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차희식(1870. 11. 10 ~ 1939. 10. 18)선생은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서 태어나 화성시 장안면 석포리에서 성장하였다. 장안면은 동리마다 서당이 있어 책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 교육과 문화의 수준이 높은 곳이었다. 또한 일찍이 동학과 기독교가 전파되어 민족의식이 강한 지역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민족의식을 함양하며 성장한 선생은 어릴 적부터 성격이 활발하고 사교술이 좋고 힘이 장사여서 여러 사람을 인솔하는 자질이 뛰어났고, 31운동 당시에는 장년층으로서 이 지역의 젊은이들을 통솔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일제는 1910년대에 토지조사사업과 산림정책을 시행하여 농민들의 권리를 박탈하였고, 간척공사를 비롯해 송충이 잡는데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는 등 노동 착취가 심하였다. 또한 1907년 염업조사를 실시하여 한국인 제염업자의 경영 기반을 해체시켰는데 이는 농업과 함께 이 지역의 주요 경제적 기반이었던 염업에 큰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일제의 수탈정책은 다른 지역보다 소작농의 비율이 높고 여건이 열악한 이 지역민들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지역민들의 경제적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삶은 점점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김상덕 선생은 경북 고령군 저전동에서 소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환경에도 배움에 대한 뜻을 잃지 않고 한학으로 학문적 소양을 다진 뒤 1915년 경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에는 일본 와세다 대학으로 진학해 유학생들과 민족운동의 방안을 모색하였다. 1919년 1월 6일, 동경에서 조선유학생학우회가 주최한 웅변대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는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운동 전개 방법을 논의하는 모임으로 확대되었고, 선생은 독립선언서 작성과 발송을 위한 실행위원으로 선정되어 김도연.백관수.최팔용 등과 함께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고, 2월 8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낭독을 감행하였다. 이 사건으로 선생은 일제에 체포.구금되었다가 1920년 2월 9일 출옥하였다. 1920년 3월 5일 상하이(上海)로 망명한 선생은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초를 다지는데 헌신하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여 임시정부를 해체하자는 창조파의 주장에 임시정부를 유지 하면서 개혁하자는 개조파의 선언서 수정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4년에는 상해청년동맹회를 결성하여 중국에서 활동하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도저히 그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흑룡강성 평방 지역의 731부대는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전율이 느껴진다. 일본이 패전 뒤에 이 부대를 폭파하고 떠나기 전에는 교도소를 능가하는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을 뿐 아니라 이곳의 모든 정보가 새나가지 않도록 이곳은 철저히 외부 세계와 차단된 하나의 거대한 왕국이었다. 731부대에 들어선 139개의 건물에는 각종 세균실험을 할 수 있는 시설물들과 함께 이곳에 근무하는 일본군의관의 숙소와 군인가족 사택, 학교, 세탁소, 예배당을 비롯하여 심지어는 부대 안에 비행장까지 갖추고 중국내 세균전을 위한 생체실험이 이뤄진 곳이다. 현재 중국정부는 731부대를 복원하여 이곳에서 자행한 일본군의 만행을 그대로 재현해놓고 있다. 이곳에서는 모든 실험대상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이뤄진 것으로 팔에 세균을 주입하는 밀랍인형을 비롯하여 잡아온 여성의 배를 가르는 모습 등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천인공로할 일이 벌어졌음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 중국 하얼빈 731부대유적지 전시관의 이시이시로 모형(왼쪽), 악명높은 생체실험의 대부 이시이시로의 731부대 시절 모습 그 가운데서 눈에 띄는 곳은 731부대에서 빼놓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1920년 10월12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숨을 거두신지 보름만에야 처참한 시신으로 돌아오셨던 이화학당. 94년이 지난 오늘 이곳에 동상으로 서 계시는 당신을 찾았습니다. 