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이종훈([1856~1931) 선생은 1856년 경기도 광주 실촌면 유사리에서 태어났다. 1883년 동학에 입도한 선생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2차 봉기과정에서 부상하기 시작, 경기충청강원을 망라한 20여개가 넘는 포를 아우르는 북접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이후 손병희가 일본에 망명하던 시기 박인호 등과 함께 교단 운영에 참여하였고 1905년 12월 천도교가 창건되는 과정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중앙교단의 고위 간부직을 역임하였다. 한편, 1910년 국권피탈 이후 일제의 무단통치가 계속되던 중 미국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조선도 독립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크게 일었다. 1919년 2월 25일, 선생은 권동진,오세창을 만나 독립선언 참가 제의를 수락했다. 천도교 중앙교단의 최고직인 장로였던 선생은 민족대표 33인 중 최고령자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고, 3월1일 민족대표와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선생은 천도교단의 원로로서 천도교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31운동으로 인한 옥고의 고통이 채 가시지 않은 1922년 7월, 천도교 혁신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신현구 선생([1882-1930) 은 1882년 12월 8일 충남 논산 부적면 안천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고향인 논산에서 개척교회를 세우며 전도사업을 벌이던 선생은 1906년경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즈를 만나 공주 영명학교 교사로 활동했고, 민족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에 뜻을 두고 1915년 서울로 올라와 이화학당 부속여학교 교사로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선생은 이에 적극 참여하여 일제의 무단통치에 항거하였다. 이후 독립운동을 구체적으로 전개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년 5월 그 추진체로서 대한독립애국단을 결성하였다.대한독립애국단은 단장인 선생과 함께 재무총장 김순호, 김상덕 등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본부를 서울에 두고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등지에 지단을 설치하였다. ▲ 신현구 선생 국외에 설립된 임시정부는 국내의 재정적 후원 및 지지를 절실히 필요로 했으므로 동단은 결성 초기부터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결되어 임시정부 지원단체로서의 활동을 전개했다. 선생은 대한독립애국단 단장으로서 임시정부 독립운동의 선전활동과 재정자금 조달, 임시정부의 국내 조직망인 연통제의 역할을 하였다.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일본의 절에는 한국처럼 대웅전(본당)이 있고 웬만한 곳이면 목조탑이 있게 마련이다. 한국처럼 돌탑은 드물고 대부분 나무로 탑을 만드는데 나라(奈良) 흥복사 5층탑 같은 것은 아름다운 탑으로 손꼽히고 있다. 일본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한 백제 성왕 때는 아스카 지방이 불교가 성했고 이어 나라, 교토 순이다 보니 당시로서 천리길이나 되는 동경은 그다지 불교가 성하지 못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북쪽 지방인 아키다(秋田) 같은 곳은 더더욱 불교 전래가 뒤처졌다. 이러한 아키다현에 손꼽히는 3중목탑이 있어 이채를 띤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목탑이 들어선 곳이 절이 아니고 신사(神社)다. 아키다현(秋田縣)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이 삼중탑은 히요시하치만진자(日吉八幡神社) 안에 세워져 있는데 이 이름 또한 특이하다. ▲ 아키다현 히요시하치만신사(日吉八幡神社)에 있는 삼중탑 일본에는 히요시신사(日吉神社)와 하치만신사(八幡神社)가 원래 각각의 독립된 신사다 그런데 유독 이곳만은 이 두 신사가 하나가 돼 있으며, 게다가 신사에 삼중탑이 들어 선 것도 특이한 일이다. 이곳 신사에 불교를 상징하는 삼중탑이 들어 선 것은 1707년인데 지금으로
[그린경제/얼레빗=중국 연길 이윤옥 기자] 금은방의 반지 만드는 곳 구두 닦는 집 숙식이란 뜻은 고기종류의 내장류를 요리해서 파는 것을 말함 액세서리를 파는 집으로 장식의 세계라는 뜻이다 옷궤란 옷장을 말한다 토집이란 시골을 의미하며 시골집에서 만든 떡을 말함 중국에서는 빵, 죽, 만두를 잘 먹는다 목이버섯을 귀버섯이라 한다 연길 시내를 돌아다니며 참 재미난 간판을 찍어 보았다. 같은 한글을 쓰면서도 이렇게 재미나게 표현할까 싶어 찍은 것이지만 카메라에 담지 못한 것도 많다. 목이(木耳) 버섯을 귀버섯이라 부르는 것도 재미있는데 이 사진은 연길시내에서 용정의 윤동주 생가까지 택시를 전세내어 가는 도중에 눈에 띄어 차를 잠시 세우고 찍은 것이다. 중국이지만 자신의 말글을 중국어 보다 우선하고 있는동포들의 모습이 보기 좋다.
