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일본말에 시니세(老鋪)라는 말이 있다. 노포라고 한자로 쓰는 이 말은 말 그대로 오래된 점포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단순히 오래되었다는 뜻만을 지닌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한국말로 옮기기가 쉽지 않다. 일본국어사전 풀이를 보면 선조 대대로 가업을 지키며 이어 가는 것 이라고 되어 있으니 전통을 이어가는 가게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 시니세의 하나인 오뎅집으로 유명한 다까키야(高木屋) 이러한 시니세는 578년 창업한 회사로 기네스북에 오른 일본 유수의 건축회사인 금강조(金剛組)를 비롯하여 된장류를 만드는 670년 된 마루야핫쵸된장식품(まるや八丁味), 가마쿠라 말기인 1333년에 창업한 전통과자점 구로다센넨도(田千年堂)가 있다. 전통과자나 빵집으로 치자면 시니세(老鋪)가 가장 많은 분야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1000년 가까운 전통 가게가 일본 전국적으로 즐비하다. 또한 국수를 만드는 미와소멘야마모토 (三輪そうめん山本)도 1717년에 창업을 했으니 올해로 297년째이고, 술 만드는 가게 역시 겐비슈조(菱酒造,1505년 창업)처럼 500년 이상 된 가게가 수두룩하다. 또 시니세로 빼 놓을 수 없는 곳이 차를 생산하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현정건 (1887~1932)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상해 인성학교의 교사로서 청년들을 교육하고,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를 조직하는 등 왕성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현정건선생은 대구 출신으로서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1919년 9월 17일 보선되어 임시정부의 국사처리를 위하여 활동하였다. 1923년 6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될 때 고려공산당 상해파의 일원으로 윤해,신숙 등이 주동이 된 창조파에 속하여 활동하였으나, 조선공화국 건국을 결정하고 임시헌법, 국호 등을 제정하자 뜻을 바꾸어 이러한 일은 전민족의 의사에 위배되는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한편 공산당 대표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계파간의 이견조정에 힘쓰는 등 민족우선의 독립운동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 현정건 선생 1924년 6월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오는 국내 학생들이 언어와 풍속에 익숙하지 못하여 중국 사회에 적응치 못하고 상급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하는 실정에 놓이게 됨을 타개하고자 김규식의 제안으로 인성학교내에 예비강습소를 개설하였을 때 김규식, 여운형과 함께 영어과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이석용 선생(1877~1914)은 전북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어른들을 좇아 옛사람들이 충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일들을 즐겨 들었던 선생은 1897년 8월, 10여 명의 동학과 함께 진안의 도동서려(桃洞書侶)로 이거하여 학문연마에 전심전력하였고, 이후 면암 최익현과 연재 송병선 선생에게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아 의병을 일으킬 이론적 근거를 정립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맺어졌고 외교권이 박탈되자 의병봉기가 본격화되었다. 선생은 최익현과 임병찬이 주도한 태인의병에 가담하고자 했으나 최익현 등 12의사의 체포로 의진이 해산되자 독자적으로 의진을 일으켜 설욕할 결심을 굳혔다. 1906년 가을, 선생은 고광수 등과 거의 방략을 협의하여 1년 동안 치밀하게 준비하였고, 마침내 1907년 음력 9월 12일 전북 마이산 자락 용암에서 고천제를 지낸 후 의진의 명칭을 호남창의소라 하고 의병장에 추대되어 진안읍을 공격, 헌병분파소와 우편취급소를 파괴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일본군의 기습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 이석용 의병장 1907년 음력 11월 의병을 다시 규합하고 군자금을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일본 사이타마현에는 움직이는 지장보살 신앙(마와리지조우, まわり地藏)이 남아 있는데 이는 지장보살상을 보관함(子)에 담아 집집으로 옮겨 모시는 신앙이다. 