이화여고 유관순기념관 앞에 세워진 유관순동상 얼마 전 고등학교 한국사교과서에서 당신이 사라졌다고 시끌벅적했습니다. 항상 그랬듯이 이는 좌파들의 소행이라는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이를 기화로 역사교과서를 빨리 국정교과서로 만들어야한다는 주장이 날개를 달았지요. 한편 유관순열사는 해방 후 발행된 고교국정교과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전후(戰後, 1945년 이후)가장 큰 산악사건으로 기록된 나가노현 온타케산의 분화로 희생된 사람들을 위한 위령제가 열렸다. 27일로 한 달째를 맞이한 현지에서는 57명의 희생자를 낸 이날의 처참한 산악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위한 경건한 위령제였다. ▲ 지난 9월 27일 분화하여 큰 희생자를 낸 나가노현의 온타케산 분화 모습 나가노현과 기후현 경계에 있는 온타케산(御嶽山)은 지난 9월 27일 오전 11시 52분 분화하여 57명이 죽고 6명이 행방불명된 대형 참사였다.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 자위대와 경찰, 소방대원 등 연 인원 15,000명이 수색 작업을 벌였다. ▲ 현지에서는 사건 1개월을 맞아 희생자를 위한 위령제가 열렸다 그러나 2차 재해의 우려로 10월 16일에 일단 수색을 중단하고 내년 봄에 수사 재개를 검토하고 있다. 해당 지역에서는 지역민들 중심으로 희생자를 위한 위령제를 27일 지냈다. 지역주민들은 뜻하지 않은 재난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남은 유가족의 슬픔을 함께 했다.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白日靑天霹靂聲 푸른하늘 대낮에 벽력소리 진동하니 大州諸子魂膽驚 6대주(大州)의 많은 사람들 가슴이 뛰놀았다 英雄一怒奸雄斃 영웅 한번 성내니 간웅(奸雄)이 거꾸러졌네 獨立三呼祖國生 독립만세 세 번 부르니 우리조국 살았다. 위는 신규식 선생이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보고 지은 시다. 오늘은 105년전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를 깬 일본제국주의의 원흉 이등박문을 처단한 날이다. ▲ 안중근의사 기념관 안쪽 유리창에서 바라다 보이는 이토히로부미 처단 현장, 열차 앞 부분 바닥에 표시가 되어 있다.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역 구내 ▲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역에 있는 안중근의사 기념관 전시실 1 ▲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역에 있는 안중근의사 기념관 전시실2 1909년 10월 26일(음력 9월 13일) 9시이등박문이 탄 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했다.잠시 뒤 그가열차에서 내려 러시아의 재정대신 꼬꼬흐체프와 함께 러시아 군인들의 경례를 받으며 각국 영사들이 있는 곳을 향하여 천천히 걸어가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안 의사는권총을 빼들고 이등박문을 향하여 총을 쏘았다.탕탕탕탕, 모두 4발을 쏘았는데 4발 모두 명중했다. 이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나태섭(1901~1989) 선생은 1901년 황해도 안악군에서 태어났다. 1919년 중동학교 재학 중 3.1만세운동에 참여 후 교육을 통한 구국활동에 뜻을 품게 된 선생은 이듬해 졸업 후 안악군 봉삼학교 교사로 재직하여 인재 양성에 진력을 다하는 한편 독립운동 자금 모금운동과 더불어 동지 포섭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23년 활동이 탄로나 원산으로 피신하였으나 더 이상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게 되자 망명을 결심하게 되었다. 1927년 5월 중국 상해로 망명한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변 독립운동 단체와 관계를 맺고 1934년 2월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에 입교하여 독립운동 간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후 1934년 8월 남경의 중앙육군군관학교 10기생으로 입학하게 되었고, 재학 중 1934년 12월 한국특무대독립군 제1대장으로 선임되었다. ▲ 나태섭 애국지사 1936년 6월 중앙육군군관학교 10기생 보병과 졸업 후,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황해도 지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보궐 선출된 선생은 같은 해 7월 한국국민당 청년단의 단장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 주변의 각 독립운동 단체의 단원들에 대한 보호 및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기자] 이범진(李範晉, 18521911) 선생은 대한제국 시기 정치가, 외교관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무관으로 이름난 훈련대장 이경하(景夏)의 아들이었다. 