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노병대(1856-1913) 선생은 속리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삼남 지역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 체포되어 한 눈을 제거당하고 유형 10년을 받았으며, 다시 의병활동을 도모하다 체포되어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단식 28일만에 순국하였다. 선생은 경북 상주군 화령면 관제리에서 아버지 노종주와 어머니 의성김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기호 남인학자이며 당대 유림의 거두인 성재 허전(許傳)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889년 34세에 창릉참봉이 되었다. ▲ 을사늑약 당시 대한문앞 일본군대 ▲ 경술국치날 통곡하는 국민 1882년 선생은 조선 구식군대에 대한 차별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무사를 모집하여 군란에 관련된 인물의 제거를 모의하였고, 1895년 10월 향교의 향사를 폐지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진사 허운 등과 함께 반대상소를 올리는 등 위정척사론에 입각하여 무너져 가는 조선의 현실 타개를 위해 적극 참여하였다. ▲ 을사늑약 조문 일부 1905년 조선에 대한 침략야욕을 만천하에 드러낸 일본은 보호라는 미명 하에 을사늑약을 강요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이에 선생은 통분을 삭히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가 거사를 간청하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천황 황후 폐하가 참석하신 가운데 전몰자 유족과 각계 대표가 다수 참석한 가운데 전국전몰자추도식을 거행합니다. 가족을 걱정하면서 조국을 그리며 전쟁터에서 쓰러져간 영혼들의 영전에 명복을 빕니다. 아베신조 수상은 15일 전국전몰자추도식 식전에서 이렇게 서두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아직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파퓨아뉴기니 등의 정글에서 유골조차 돌아오지 못하는 12만 명의 영혼들을 위해 합장하고 명복을 빕니다. (중간 줄임) 오늘은 평화의 맹세를 새롭게 하는 날입니다.라며 식사(式辭)를 마쳤다.그러나 이러한 아베 수상의 식사는 그간 역대 수상들이 아시아 제국이 여러 사람에게 고통과 손해를 끼친 것을 반성한다는 내용이 빠진 것으로 그 스스로가 말하는 미래지향적이고 항구적인 평화에의 공헌 주장과는 괴리감이 있는 태도다. ▲ 아베 수상의 '자기들만의 희생 추도사 모습' 15일 산케이신문 갈무리 15일 산케이 신문은 이러한 아베 수상의 아시아 제국에 대한 반성의 인사를 하지 않은 것을 놓고 과거 수상들이 하던 말을 답습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피력했다. 답습하지 않고 아베 수상 나름의 신념만을 말해서 좋다라는 뜻처럼 비친다.입으로는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의열투쟁의 선봉장 이성구 선생은 1919년 3.1운동 당시 선천면사무소 방화사건을 주도하여 징역 10년 형을 받았고, 병인의용대 소속으로 상해 일본영사관에 2차례 폭탄을 투척하여 징역 7년을 선고받고 경성감옥에서 옥고 중 순국하였다. 선생은 1896년 평안북도 선천군 수청면 고동읍에서 태어났다. 독립운동 기간 중 이수봉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선생은 이밖에도 이동농, 또는 김동농이라는 이명을 사용하며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될 때 선생은 선천읍에 있던 선천면사무소 공격 방화사건을 주도하였다. 보안법위반 및 방화소요죄로 징역 10년의 판결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일제의 고문과 가혹행위로 병보석을 얻어 1923년 5월 형집행정지 석방되자 선생은 이를 이용하여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망명 후 1923년 9월 상해 독립신문사에 입사한 선생은 2년 여 동안 식자공으로 근무하면서 독립운동 상황을 살피고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다가 마침내 의열투쟁의 선봉에서 일제에 항거하기로 결심하고 1926년 1월 병인의용대에 참여하였다. 