아직까지 소월타령을 하고 있느냐? 그동안 세월이 얼마나 많이 흘렀는데 젊은이들의 의식구조가 부족하다 이는 부천시청역 갤러리에서 진달래꽃 김소월을 추억하다 전시회를 열고 있는 시인 구자룡이 들려준 이야기다. 구자룡 시인 (70살)은 대학시절 시화전을 열었는데 국문과 교수가 건대학보 (1964년, 185호)에 학생시인 구자룡, 개인 시화전을 보고 라는 평 속에 자신을 이렇게 평했다고 했다. 좋은 평인지 나쁜 평인지 그 의도야 어디 있던 간에 구자룡 시인의 김소월에 대한 짝사랑은 일찍부터 있었던 것 같다. ▲ 자신이 모은 김소월 관련 책을 하나하나 설명하는 구자룡 시인의 모습은 마치 소중한 보물을 다루는 듯하다 그 은사님은 소월의 진달래꽃이나 읊고 있는 국문과 제자들이 별로 맘에 안 들었던 모양이지만 이제 김소월은 누가 뭐래도 국민시인이다. 그러한 국민시인을 구자룡 시인은 일찌감치 알아보고 소월의 시를 흠모했다. 잔디 잔디 금잔디 / 심심산천에 붙은 불은 가신님 무덤가에 금잔디 /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도 / 봄빛이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어제 제2중부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니 재미나다기 보다 좀 딱한 선간판(입간판)이 눈에 들어와 몇자 적는다.갓길 공사 중인지곳곳에 세워둔 선간판에는 길어깨 없음이라고 적혀있다. 길어깨? 갓길에 대한 웃지 못할 이런 발상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말은 일본말 로카타(路肩,ろかた)에서 온 말이다. 일본국어대사전 《다이지센, 大辞泉》에 보면 路肩 : 道路の有効幅員の外側の路面 이라고 풀이하고 있다.번역하면 도로에 유효폭원의 외측 노면이다. 곧 로카타(路肩)의 한자를 한국음으로 읽어 노견이라 한 것이다. 제2중부 고속도로 서울행 경기도 광주 초월면 지점 그러나 원래 이것은 영어의 road shoulder에서 온 말로 일본사람들이 이를 직역하여 길어깨를 뜻하는 한자말이다. 노견, 路肩이 그것이다. 이것을한국인들이 들여다 줄곧 쓰다가이제 겨우 '갓길'로 정착 되었나 싶었는데 이 무슨 해괴한 표기란 말인가! 오이코시(추월, 앞지르기로 순화), 가시기리(대절, 전세로 순화) 따위의일본말이어디 하나둘이겠느냐만은제2중부 고속도로 갓길에 세워둔 길어깨라는말이야 말로 제 것의 본디 뜻을 생각지 않고 무늬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우재룡 [1884~1955] 선생은 1884년 1월 3일 경상남도 창녕에서 단양우씨 채희와 진주강씨의 6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나 일곱 살 되던 해에 글공부를 시작했으나 문인적 소양보다는 무인적 성향이 강했는데 이는 부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02년 대한제국 군인으로 대구 진위대에 입대하여 군대해산이 이루어지는 1907년까지 5년간 근무 하던 중 정용기 산남의진 의병장을 만나 큰 감화를 받아 민족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선생은 대구 진위대에 근무하던 중 군대가 해산되자 청송의 '산남의진'을 찾아가 의병전쟁에 참여하여 연습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병사들을 훈련시켜 의진의 전투력을 향상시키는데 기여하였고 일본군과의 20여 차례 전투를 벌이며 서울 진공작전을 추진하였으나 체포되어 1908년 9월 14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소위 내란죄로 종신유형 처분을 받았으나 합방특사로 풀려나게 된다. ▲ 우재룡 선생 1915년 7월 15일(음), 박상진과 함께 대구에서 광복회 결성에 참여하여 비밀ㆍ폭동ㆍ암살ㆍ명령의 4대 행동강령을 두고 군대식으로 만든 광복회 지부와 연락기관 및 독립군 양성을 위한 사령부로서 길림광복회를 설치하고, 군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백일규 [1880-1962]선생은 평안남도 증산군 성도면 오화리에서 부친 백린과 모친 송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어려서 한학을 배운 선생은 동학에 깊이 공감하고 접주로 활동하였으나 한계에 부딪치자 미주 유학을 결심 1905년 6월 9일 진남포를 출발하여 일본 고베를 거쳐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하와이 에와사탕수수 농장의 고딘 노동 중에도 선생은 에와친목회에 가입하여 윤병구 강영소 등과 함께 국권 회복을 위한 방책을 논의하였고 이후 미주 본토인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문양목의 후임으로 대동보국회 중앙회장겸 대동공보의 주필에 선임되어 일본의 침략 정책을 규탄하는데 앞장섰다. ▲ 미주 한인사회에서 독립운동에 앞장선 백일규 선생 1908년 미주 한인사회의 반일여론은 같은 해 3월 23일,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스티븐스 저격사건으로 극대화되었다. 이는 일본의 한국 침략이 정당하다고 선전하는 대한제국 외교고문에 대한 응징이자 일제에 대한 경고였다.의거 직후 선생은 7인 전권위원회를 구성하여 양 의사의 재판을 후원하고, 석방을 위해 노력함은 물론 의거의 정당성을 알리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1910년 국권이 침탈되고 무단통치가 자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뭘 그리 잘못해 그런 고난 겪었나? 조국 사랑이 언제부터 죄이던가? 이제 갓 열다섯 곱디고운 나이 사랑한번 못해보고 꽃은 시들었네 - 강민주 (Manly Selective High School, Year 11) 희생한 삶 가운데- 우리는 알지 못하였습니다 조국의 독립과 민족을 위해 순국하신 수 많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였습니다 조국의 독립과 민족을 위해 희생하신 수 많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김채현(Marsden High School, Year 10)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가운데- 호주 시드니 동포 41명의 학생들이 빚어내는 언어는 그 어떤 시인의 노랫말보다 아름다웠다. 41명의 나라사랑 정신은 그 어떤 독립군 못지않게 기상이 드높았다. 지난 11월 17일 호주 시드니에서는 제75회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이 있었는데 이 날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 광복회호주지회(지회장 황명하)가 지난 1년간 마련한 여성독립운동가에 관한 영문판 책을 펴내는 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 호주 동포학생들이 펴낸 영문판 시집 표지 (한글부분은 참고로 붙인 것이며 원래는 영문만 있다) 그간 호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