올해로 261년째인 이 풍습은 사이타마현 하뉴시 혼가와마타(埼玉 羽生市)에서 지금도 지켜지고 있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관동지방을 흐르는 큰 강인 도네강(利根川)이 흐르는 지역이다 보니 잦은 홍수 피해가 있던 곳이다. 치수시설이 여의치 않던 시절 홍수가 나면 강 인근 주민들은 큰 피해를 입게 되는데 이러다 보니 자연재해를 막아주길 바라는 민간신앙이 성행 할 수밖에 없었다. ▲ 이동용 지장보살상(왼쪽), 마을 주민이 지장보살상을 지고 다른 집으로 모셔가는 모습 오지조사마(지장보살님)라 부르는 이 불상은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보관함에 담아 집에서 집으로 옮겨 모시고 있는데 이를 처음 만든 것은 천초종원사(淺草宗円寺)의 한 스님이 이 지역에 오고나서부터다. 쇼아쇼닌 (松阿上人)이라 불리는 이 스님은 이 마을에 와서 마을사람들이 늘 불안하게 사는 것을 보고 300여 집을 찾아다니며 시주금을 모아 지장보살상을 만들게 된다. 노송나무로 불상을 만든 스님은 불상을 담을 함을 만들어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아무 철을 모르는 어린 마음에도 당신 얼굴에 나타나는 심각한 표정에 압도되어, 과연 내 남편은 한 가정보다도 더 큰 무엇을 위하여 싸우는 사람이구나 하고 당신 무릎 앞에 엎드린 일이 있지 않습니까? - 가신 임 단재의 영전에, 박자혜 숙명여자대학교 숙명역사관에서 당신의 이름을 처음 보았습니다. 신채호의 아내, 박자혜. 국사책에서 근우회, 단재 신채호, 나석주, 의열단은 눈에 익을 정도로 많이 보았는데, 왜 당신의 이름은 제게 너무나 낯설게 느껴질까요. 그러한 점에서
[그린경제 / 얼레빗 = 이윤옥 기자] 김동수 [1916~1982] 선생은 강화에 세거한 양반가문으로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여 신앙하였다. 8세 때인 1923년, 선생의 부친은 자유로운 선교와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건너갔다. 선생은 상해에서 민족교육의 상징인 인성학교를 다니며 민족의식을 키워 나갈 수 있었고, 화랑사 등 각종 소년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인성학교와 공시중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1월, 제1차 상해사변 이후 중국 내에서 벌어지는 학생시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1934년경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선생은 윤봉길의거 이후 독립전쟁의 군사간부 양성을 위해 설립된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에 입학하여 군사학을 연마하는 한편, 김구가 조직한 특무대에 들어가 반일운동에 참여하였다. 낙양분교를 졸업한 선생은 1936년 중국군의 장교로 복무하였다. 다음 해인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선생은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고 남경에 가서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선생은 피난 중의 임시정부 대가족과 김구 등 요인들을 경호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임시정부가 중경에 도착한 이후 선생은 나월환 등 한인 청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향산 이만도 선생은 퇴계의 11세손으로 경북 봉화군 봉성면에서 태어나 14세 때, 선대 고향인 안동 도산면 하계마을로 돌아왔다. 하계마을은 퇴계의 학문을 가장 전형적으로 계승한 곳으로 조선 후기 걸출한 인재들이 다수 배출된 곳이다. 선생은 24세가 되던 1866년 정시 문과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홍문관 부교리, 사헌부 장령과 지평, 사간원 사간 등의 청직(淸職)을 지냈다.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1876년, 선생은 최익현이 개항을 반대하여 올린 상소를 두둔하여 파직당하기도 하였고, 1882년 한미수호조약으로 나라가 혼란하자,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같은해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난 후 다시 공조참의와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 향산 이만도선생 순국비 고향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에 몰두하던 중 1894년 6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였다. 