1926년 병인의용대에서는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 그림 이무성 화백 빗창으로 다구찌 도지사 혼쭐낸 제주 해녀 부춘화 이윤옥 물질하던 옷 벗어 말리며 가슴 저 밑바닥 속 한 줌 한을 꺼내 말리던 불턱에 겨울바람이 일고 있오 비바람 눈보라 치는 날 무자맥질 숨비소리 내뱉으며 거친 바닷속 헤매며 따 올린 처녀의 꿈 짓밟고 착취하며 검은 마수의 손 뻗치려던 도지사 다구찌 놈 보란 듯이 빗창으로 혼쭐내던 세화리 장터의 억척 여인이여! 그대의 분노로 저들의 야수는 꺾이었고 그대의 피흘림으로 조국 광복은 한발 앞서 이뤄졌나니 평화의 섬 제주를 찾는 이들이여! 세화민속오일장 한 접시 회 마주하고 부디 말해주소 해녀 부춘화의 간담 서늘한 애국 이야기를! ▲ 족자 그림 (38 x 118cm) *불턱: 해녀들이 물 밖으로 나와서 모닥불을 지피고 젖은 옷을 말리는 곳 *숨비소리: 해녀들이 작업하다 물 위로 고개를 내밀고 호오이하며 길게 내쉬는 숨소리 *빗창: 전복채취 때 쓰는 쇠갈고리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섭씨 35도를 오르내리는 도쿄의 무더위 속에서 긴자에 나간 김에 납량특집 가부키 1막을 보았다. 가부키(歌舞伎)는 전체 공연 가운데 1막씩만도 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인데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가 나온다든지, 전부 소화하기 어려운 외국인들에게 특히 1막짜리는 인기가 있다. 가부키는 전체를 다 보려면 보통 3~4시간 공연에 1만 5천 엔부터 2만 엔 정도 하지만 1막의 경우는 1천 엔~2천 엔 정도다. 가부키(歌舞伎)는 말 그대로 노래와 춤으로 이뤄진 일종의 연극인데 그 역사는 4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사들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의 시대가 가고 1603년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선 이래 사람들은 지긋지긋한 전쟁놀음에서 해방구를 찾기 시작했고 때마침 귀여운 꼬마 아가씨 둘이 춤과 노래로 사람들을 즐겁게 한데서 유래한다는 기록이 있다. ▲ 도쿄 긴자거리의 가부키 전용극장 《다문원일기(多聞院日記, 1582)》에 따르면 가가(加賀)는 8살, 쿠니(國)는 11살 먹은 아동으로 춤 잘 추는 이 두 신동 구경에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그러나 또 한 전승에 따르면 이즈모(出雲) 출신의 무녀(巫女) 오쿠니(阿國)가 이즈모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그림 한국화가 이무성 독립운동가 3대를 지켜 낸 겨레의 딸, 아내 그리고 어머니 '김락' 이윤옥 나라의 녹을 먹고도 을미년 변란 때 죽지 못하고 을사년 강제 조약 체결을 막아 내지 못했다며 스무나흘 곡기를 끊고 자결하신 시아버님 아버님 태운 상여 하계마을 당도할 때 마을 아낙 슬피 울며 하루 낮밤 곡기 끊어 가시는 길 위로 했네 사람 천석 글 천석 밥 천석의 삼천 석 댁 친정 큰 오라버니 백하구려 모여든 젊은이들 우국 청년 만들어 빼앗긴 나라 찾아 문전옥답 처분하여 서간도로 떠나던 날 내앞 마을 흐르던 물 멈추어 오열했네 의성 김 씨 김진린의 귀한 딸 시집와서 남편 이중업과 두 아들 동흠 중흠 사위마저 왜놈 칼 맞고 비명에 보낸 세월 쉰일곱 늘그막에 기미년 안동 예안 만세운동 나간 것이 무슨 그리 큰 죄런가 갖은 고문으로 두 눈 찔려 봉사 된 몸 두 번이나 끊으려 한 모진 목숨 11년 세월 그 누가 있어 한 맺힌 양가(兩家)의 한을 풀까 향산 고택 툇마루에 걸터앉아 흘러가는 흰 구름에 말 걸어본다 머무는 하늘가 그 어디에 김락 여사 보거들랑 봉화 재산 바드실 어르신과 기쁜 해후 하시라고 해거름 바삐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우에노공원 안에 있는 도쿄국립박물관을 찾은 어제(10일)는 일본열도로 북상하는 태풍의 영향권으로 산발적인 빗방울이 뿌리고 있었지만 공원을 찾은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본관에서는 대만의 국립고궁박물관전시회가 열리고 있었고 기자가 찾은 곳은 본관 옆에 있는 동양관 전시실이었다. 이곳 5층에는 조선유물전시관이 있다. 최근 한국 언론에서는 문화재제자리찾기(대표 혜문스님)는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한 오구라 컬렉션 중 금관총, 조선 대원수 투구, 창녕출토 유물, 연산동 출토 유물 등 4건 34점이 비정상적인 유통경로로 수집된 도난 도굴품임을 밝혀냈다. 이에 도쿄국립박물관에 지난 1일 보관중지 요청서를 발송하고, 20일까지 입장을 밝히지 않으면 일본 법원에 제소할 계획이다.라는 보도를 앞 다투어 한바 있다. 도쿄국립박물관 동양관 5층 조선유물실에는 오구라가 게걸스럽게 조선에서 수집해간 국보급 유물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유물가운데는 경남 창녕 출토의 5세기 신라시대 유물인 금팔찌, 굵은 고리 귀걸이 등이 특히 눈길을 사로잡았으며 말탄사람(騎馬人物土偶), 바퀴모양 술잔(車輪付双角杯) 등 5세기 가야지방의 출토품도 눈에 띄었다.
