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한국인으로 중국 음악, 예술의 전당에 빛나는 이름을 새긴 걸출한 음악가 정율성(鄭律成, 1914-1976)을 기리기 위한 정율성탄생 100주년 기념행사가 지난 8월 25일 중국 장춘국제회의센터에서 성황리에 열렸다고 길림신문이 보도했다. 이 신문은, 길림성조선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에서 주최한 이번 기념행사는 정율성의 딸 정샤오티(71) 를 비롯하여 전 길림성정협부주석 정용철, 전 길림성인대상무위원회부주임 남상복 등을 비롯한 길림시의 지도층과 길림성 관계기관, 조선족지도자 간부, 조선족학교 등 1000여명이 기념식장을 가득 메웠다고 전했다. 중국의 3대 작곡가로 추앙받고 있는 정율성은 격동의 시대를 풍부한 음악으로 표현한 위대한 작곡가로 옌안송, 1928년,중국인민해방군군가(팔로군행진곡), 조선인민군행진곡 뿐만아니라 오페라, 항일가요, 군가, 서정가곡, 민요, 동요 등 여러 장르에 걸쳐 총 397곡의 명작을 남겼다. 정율성은 곡을 만들 때 중국 각지를 돌며 민중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창작의 바탕을 삼고 그것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작곡가로 유명하다. ▲ 중국 장춘서 열린 '정율성 탄생100주년 기념음악회' 사진 조선족네트 제공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김법린 선생은 1899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부터 민족독립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생각을 품은 선생은 1913년 영천 은해사로 출가하여 이듬해 항일불교의 중심사찰인 범어사로 승적으로 옮겼으며, 신식학교인 명정학교 보습과 및 구학교육인 강원과정을 배웠다. 이 때 스승인 국어학자 권덕규와 독립투사 서상일과의 만남이 후일 조선어학회 활동과 3.1운동에 참여한 동기가 되었다. 1917년 선생은 범어사의 인재양성 책에 힘입어 휘문의숙에 입학하였다가 이듬해 불교중앙학림으로 편입하였다. 이 시기 한용운 선생이 유심회를 조직하고, 불교잡지 [유심]지를 발간하자 선생은 철아(鐵啞)라는 필명으로 기고하였으며, 한용운으로부터 독립 완성에 매진하라는 당부를 받고 동료들과 함께 범어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중국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신상완, 백성욱, 김대용과 같이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특파원 자격으로 국내에 파견되는 등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만주 안동현으로 건너가 국내 독립운동과의 연결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며 항일비밀결사 한국민단본부의 기관지인 [혁신공보]를 발행하는 한편,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지복영 선생은 1920년 4월 11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지청천장군, 어머니는 윤용자였으며, 1924년 어머니를 따라 중국으로 갔다. 아버지 지청천 장군은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서로군정서 및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사령관으로 항일투쟁에 앞장선 분이었다. 선생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통해 민족의 독립을 위한 희생정신을 몸으로 익혔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중국 관내지역의 상황이 급박하게 진행되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진강, 남경 장사, 광주, 유주, 기산을 거쳐 중경에 정착하기까지 먼 길을 이동해야했다. 남경의 중국학교에서 수학하던 선생은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 가족들과 함께 한 피난길 중에도 피난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교사로 활동하였다. ▲ 서안으로 이동 중 지복영, 조순옥, 오광심 독립투사 1938년 11월 광서성 유주에 도착하자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를 조직하였다. 청년공작대원은 34명이었으며 이중 여성대원은 지복영 선생을 포함 11명이었다. 청년공작대는 주로 한국과 중국인들의 항일의식 고양을 위한 선전활동에 주력하였다. 