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일본인은 인물은 부드러우나 능히 굳건하고, 굳건하지만 또한 오래 가지 않는다. 약하지만 능히 인내하며 인내 하지만 또한 떨치고 일어나지는 못한다. 총명하지만 지식이 편벽되고 민첩하고 예리하지만 기상이 국한되어 있다. 능히 겸손하지만 양보하지는 않으며 능히 베풀지만 사물을 포용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기이한 것을 숭상하며 가까운 것을 기뻐하고 먼 것은 소홀하다. 고요한 곳을 즐기고 여러 사람이 모여 사는 것을 싫어한다. 본업을 편안히 여기며 분수를 기쁘게 지킨다. 일정한 규율을 지키며 감히 한 치도 나아가거나 물러나지 않는다. 이는 조선후기 시인이자 저술가였던 원중거(元重擧, 1719-1790)가 제11차 조선통신사(1763)로 참가했다가 지은 화국지(和國志) 인물 편에 나오는 글이다. 화국지는 18세기 조선 선비의 눈으로 일본의 지리와 역사, 학문과 생활문화, 제도와 한일관계 등을 저술한 백과사전이다. 당시 조선통신사로 함께 일본에 갔던 조엄(1719-1777)이 일본의 문화와 학술에 대하여 일본의 학술은 암흑이라 해도 좋으며, 일본의 문장은 소경이라 할 수 있다.고 평한데 견주면 원중거의 시각은 좀 더 세밀하고 폭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전국의 동포들은 다같이 풍파를 만난 배를 탄 신세입니다. 그런즉 앉아서 고래 떼처럼 악독한 왜놈들에게 잡혀 먹히기 전에 서로 분발하여 의병을 일으켜 그들을 쳐부순다면 우리 강토를 회복하고 종묘사직을 안정시키는 일은 오늘의 거사에 달려 있습니다. (중략) 엎드려 바라건대 조정의 벼슬아치나 산림의 숨은 인재들은 저더러 그러한 자격이 못된다고 하지 말고 각자 의분심을 일으켜 함께 큰 일을 치루어 나간다면 천하 만국이 또한 반드시 우리를 호응하게 될 것입니다.(심남일 「격고문」) 심남일선생은 1908~9년 사이에 전라남도의 3대 의병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서당 훈장과 향교의 교임을 지낸 함평 출신의 유생이었으나, 일제의 국권 침탈이 날로 심각해지자 의병에 투신하였다. 처음에는 기삼연이 주도하는 호남창의회맹소의 기삼연 의병부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 군경의 강력한 공세를 받아 의병장 기삼연, 김율 등이 차례로 순국하자 사방에 흩어져 있던 의병들을 불러 모아 1908년 음력 2월에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 호남의 3대 의병장 가운데 한 분인 심남일 의병장 심남일 선생은 의병 활동의 경험을 살려 신속하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김익상 선생은 1895년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 지금의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에서 태어났다. 목재 장사를 하던 부친이 일본인에게 속아서 재산을 잃고, 집안형편이 어려워지자 선생은 재학 중이던 삼호보성소학교를 그만두고 철공소 견습공으로 취직했다. 1919년 광성연초회사로 직장을 옮긴 후 1921년에 중국 봉천 지점의 기계 감독으로 발령을 받았다. 어릴 적부터 비행사의 꿈을 품고 있던 선생은 중국으로 건너간 이후 비행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심하고 광동으로 갔다. 그러나 당시 광동의 호법 정부는 북벌에 치중하느라 비행학교를 운영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꿈을 접게 된 선생은 북경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런데 북경에서 의열단장 김원봉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 만남은 선생이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위해 생명을 받쳐 헌신할 것을 맹세하고 의열단원이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19년 11월 중국 길림성에서 조직된 의열단은 조선총독 이하 고관 및 친일파 거두와 밀정 등을 7가살(七可殺)로 규정하고 일제식민통치기관을 파괴대상으로 하여 의열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의열단 가입 후 선생은 김원봉과 함께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다대기는 어쩌라고.' 12일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는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실질적 타결과 관련 농림축산식품부로부터 긴급 현안보고를 받고 피해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이날 여야 의원들은 쌀 등이 양허대상에서 제외된 점을 들어 정부의 노력을 대체로 인정했지만, 김치와 다진양념(다대기)의 관세가 인하되는 부분에 대해선 우려를 표시했다. 