[우리문화신문 = 중국 연길 이윤옥 기자] “젊은이들은 모두 돈 벌러 한국으로 나갔지요. 약자(弱子)와 노인 분들만 남았어요. 저도 나가지 못해 남았지만 지금은 살만해요. 돈 벌러 나간 조선족들 땅을 제가 다 맡아서 농사도 짓고 한족에게 빌려주기도 해서 이제는 걱정 없이 살지요” ▲연변 용정시 지신향 명동촌에 있는 윤동주 시인 생가, 왼쪽이 대문이고 돌비석은 담장으로 꾸며져 있다. ▲1993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해 놓은 생가 ▲생가에는 작은 방이 두어개 있는데 입구 방에초라한 모습으로 이렇게 꾸며져 있다. 올해로 69주기다. 어제 29일 용정시 지신향 명동촌의 ‘윤동주 생가’를 찾아갔을 때 “윤동주생가”는 대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용정시내에서 택시로 30분 거리인 윤동주생가는 왕복 60위안을 주고 전세 낸 택시로 갔는데 생가에 도착해보니 그만 나무 대문이 잠겨있는 것이었다. 대문 앞에서 서성이다 보니 대문 한켠에 관리인 전화번호가 적혀 있기에 전화를 거니 밭에서 일하다가 나왔다며 단숨에 아주머니가 한 분 달려 나왔다. 그만큼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다. ▲아래 보이는 집이 생가이며 집 앞에는 너른 들판이 있고 멀리 산이 있는 이곳에서 윤동주 시
[한국문화신문 = 중국 연변 이윤옥 기자] 9월27일 아침 9시, 흑룡강성 목단강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발해 동경성(渤海 東京城)으로 가는 버스는 전날 수분하( 綏芬河, 쑤이펀)로 가던 20인승 승합차 보다는 조금 큰 차였지만 낡고 덜덜 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버스터미널에 걸린 발해 동경성행 (渤海 東京城行)이란 팻말만 보아도 가슴이 울컥한다. 내가 한국인이라서 그럴 것이다. 함께 이번 여행을 하는 일본인 도다이쿠코 작가는 나와는 다른 감정일 것으로 기자는 애써 묻지 않았다. ▲ 발해궁성터 안의 발해박물관 내부 전시장 물론 그녀는 20대 처녀시절에 발해터를 둘러 볼 정도로 중국 속의 조선역사에 대해 깊은 애정과 역사의식을 지닌 사람이었다. 차창 밖은 온통 옥수수 밭이었다. 가도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벌판이었다. 더러는 고구마도 심어 들판에서는 한창 고구마 수확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또한 담배농사와 파밭도 간간이 이어졌다. ▲ 발해궁성터임을 알리는 중국정부의 돌표지석 목단강에서 발해 동경성 (渤海 東京城) 까지는 버스로 약 2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옥수수, 고구마, 담배, 파로 이어지는 벌판을 지나자 이제는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는 논이 나타났
[그린경제/얼레빗 = 중국 목단강 이윤옥 기자] "여권을 보여주십시오" 하얼빈 안중근의사기념관 입구에는 젊은 관리원이 앉아 있었는데 우리에게 여권을 보여 달라고 했다. 9월 25일 오후 3시 일본인 작가 도다 이쿠코 씨와 기자는 하얼빈역에 있는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찾아갔는데 입구에서 신분증 제시 요구를 받았다. 기자의 한국 여권을 꺼내 보인 뒤 장부에 여권번호를 적어 넣은 뒤에 기념관엘 들어 설 수 있었다. "사진을 찍으면 안 됩니다." 젊은 관리는 우리를 바라다보면서 사진을 찍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복도처럼 생긴 좁은 전시장 안을 들어서니 이미 들어 와 있는 관람자들은 아무렇지 않게 사진을 찍고 있었다. ▲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역에 있는 안중근의사 기념관 전시실 1 ▲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역에 있는 안중근의사 기념관 전시실2 사실 여권은 한국인인 내 여권만 보여주었다. 관리의 눈에는 "아줌마 두 명이 국적이 같을 것"이라고 여겨졌는지 일본인 작가의 여권 제시는 요구하지 않았다. 전시장 안에 들어서서야 도다 이쿠코 씨는 "전에 기념관 개관식 때 일본인 기자가 취재하러 왔다가 입장을 거부당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어 일부러 자신의 여권을
