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때는 서기 758년, 일본 조정의 관리 오노노타모리(小野田守)는 발해대사로 임명되어 발해땅을 밟는다. 사신의 임무를 다 마친 뒤에는 발해사신 양승경(揚承慶)과 함께 귀국하는데 이 이야기는 일본의 정사인 《속일본기(續日本紀)》 천평보자(天平寶字) 2년 9월 18일자에 기록되어 있다. 서기 758년이면 일본은 나라시대(奈良時代)의 중반기이며, 발해(渤海)는 698년에 건국하여 60년이 지날 무렵이다. 일본과 발해사신의 왕래는 발해가 일본을 34차례 방문하였고, 일본 역시 발해를 13차례 방문 할 만큼 교류가 컸다. 비행기로 다니는 지금도 중국 흑룡강성에 있는 발해 동경성을 가려면 쉽지 않은 데 당시 해상으로 왕래를 해야 했던 것을 감안하면 발해와 일본의 교류는 매우 밀접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중국 흑룡강성 발해 유적지 예전에《속일본기(續日本紀)》에서 일본과 발해의 교류 이야기를 읽으면서 1천여 년 전의 역사가 바로 어제의 일처럼 느껴졌던 적이 있는데 지난 9월 말 흑룡강성에 있는 발해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나는 또 다시 발해의 건재를 실감했다. 가도 가도 끝없는 황금들판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발해 동경성터는 그 넓이가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홍언(1880~1951)선생은 한국민족운동사에서 그리 낯익은 이름은 아니지만, 일제강점기 미주한인사회의 민족운동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선생이 사망한 뒤, 미주사회에서는 선생을 고결한 참된 애국자이며, 평생을 언론기관을 위해 힘썼으며, 우리의 문화향상과 사회와 국가에 대한 모든 것을 솔직하게 비판한 작가ㆍ시인ㆍ평론가로 평가하고, 자신의 모든 사생활을 희생한 인물로 기억하였다. 선생의 본명은 홍종표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한학을 수학하고 일시 중국을 다녀온 뒤, 1904년 하와이로 이민하였다. 1910년 이전에는 하와이에서 여러 언론매체의 주필로, 그리고 1911년 이후에는 미주 본토에서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인 『신한민보』의 편집과 기고가로 수십 년 봉사하였다. 또한 선생은 『신한민보』에 동해수부 등의 필명으로 시ㆍ시조ㆍ소설ㆍ희곡ㆍ전기ㆍ수필 등 다양한 장르에서 수백 편을 발표하는 등 언론가이자 작가로서 활동하였다. 선생은 대한인국민회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직임을 맡았으며, 흥사단의 창립단우로 흥사단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미주한인사회에서 한국독립운동을 위하여 한인단체를 주도하거나 재정지원을 한 인물들도 많지만,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최근 교육부가 초등학교 3학년 교과서부터 한글에 한자를 같이 쓴다고 하여 우리말을 사랑하는 이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이에 겨레말살리는이들, 이오덕김수업교육연구소, (사)전국국어교사모임 등 17개 단체가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전문을 싣는다.(기자말) 교육부(장관 황우여)는 지난 9월 24일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을 발표했다. 이 교육과정 주요 사항에서 2018학년도 초등학교 3학년부터 교과서에 한자를 한글과 나란히 적겠다고 했다. 무슨 까닭으로 그리하는 것인지 밝히지도 않아서 국민은 어리둥절한 가운데 한자 사교육 시장이 먼저 들썩이고 있다. 우리는 다음 네 가지 까닭을 들어 교육부가 내놓은 정책이 잘못되었음을 밝힌다. 아울러 교육부는 국민 앞에 사죄하고 당장 거두어들이기 바란다. 1. 세상에서 가장 쓰기 좋게 잘 만든 우리 한글이 우리말을 붙들어 담아놓는 그릇으로 넉넉하고도 남는다. 무릇 어떤 글자든 글자란 말을 붙들어 담아놓는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자를 스스로 만들어 수 천 년 써온 중국조차 너무도 어려워 이제는 내버렸다. 우리도 수많은 싸움과 다툼을 거치고 겨우 반세기 동안 한글만 썼더니 젊은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19세기 많은 조선 난민들이 연변지역에 이주해 와 도문강 연안에 정착하였다. 1905년 일로전쟁(러일전쟁)후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되었다. 1907년 8월 일본은 소위 조선사람의 생명 안전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용정촌에 기어들어 불법적으로 통감부간도파출소를 세우고 중조변계분쟁을 일으켰다. (가운데 줄임) 그뒤 1909년 11월 2일 간도일본총영사관을 세워 산하 5개 영사분관을 두고 방대한 경찰 기구를 설립하여 간도를 포함한 동북지방의 침략 발판으로 삼았다. 