이는 2014년 11월 12일치 머니투데이 기사 가운데 일부다. 이 기사는 제목을 마늘은 안되고 다대기는 되나한중FTA, 눈가리고 아웅 이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다대기란 일본말이며 한국에서는 다진양념으로 쓰고 있는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 일본말 다다기(tataki, たたき)를 살펴보건대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말 다진양념의 뜻과는 전혀 다른 말이다. ▲ 머니투데이 갈무리 (11월 12일자) 일본의 다다기는 두 가지를 일컫는데 일본대백과전서 日本大百科全書에 따르면, 다다기는 요리를 말하며 가다랭이(가츠오)를 훈제식으로 살짝 불에 익혀서 썰어 먹을 때 양념으로 파, 무, 마늘을 곁들이는 것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정어리 등의 생선에 칼집을 넣어 거기에 파 다진 것을 곁들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고문이란 말은 일제강점기를 통해 우리 겨레가 지겹게도 듣던 말이라 신물이 날 지경의 말이다. 일본인의 이러한 고문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 있어 흥미롭다. 이름하여 《일본고문형벌사, 나와유미오 지음, 김인호 뒤침, 자작출판》라는 책이 그것인데 이 책을 보면 참으로 잔인한 형벌도 다 있구나 싶은 것들이 많다. 에도시대의 재판은 원칙적으로 자백을 위한 재판이었다. 따라서 제가 죄인입니다라는 자백이 중요하다. 고문은 이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수단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자백하면 중형에 처해질 것을 우려한 죄인들은 좀처럼 죄를 자백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혹독한 고문 앞에서는 두 손을 들고 자백하는 게 인간 심리다. 그런데 1836년 반슈의 무주크에 사는 야구로요시코로(八黑吉五郞)라는 남자가 강도혐의로 잡혀오게 되는데 이 사람은 끈질기게 입을 다물었다. ▲ 무거운 돌로 무릎 위를 우르는 고문 장면 담당 순사는 이 용의자의 자백을 받아내려고 1년 9개월 동안 태장고문 15회, 돌안기고문(무거운 돌로 몸을 내리 누름) 25회, 새우고문 2회, 매달기 고문 2회 등 총 44회를 가했는데도 꿈쩍 안했다는 기록이 있다. 남성 고문 견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1895년 경북 안동 임청각에서 태어난 이광민선생은 백부인 이상룡이 세운 협동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며 애국사상을 함양하였다. 1911년 백부 이상룡이 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하자 함께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수료하였고 1916년 부민단 본부가 있는 통화현 삼도구 동화학교의 교사가 되어 민족교육에 전념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서간도 지역에서는 한족회를 설립하여 민족운동 단체를 규합하였다. 한족회는 이후 서로군정서로 명칭을 바꾸고 임시정부 산하의 무장 세력임을 천명하였으며 선생은 서로군정서의 최고지도자인 이상룡 선생을 최측근에서 보좌하여 청산리대첩이라는 대승을 거두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청산리에서 크게 패한 일제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참변을 단행하여 서간도 독립군기지를 초토화시켰다. 이후 서간도 독립운동계는 보다 효율적인 항일투쟁을 위한 독립군 세력의 통합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고 1922년에 서간도, 남만주 독립군의 통합세력인 대한통의부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성립 후 일 년이 되지 않아 이념상의 문제로 분열되었고, 1924년 중반 이후 또 다시 남만주 독립운동세력의 대동통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염온동 [1898-1946] 선생은 강원도 금화군 읍내리에서 부친 염문우와 모친 손문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학으로 학문적 소양을 다진 선생은 1910년 금화군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보성전문학교로 진학하였다. 1919년 금화지역 31운동에 참여하여 3년의 옥고를 치른 후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였다. 선생은 1921년 4월 28일,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인 독립운동단체 및 소속 인물들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의 기반을 넓혀갔다. 