이에 서상철이 거병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선생은 왕의 명령이 없는 거병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마침내 9월 의병봉기를 촉구하는 왕의 밀령이 전달되자 선생은 거병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소모관 이용호가 일본군에 붙잡히는 바람에 뜻을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모든 일이 시작과 마지막이 중요하듯 사람도 마찬가지 일게야. 죽는 일도 중요한 일이지. 그런데 말이다. 사람이 태어난 곳은 고향이라는데 사람이 묻히는 땅은 뭐라 하나? 그곳의 이름은? 그것도 이름이 있어야 할 것 아니야? 고향이란 말에 못지않게 정다운 말이 있어야 할게 아니야?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 한대용의 그 고장 이름? 가운데서 - 정말 그랬다. 태어난 곳이 고향이면 그 고향을 떠나 뼈를 묻은 곳을 이르는 말은 무엇일까? 타향이라하면 좋을까? 소련 붕괴 이후 독립국가연합에 뿔뿔이 흩어져 사는 한국인을 가리켜 고려인이라 부른다. 그 고려인들 가운데 1세들이 바로 태어난 곳과 뼈를 묻은 곳이 다른 것이다. 혹한의 땅 연해주로 떠난 한국인 최초의 이주의 역사는 186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14가구가 지신허강 인근에 정착하면서 고려인들의 한 맺힌 역사는 시작되었다. ▲ 타향에서도 고국의 고전을 잊지않으려 애썼다 벌써 이들이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린지 올해로 150년이 되었다. 현재 까레이스키로 불리는 한인들은 중앙아시아에 약 50만 명이 살고 있다. 1937년 소련이 연해주의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여준 선생은 1862년 죽산군 원삼면(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에서 태어났다. 향리에서 한문을 공부한 선생은 성년이 되어 서울에서 이상설, 이회영, 이시영 등과 어울려 한학 뿐 아니라 신학문도 섭렵하였으며, 1896년 성균관 직원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선생은 이상설, 정순만, 이동녕 등과 함께 황무지 개척권 반대 운동과 을사늑약 강제체결 반대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민중의 호응을 끌어내는데 어려움을 느끼게 된 선생은 애국사상 고취를 위한 교육계몽의 필요성을 깨닫고 이회영, 이동녕 등과 함께 국외 망명을 계획하였다. 1906년, 계획대로 망명을 결행하였고 간도 연길현 용정촌에 서전서숙을 세웠다. 선생은 이듬해 4월 이상설이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자 제2대 숙장을 맡아 서전서숙을 끌어나갔다. 그러나 통감부 간도파출소의 감시와 방해로 폐교에 이르자 국내로 돌아와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을 계속하였고,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의 교원으로 초빙되는 한편, 1908년 용인 원삼면 죽릉리에서 삼악학교를 세워 신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1978년 10월 필자는 다이토쿠지로부터 특별히 1시간동안 어떤 그림이든 마음대로 사진을 찍어도 좋다는 특별 허락을 받았다. 나는 그때 고려왕이 등장하는 양유관세음도를 골라 찍었다. 그 사진이 1978년 코리아저널 표지에 실린 것이다. 그림이 너무 높이 걸려 있어 바닥에서 찍을 수 없어 삐꺼덕 거리는 사다리를 여섯 번이나 오르락 거리며 촬영한 것이다. 위는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 1910-96)이 지은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녀는 미국출신의 동양미술사학자로 일본 교토의 다이토쿠지(大德寺)에서 오랫동안 불교미술을 공부하여 15세기 일본의 선화가 셋슈 연구로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일본문화의 원류가 한국문화라는 확신을 갖고 1978년부터 86년까지 서울에 머물면서 한국이 일본문화에 미친 영향을 비롯한 한국문화와 관련한 수많은 논문과 저서를 집필했다. 일본에 보존되어 있는 한국미술에 관한 한 필자가 다른 누구보다도 이 분야에 대해 많이 알고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한국의 문화재가 일본에 많이 가 있지만 그것은 일본작품 내지는 대부분 중국 것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