전시실은 진실한 물증과 역사자료를 이용하여 간도일본총영사관의 내막을 폭로하고 있다. (필자가 문구를 읽기 쉽게 수정) ▲ 악명 높은 용정 시내의 간도총영사관 건물, 지금은 용정시인민정부 청사로 씀 이는 길림성 용정 육도하로(六道河路 869)에 있는 옛 간도일본총령사관 터에 있는 간도일본총영사관 죄증 전시관 앞에 있는 안내문이다. 1909년에 세운 건물 치고는 제법 튼튼해 보였는데 옛 간도일본총사령관 터에 여러 채의 건물이 옛 모습 그대로 자리하고 있었다. 현재 중앙 건물은 룡정시인민정부 청사로 쓰고 있으며 청사 건물 뒤에는 일본의 잔학성을 전시하고 있는 중국식 표현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일본의 침략 죄를 폭로하는 일본군비행장 이라는 제목의 9월 24일자 중국의 길림신문(吉林新聞) 보도가 눈에 띈다. 침략의 기초 작업으로 군 비행장은 필수다. 그런 일제의 군비행장 시설이 중국 돈화시 사하연진(敦化市 沙河沿鎮) 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보도에 따르면 침략의 역사로부터 70여 성상이 지났지만 일제 군비행장터에는 비행기계류장, 3개의 활주로 등 비행장 전체의 윤곽과 형체는 남아 있다. 군비행장 위치는 사하연진(沙河沿鎮)에서 서쪽으로 7km 정도 떨어진 1호산촌 (一号山村) 동남쪽에 있다. 중앙활주로는 콘크리트로 포장되어있으며 양측 활주로는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다. 중앙활주로 끝에는 비행장 지휘탑으로 쓰인 다층탑 건물이 있는데 붉은 기와 형태이다. 동쪽의 3층 건물은 지휘감시대였는데 현재는 벽체 잔해만 남아 있다. ▲ 둔화시 일본군비행장 터의 격납고 시설 길림신문 제공 또한 비행기격납고 서쪽 500m지점에는 붉은 벽돌, 푸른 벽돌의 일본식 가옥이 3동 남아있는데 이곳에는 비행기 관계자와 가족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현재는 주민들이 쓰고 있다. 일호산촌(一号山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조병준 선생의 자는 유평(幼平), 호는 국동(菊東)이다. 평북 의주군에서 출생하여 3세 때 부친에게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운암 박문일의 문하생으로 수학했다.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유인석 의거에 호응하여 평안북도 창성에서 거의했다가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던 중 광무황제의 특사로 출옥했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재차 거의하여 평북 창성의 일본헌병대를 습격하였으나 일제의 병력이 증강되어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하였다. ▲ 조병준 선생 관전현과 환인현 등지에 근거를 마련하고 의병장 전덕원, 박장호, 이진용, 조맹선, 백삼규 등과 함께 농무계와 향약계 등을 조직하여 교민들의 식산(殖産)과 교육에 힘썼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림단과 포수단 등을 주축으로 만주 유하현 삼원보에서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총참모에 선임되어 도총재 박장호, 부총재 백삼규, 총단장 조맹선, 부단장 최영호 등과 함께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 후 동 단체가 양분되자 민국독립단 도총재로 활동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내의 비밀연락방 조직인 연통제 평북독판부 독판에 선임되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조완구( 1881-1954) 선생은 서울 계동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나 1902년 한성법학전수학교를 마치고 내부 주사에 임명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에게 국권을 침탈당하자 관직을 그만두고 독립운동의 길로 나섰다. 종무관장 민영환의 자결과 처남인 금산군수 홍범식의 경술국치로 인한 자결 순국도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선생은 관직을 그만두고 대종교에 들어갔다. 대종교는 을사오적암살단을 조직하였던 나철이 창시한 것으로 단군을 섬기는 민족종교이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상징적 존재였다. 