그 결과 망명 2년 만인 1923년, 제11회 임시의정원 의회에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초를 다지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독립운동에 앞장선 염온동 선생 그러나, 임시정부는 해체론을 둘러싼 갈등으로 분열되었고 사무실 임대료 지불이 어려울 만큼 재정도 악화되었다. 이에 선생은 1926년 7월 안창호엄항섭 등과 함께 경제후원회를 조직하고 직접 애국금을 납입하는 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경제적 후원에 앞장섰고 상하이 청년동맹회 간부로 활동하면서 국내외 독립운동세력의 통일 전선 형성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경남 진주에서 특강을 마치고 귀경길에 함양휴게소(대전통영간 서울방향)에서 겪은 일이다. 진주 톨게이트로 접어들어 1시간 좀 지났을까? 차창 밖에는 온통 붉은 감나무 천지다. 푸른하늘과 붉은 감의 색깔이 곱다고 느낄 때쯤 바로 고속도로변에 손에 잡힐 듯 말듯 탐스런 감나무가 줄지어 있다. 아이쿠 ! 순간 차를 세우고 감 하나를 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함양휴게소를 들렸다. 감나무가 지천일 걸로 봐서 혹시 특산물판매소에 감이 나와 있으면 좀 사고 싶어서였다. ▲ 함양휴게소(서울방향)에 매달린 황금빛 곶감은 찾는이들의 마음을 고향집에 온듯 편안하게 해준다 아뿔사! 휴게소에 차를 대고 내려 보니 휴게소 입구 천장에 감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곶감을 만들기 위해 매달아 놓은 것이지만 삭막한 휴게소가 마치 시골 할머니 집에 들어 선 느낌이다. 휴게소를 그렇게 많이 들러보았지만 이 황홀한 광경에 그만 넋이 나갈 뻔했다. 특산물판매소에 들러 단감 한자루를 1만5천원에 사고 내친김에 마침 점심시간이라 밥을 먹고 가려고 휴게소 안으로 들어섰다. ▲ 보리차 한잔이지만 손님을 왕처럼 맞이해주는 함양휴게소의 마음이 곱다 ▲
[그린경제 / 얼레빗 = 이윤옥 기자] 호주동포들이 항일여성독립운동가들을 조명하는 시화전을 열었다. 어제 5일(현지시각) 광복회 호주지회(지회장 황명하)가 주최한 이번 시화전은 그간 국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시화전으로 호주 시드니한국문화원 전시실에서 개막식과 함께 열렸다. 시화전 개막식에는 이휘진 총영사 축사(기준현 부총영사가 대신함)와 송석준 한인회장, 이강훈 시티상우회 회장를 비롯한 단체장과 여성독립운동가 시영역 대회 참가학생, 학부모, 지도 교사 등 100여명이 참석하여 여성독립운동가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기는 시화전을 축하했다. ▲호주 시드니 한국문화원서 전시 중인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시화전 (시 이윤옥, 그림 이무성) 이번시화전은 항일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이윤옥 시인의 헌시 30점에 그림을 그린 이무성 한국화가의 작품 전시로 이뤄졌으며, 안중근 어머니 조마리아를 비롯한, 춘천 의병장 윤희순, 박애순, 오정화, 동풍신 등 그간 우리 사회가 조명하지 않는 여성독립운동가들의 면면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리다. ▲ 인사말을 하는 황명하 광복회 호주지회장 이날 행사는 11월 17일 제 75주년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에 맞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천신만고에 아동들은 시험에 합격은 되었으나 오늘의 경제생활에서 이 거대한 돈이 어디에서 나와 안심하고 자녀들을 학교에 보낼 것이냐? 첫 고개의 시험걱정은 넘어섰으나 둘째 고개의 크나큰 이 걱정이야말로 참으로 그들 빈한한 부형들의 가슴을 암담케 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다. 여기서 학교 입학비 내용을 살펴보면 입학금, 수업료, 교복, 교과서, 학용품, 운동화, 란도셀, 기타 위는 한성일보 1950년 5월 19일자 기사다. 그때나 지금이나 없는 집 자식은 시험에 합격해도 곧바로 입학금 등 학비 마련이라는 또 다른 복병이 기다리고 있어 부모들의 애를 태우게 했다. 여기서 재미난 품목은 란도셀이다. 란도셀(가방)은 당시 입학금에 속해 있던 품목이다. 그 만큼 귀했던 물건이기도 하다. 그런 란도셀이 지금 전 세계에서 인기라고 한다. 특히 유럽에서는 어른들이 란도셀을 패션으로 들고 메고 다닌다니 참으로 희한한 이야기다. 일본의 시사통신이 11월 1일자로 보도한 바에 따르면 초등학생이 등장하는 일본의 애니메이션이 해외에 보급됨에 따라 어린이용 란도셀이 불티나게 팔린다는 이야기다. 중국에서는 튼튼하고 단순한 디자인이 인기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