중국인들에게 한국인의 항일정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김대지(1891~1942)선생은 1891년 경남 밀양군 밀양읍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강직한 성품을 지녔던 선생은 부친의 엄격한 가르침 아래 한학을 익히고 선비로서의 절개와 지조를 배웠다. 1905년 밀양지역의 반일독립투사의 요람인 동화학원에서 수학 한 후 민족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선생은 밀양에 청년회관을 건립하여 비밀결사 조직의 터전을 마련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항일투쟁단체인 일합사(一合社)를 조직하여 밀양지역의 청년들과 함께 독립운동의 전개방법을 모색하는 한편, 광복단, 대한광복회 등의 비밀항일독립단체에 참여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해 나가기 시작했다. 1910년대 후반부터 국내 항일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중국, 만주 등지를 왕래하며 활동을 전개하던 중 검거되기도 하였다. 출옥 후 고향인 밀양에서 비밀결사조직을 추진하다 여의치 않자 만주로 이주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 일봉 김대지 독립투사 1919년 국내에서 3.1만세운동이 전개되던 시기, 만주로 망명한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태동기부터 임시정부 의정원의원과 국무위원을 겸임하여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기초를 다지는데 헌신하였다.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드디어 유엔인종차별철폐위원회가 칼을 빼들었다. 비록 법적 구속력은 없다할지라도 유엔의 이번 조치는 타당한 조치이며 늦은 감 마저 있다.최근 극에 달하고 있는 일본인들의 재일동포와 한국인에 대한 증오표현(헤이트스피치, hate speech)에 대하여 유엔인종차별철폐위원회(国連人種差別撤廃委員会)로부터 일본정부가 법적규제를 하도록 권고 받았다고 아사히신문이 8월 30일자로 보도했다. 유엔인종철폐위원회(이하 유엔)는 8월 29일 일본정부에 대하여 증오표현(헤이트스피치) 문제에 의연히 대처하고 법률로 규제하도록 권고하는 최종견해를 밝혔다. 또한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피해자 조사와 사죄를 요구했다. ▲ 한국은 '악'이 아니라'적(敵)'이므로 죽여라고 쓴피켓 이번에 유엔이 밝힌 최종견해란 일본이 1995년부터 가입하고 있는 인종차별조약에 기초하여 2001년, 2010년에 이어 이번이 3회째이다. 유엔이 지적한 권고안은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유엔은 외국인노동자의 차별문제 등 약 30항목에 대하여 시정을 요구했다. 이는 도쿄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재일한국조선인을 중상모략하는 데모가 최근 심각한 수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아침 9시 반 차를 몰아 마이즈루를 향했다. 해마다 아내랑 둘이서 추도식이 열리기 이삼 일 전에 가서 추도비 주변을 깨끗이 치우고 향을 사른 뒤 가져간 꽃과 과일 그리고 곡주를 올리면서 희생된 조선인들을 기렸으나 올해는 아내가 일이 있어 혼자 다녀왔다. 올해도 어김없이 추도비 주변의 무궁화는 탐스런 꽃을 피웠고 원한의 바다는 잠잠했다. 요즘 건강이 안 좋아 장거리 운전이 몹시 피곤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몇 번이나 쉬면서 왔다. 하지만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우키시마호 폭침의 비극을 알리는 추도비에는 꼭 다녀 올 생각이다. 요에(余江勝彦) 회장을 비롯하여 많은 지역민들이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를 지켜주는 고마움이 이곳에 올 때마다 든다.” 이는 교토에서 우리 토박이말로 시를 쓰는 재일동포 시인 김리박 선생이 우키시마호 폭침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에 다녀와서 쓴 글의 일부다. 일본표기로는 “우키시마호침몰순난자비(浮島丸沈殉難者の碑)”라고 부르는 이 추도비의 유래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없는 가슴 아픈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다. ▲ 1978년 8월 24일 세운 우키시마호 폭침 희생자 추모비 일제강점기 일본의 탄광에서, 군수공장에서 힘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안녕하세요. 저는 아이들과 더불어 꿈과 희망을 틔워가며 지내고 있는 교사입니다. 사실 선생님께 편지를 띄우면서 참 여러 생각이 깃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선생님께서 남기신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아라. 긴 역사를 볼 때 진리, 정의, 선은 반드시 승리한다. 발 딛고 선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현실을 보면서 솔직히 먹먹하고 비통한 마음을 크게 느끼고 있던 터였습니다. 