선생은 대종교의 간부로 활동하다가 1914년 북간도로 망명, 독립운동 일선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1일 '독립국'임을 선포한 독립선언이 발표되자 북간도와 연해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선생은 이동녕 조성환 김동삼 조소앙 등과 함께 상해로 갔다.민족의 대표기구인 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해서였다.이를 위한 대표 인사를 29명으로 구성하였는데 선생도 일원이 되었다. 이들은 먼저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여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한 이후 27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요즈음 하루가 다르게 한국의 거리는 영어 간판으로 도배되어 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진격의 파스타 / 진격의 샐러드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나온 진격(進擊)이란 말을 붙여 활용(?)하는가 하면 모 신문에서는 간지터진다같은 해괴한 말도 마구잡이로 만들어 쓰고 있다. ▲ 크고 많고 좋다라는 뜻일까? 진격의 파스타 라고 가게 앞에 써 붙였다. 광화문에서 찍은 사진 제568돌 한글날을 맞아 일본어전공자인 기자는 우리말 속에 아직도 똬리를 틀고 있는 일본말 찌꺼기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는 점에 대해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들어 몇 가지 지적을 하고자 한다. 첫째는 《표준국어대사전》이 민족적 자존심을 해치는 말을 슬쩍 한국식으로 풀이 해놓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대표적인 게 국민의례이다. 국민의례란 《일본위키피디어》에 따르면 国民儀礼とは、日本基督教団が定める儀礼様式のことで、具体的には宮城遥拝、君が代斉唱, 神社参拝」である。 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를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지난 9월 27일 분화 이후 계속해서 희뿌연 화산구름과 화산재를 내뿜는 일본 나가노현의 온타케산(御岳山, 御嶽山) 분화 사건으로 지금 일본열도는 놀란 가슴을 진정 시키지 못하고 있다. 연일 방송과 신문에서 머리기사로 보도되고 있는 온타케산의 비극은 이 산을 오른 등산객들이 맞이한 참혹한 죽음일 것이다. 10월 7일 현재 희생자가 54명으로 밝혀진 상태에서 행방불명자들을 찾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고 언론들은 보도하고 있다. 이번에 분화한 온타케산은 표고 3,067미터로 나가노현에서 향토후지(鄕土富士)라고 불릴 만큼 지역민들에게 사랑 받는 산이었다. 향토후지란 지방에 있는 산으로 후지산에 견줄 만큼 높고 큰 산을 말한다. 이제 바야흐로 단풍철인지라 산을 찾는 이들이 점점 늘어가는 이때 아무런 사전 예고도 없이 맞닥트린 산정상의 분화에 등산객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 중 등산을 떠난 집에서는 노심초사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소리가 들린다. ▲ 일본 나가노현의 온타케산(御岳山, 御嶽山) 분화를 알리를 방송 ▲ 분화 전의 온타케산(御岳山, 御嶽山) 섬나라이면서도 산악국가라고 할 만큼 높고 험한 산이 많은 일본은 온타케산을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어느 도시든 새벽시장의 재미는 그곳 사람들의 풋풋함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연길시내에 있는 수상시장도 그러한 곳 가운데 하나이다.중국 답사(9월24일~10월 1일) 마지막날인 10월 1일 아침 6시, 도다이쿠코 작가와 기자는 연길 시내 수상시장엘 찾아 갔다. 숙소인 연길시 우시가(牛市街) 경포여관에서 걸으면 20분 거리에 있다. 우리는 이른 아침 우시장거리(牛市街)를 지나 느린 걸음으로 수상시장쪽으로 걸었다. 우시장거리라고 해서 옛날 시골의 우시장을 떠올렸지만 지금은 소를 사고 파는 거리가 아니다.예전에 이곳에는 소를 사고 판 모양이지만 이제 이름만이 남아 있을뿐 한국의 중소도시를 연상케하는 상당한 수준의 거리 모습이다. 수상시장은 물위에 떠있는 시장은 아니며 연길시내를 흐르는 '브르하퉁강변'에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시장으로 지금은 새벽시장으로 운영되고 있어 아침 6시부터 2시간 정도 장이 선뒤 8시면 파장된다. 브르하퉁이란 만주어로 버드나무를 뜻하는데 이 강변에 버드나무가 즐비하게 있었던 모양이나 현재는 강폭이 좁은 강 주변을시멘트로 잘 손질해두어 산책길로 쓰고 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