[우리문화신문 = 중국 하얼빈 이윤옥 기자] “이 화면은 수용자를 묶어 놓고 팔목을 자르는 모습인데요. 그냥 자르는 것이 아니라 팔에 칼집을 넣은 뒤 자르는 모습입니다.” 중국인 안내원의 말은 격앙되어 있었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화면 속 소녀의 팔은 두 동강이 났다. 칼집을 넣은 팔목에서는 피가 낭자하게 흘러 나왔다. 이어서 수용자인 앳된 소녀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좁은 전시관 안을 가득 메웠다. 731부대 전시관을 찾은 중국인 관람객들의 비명소리도 동시에 들리는 듯했다. ▲ 여성 수용자를 실험대에 올려놓고 생채 실험을 하는 장면, 산채로 껍질을 벗기거나, 강제 임신, 낙태를 시키는 실험을 하는 등 그 만행은 입에 담을 수 없다. ▲ 영하에서 산 사람을 얼려보는 실험 모습 재현 이것은 9월 26일 기자가 찾은 중국 하얼빈시 평방에 자리한 731부대 전시관 안의 모습이다. “수용자들 가운데는 독립운동을 하다 잡힌 조선인도 많았습니다. 이곳 731부대로 잡혀온 사람들은 살아나간 사람이 없습니다. ” 안내원은 끊임없이 당시 731부대 안에서 벌어진 잔인하고 끔찍한 생체실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고 전시관 벽면 가득 천인공로할 사진과 당시 상황을 재현한 모습이
[우리문화신문 = 중국 하얼빈 이윤옥 기자] “네 맞아요. 이곳이 외국인 묘지가 있던 터입니다.” 남자현 애국지사가 묻혔던 무덤을 찾아 찾아간 것은 어제 9월 25일 오후로 현재 이곳은 하얼빈 문화공원(文化公園)으로 바뀌어 높다란 관람차가 돌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왕봉의 (王鳳儀, 하얼빈공전대학 수학과 교수, 81살) 씨는 당시 무덤자리를 가리키며 친절한 안내를 해주었다. 왼손 무명지 두 마디를 잘라 조선이 독립을 원한다는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란 혈서와 자른 손가락을 흰 천에 싸서 당시 하얼빈에 와 있던 국제연맹 조사단에게 보내어 조선의 독립 의지를 호소하던 남자현 애국지사 (1872∼1933) 가 이곳 하얼빈에서 독립운동을 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82년 전인 1932년의 일이다. ▲ 남자현 애국지사가 묻혔던 첫번째 무덤 (하얼빈 남강 외국인 무덤 앞에서 도다이쿠코 작가와 기자)이 있던 자리로 1930년 쯤 이장되었다. 1932년 9월 국제연맹조사단(단장 리틀경)이 침략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하얼빈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접한 남자현 애국지사는 일제의 만행을 조사단에게 직접 호소하고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알리기 위해 혈서를 쓰면서 까지 이러한 일을 감행한
[그린경제 /얼레빗= 중국 연길 이윤옥 기자] 지금 이윤옥 기자는 항일여성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따라 만주를 답사하고 있다. 이 답사는 여성독립운동가에 바치는 헌시를 쓰고 그분들의 일생을 정리한《서간도에 들꽃 피다》 5권을 펴내기 위한 준비작업이기도 하다.또 이 답사는 그의 오랜 동무인 일본인 작가 도다 이꾸코 씨가 안내를 맡고 있다. 도다 작가는 사진작가인 그의 남편 류은규 씨와연변지역에 10년을 살면서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찾아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했다. 아마도 지금쯤 그들은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쏘아 죽인 의거 장소 하얼빈으로 가는 밤기차에 타고 있을 것이다. 이윤옥 기자의 만주 여성독립운동가 발자취를 찾아 떠나는 답사에 우리는 큰 기대를 모아본다.(편집자말) 연변 시내 신화서점 어린이 도서 진열 모습 신화서점의 조선말 사전과 한국 요리 책 중국의 4년제 대학 1200개 가운데 국립대학 100위 안에 드는우수 두뇌집단인 연변대학 구내에도 전부 한글로 써 놓았다. 연변대학 정문으로 곳곳에 진리 , 선행 ,융합 / 자강, 화합, 일신이라고 쓴 한글이 뚜렷하다 혁명열사능원 기념관에는 한글로 홍범도 장군 등의 항일투쟁역사가 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