세월호 참사라는 안타까운 일과 또 그 후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는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1923년 9월1일 관동대지진 당시 스미다구에서는 혼쵸(本町)지역을 중심으로 대화재가 발생하여 아라카와(荒川) 강변에는 피난 나온 사람들로 넘쳐났다. 조선인들이 불을 질렀다 조선인이 공격해온다 등의 유언비어가 퍼져 구(舊) 요츠기바시(四つ木)에서는 군대가 기관총으로 조선인을 총살하였으며 일반인들도 살해 행위에 가담했다. 6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 아라카와 강의 방수로 개설 역사를 조사하던 어느 소학교 교사가 이 지역의 노인들로부터 관동대지진 당시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그 교사는 이러한 증언을 토대로 이들을 추모하자고 주변 사람들에게 호소하기 시작했다. 지진이 일어난 지 두 달 뒤인 11월 도쿄의 신문기사에 따르면 헌병경찰의 감시 하에 아라카와 강변에서 두 차례에 걸쳐 희생자 발굴 작업이 이뤄졌는데 그때 유해를 어디론가 운반하였으나 희생자 유골의 행방은 그 후 조사할 수 없었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하여 유골도 무덤도 없이 진상도 규명하지 않은 채 86년이 흘렀다. 이에 희생자들을 추도하고 역사를 반성하며 여러 민족이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일본사회의 창조를 염원하여 민간 여러분이 힘을 모아 이 비를 세우다. 2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홍원식 선생( 1877~1919 )은 경기도 수원 향남면 제암리에서 출생하여 대한제국 서울시위대 제1대대 서소문병영에서 근무하다 1907년 군대해산 후 의병 충남 등 각지에서 의병으로 활동했다. 1914년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안종후, 김성렬 등과 구국동지회를 결성하여 신교육운동 등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서 발표와 함께 탑골공원에서 만세함성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수원지역의 3.1운동은 3월 1일 수원 방화수류정(용두각)에서 시작된 이후 3월 26일 송산면 만세시위를 계기로 조직적이고 격렬해졌다. 송산면 만세시위 군중을 저지하기 위해 발포한 순사부장 노구찌가 군중들에 의해 처단되었고 격렬한 시위는 3월 31일 발안장터로 이어졌다. 홍원식 선생과 안종후, 김성렬, 이정근 등이 주도한 발안장터의 1,000여 시위군중이 일본인 상점 등을 상대로 거센 투석전을 벌였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일제의 무자비한 발포와 탄압으로 이정근이 수비대장의 칼에 찔려 숨을 거두는 등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4월 3일에는 발안만세운동과 연계한 우정, 장안면의 대규모 연합만세운동이 전개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김석진 선생의 호는 오천(梧泉)이며, 병자호란 당시 끝까지 주전론을 주장한 김상헌의 11세 손으로 경기도 광주에서 생부 낙균과 남원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860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홍문관, 사간원, 호조, 사헌부, 성균관, 규장각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치면서 호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1894년 이후 일제의 침탈과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격고 을미년의 변고에 하찮은 목숨을 버리지 못하였을 망정 어찌 차마 벼슬 길을 찾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연양리 사안당(思安堂)에 은거하면서 매일 의기를 참지 못하고 격앙되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905년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소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즉각 이에 대한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선생은 서울로 올라와 을사토역소(乙巳討逆疏)를 내어 조약에 찬성한 박제순,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 5적을 처단할 것과 각 공관에 성명을 내어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할 것을 주창한 것이다. 한편, 이 시기 을사늑약에 통분을 참지 못한 재야의 인사들이 자결, 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