1879년(고종 16)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887년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部事)가 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친로정책을 표방할 때 친로파에 가담하여 농상공부협판(農商工部協辦)으로 대신서리가 되었으나 명성황후시해사건 뒤에 사임하였다. 1895년 10월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일으켰으며 실패하여 일시 러시아에 망명하였다. 이듬해 귀국하여 아관파천을 일으키는 데 참여하여 김홍집(金弘集) 등을 몰아내고 아관파천 내각의 법부대신 겸 경무사가 되었다. ▲ 이범진 애국지사 1897년 선생은 자원하여 주미공사가 되어 기울어져가던 대한제국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구국외교에 투신하였다. 이후 1900년에는 주러시아공사로 전임되어 독일오스트리아프랑스까지 4개국 공사를 겸임하였다. 주러시아공사로 있던 시절 선생은 러시아의 용암포(龍巖浦) 조차(租借) 요구에 강경하게 반대하였다. 대한제국 정부가 용암포 조차를 승인한다는 공문이 도착하자, 선생은 여기에 반발하여 이 공문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10월 24일(금) 어제 ‘청계문학 (회장 장현경)’ 회원들과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단풍이 곱다는 정읍의 내장사를 들러 미당 서정주 시인의 고향인 고창의 미당문학관까지 서울에서 당일치기 여행으로는 조금 벅찬 일정이었다. 내장사의 단풍은 아직 물들 기색이 보이지 않았지만 산채 비빔밥으로 새벽부터 달려간 허기를 채우고 이내 고창으로 향했다. 고창군 부안면 질마재 거리는 ‘국화 옆에서’를 쓴 미당의 고장답게 고향 어귀부터 노란 국화꽃으로 야단스러웠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은지 대형버스 주차장까지 갖춘 미당문학관 언저리에도 국화는 지천이었다. ▲ 전북 고창의 미당 서정주 문학관 입구, 이르는 곳마다 국화가 지천이다. 그러나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고 한 미당의 말과는 달리 그의 생가와 문학관이 자리한 곳은 멀리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한 느낌이었다. 그가 말한 ‘바람’은 물리적인 바람이 아니고 세상 풍파를 뜻함이었나 싶은 생각을 하며 잘 꾸며 놓은 문학관 내부를 둘러보았다. 대저 문학관이란 돈을 얼마나 들였는가에 따라 좌우 되는 것일 뿐 실제 문학관의 주인공을 제대로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라는 평소 생각 때문인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조선 여성들이 일본의 방적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도일하기 시작한 것은 1910년 대 초반의 일로 1913년 12월 무렵 신문지상에서는 '오사카 방적 공장에서 일본인만으로는 여공이 부족하여 조선여공을 고용하게 되었다' 라는 보도가 등장하고 있다. 최초의 조선여공은 셋츠방적(摂津紡績)공장 54명, 미에방적(三重紡績)공장 40명이다. 조선인 여공은 일본인 여공에 견주어 “유순하고 근면하다” 는 평을 들었으며 셋츠방적공장의 경우에는 모집인이 경상북도 진주로 직접 나가 3년 기한으로 14살에서 27살까지의 여성 19명을 데리고 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필두로 조선여공의 수요가 확산되자 모집 지역도 경상도 외 지역으로 확대 되었다.” ▲ 고려박물관 조선사여성연구회원 오바 씨가 전시중인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이는 도쿄 고려박물관(관장 히구치유우지)이 전시 중인 “외골수로 살아낸 조선, 한국여성들 (ひたむきに生きた朝鮮、韓国の女性たち)"의 <방적공장> 부분에 나오는 이야기다. 고려박물관은 그 설립목적이 “일본과 코리아(한국, 조선)의 유구한 교류의 역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전시하며 서로의 역사 문화를 배우고 이해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