[그린경제/얼레빗 = 도쿄 이윤옥 기자]8월 9일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일(이곳에서는 원폭의 날이라함) 69년을 맞아 일본 언론에서는 추도식 장면을 생방송으로 내보냈다. 제11호 태풍의 일본열도 북상으로 나가사키 일대에는 비바람이 치는 가운데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 다시는 이 땅에서 원자폭탄 투하 같은 참상은 없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 8월 9일 원폭의 날을 맞아 나가사키에서 열린 기념식 생중계 (NHK방송 사진 찍음) 추도식 생중계를 보면서 식민침략의 쓰라린 역사를 되새겨야 하는 한국인으로서 일본이 정말 핵무기의 두려움과 전쟁없는 사회를 꿈꾸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것은 69년째 원폭 추도식을 해오고 있으면서 핵무기 없는 평화로운 세계 구현을 짓밟는 아베정권을 탄생시킨 것이 오늘의 일본인들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한편 추도식 다음날일 10일 아침 아사히 신문보도에 따르면 아베정권의 집단적자위권에 대한 강경자세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하고 있는 피폭 5단체(被爆5団体)와 나가사키피폭유족회 회장 마사바야시(正林克記) 씨가 집단적자위권은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붙는 격이라며 집단적자위권 철회를 주장한다는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황학수 선생은 대한제국 군인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고, 만주에서 한국독립군 부사령관으로 활약하였으며, 한국광복군사령부 총사령 대리 및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하였다. 선생은 1877년 서울 화동에아버지 황두연과 어머니홍씨 사이에 3남으로 태어났다. 1900년 대한제국 육군 무관학교 졸업 후 육군 참위로 임관되어 시위 제1연대 제3대대로 부임하였다. 육군연성학교 교관으로 복무할 당시, 경북일대의 의병진압 명령을 받은 선생은 안동진위대 대장직을 사퇴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의병의 사살을 막고 체포 후 모두 석방 조치하였다.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해산 당하자, 제천으로 내려가 보명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활동에 전념하였고 육군무관학교 동기생 다수가 만주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독립군 양성을 위해 망명을 결심하여 1919년 3.1운동 발발 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선생은 중국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활동을 시작하여 1919년 11월 군무부 육군무관학교 교관으로 군사간부를 양성하였으며, 이듬해 12월 군사간부학교가 문을 닫게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강영소 선생은 미국 하와이에서 에와친목회, 합성협회, 국민회 등을 조직하고, 흥사단 간부 및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을 맡아 동포사회를 이끈 지도자이다. 선생의 부친과 5형제가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일가족 4명이 건국훈장에 추서되는 등 독립운동 명문가이다. 선생은 평안남도 증산에서 1886년 2월 18일 태어났다. 1903년 증산군 공립소학교를 마치고 1905년 4월 부친 강명화와 함께 미국 하와이로 이민한 선생은 에와농장에서 설립된 친목회와 호놀룰루에서 설립된 공진회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 강영소 선생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퇴위 당하고 정미조약이 체결되는 등 국권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이에 국권회복의 후원과 교민사회의 발전을 목적으로 하와이 한인단체들이 합동하여 한인합성협회를 결성할 때 선생은 총무와 서기 등을 맡아 활동하였으며, 1909년 2월 한인합성협회와 미주 본토의 공립협회가 합동하여 국민회가 결성될 때 양 단체의 합동을 주도하였다. 이어 1910년 2월 미주의 대동보국회와 합동하여 대한인국민회로 출범하자 선생은 하와이지방총회의 총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