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도쿄 이윤옥 기자] 전형적인 일본의 문양을 아로새긴 문갑, 대형 장롱, 가죽소파와 식탁 따위의 가구들이 유명한 가구회사 제품 못지않게 전시하고 있었는데 이것들은 모두 일본 형무소의 재소자들이 손수 만든 제품들이다. 도쿄 신주쿠 역 구내에서는 7월31일부터 8월 7일까지 형무소 작품전을 열고 있어 어제 마지막 날 전시장을 다녀왔다. 전시장에는 세련된 신사, 숙녀화는 물론이고 여성들의 핸드백, 모자뿐만 아니라 도자기 컵, 편지지, 수첩, 안경집 같은 일상소품들 심지어는 이불까지 없는 물건이 없을 정도로 빼곡하다. 값은 결코 싸지 않았지만 품질만은 일류 못지않아 보였는데 물건들을 고르는 시민들로 매장은 매우 북적 거렸다. 기자도 노트북 가방 같이 생긴 네모 반듯한 검은가죽 가방이 너무나 맘에 들어 요리조리 살펴보았는데 가격이 3만엔(우리돈 30만원)이라 구경만 했다. ▲ 형무소작업제품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 한 어르신이 구두를 고르고 있다. 일본 형무소에는 사업부 작업 부서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재)교정협회형무소협력사업부에 물품 제작을 의뢰하여 동 사업부에서 조달한 원자재를 이용하여 물건을 만들어 판 뒤 제품의 가공비를 지불하는 시스
[그린경제/얼레빗= 도쿄 이윤옥 기자] 싸고, 맛있고, 빨리 나오는 음식점을 일본에서 꼽는다면 당연히 덮밥 집을 들 수 있다.일본말로는 돈부리라고 하는데 원래 돈부리(井)란 것은 덮밥을 담는 그릇을 말한다. 그런데 지금은 이 그릇에 밥이나 국수를 담고 그 위에 불고기를 얹거나 새우튀김을 얹거나 김치를 얹어 먹는 음식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불고기를 얹은 요리는 규동(牛井), 김치를 얹으면 기무치동(キムチ井)이라고 한다. 이러한 돈부리 집에는 스키야, 요시노야, 마츠노야 같은 체인점이 있는데 이들 음식점은 주로 역전 가까이에 있거나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자리한다. 음식 값도 300엔부터 비싸야 600엔을 넘지 않아 샐러리맨들에게는 인기 음식점이다. 그런데 최근 이런 곳에서 근무할 일손이 부족하다는 뉴스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식당 뿐 아니라 건설현장 같은 곳에서 일할 사람이 딸린다고 아우성인 것이다. 식당 같은 곳은 거의 알바생이 주류를 이루는데 식당의 경우 임금은 대개 시간당 900엔 전후이다. ▲ 싸고 맛있고 빨리 나오는 일본의 덧밥집 스키야, 일손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노동환경이 너무 열악하다. 사원전원이 평등하게 주 2
[그린경제/얼레빗 = 도쿄 이윤옥 기자] 한 오십년 정도 했지요. 그런데 정말 책방 운영이 어렵습니다. 죄송합니다. 깎아드리지 못해서... 책방 할아버지(이이지마서점 '飯島書店', 이이지마히사요시 '飯島芳久,'77살')는 책 몇 권을 골라 값을 치르면서 깎아달라는 기자의 말에 연신 고개를 수그리며 사죄를 했다. 문고판 7권 값은 모두 2,050엔(우리 돈 2만 원 정도)인데 기자는 설마 50엔은 깎아주겠지 싶어 우수리를 떼자고 말을 건넨 것이었다. 도쿄 와세다대학이 자리한 거리 이름은 와세다거리(일본말로는 와세다도오리) 인데 이곳에는 고서점이 줄지어 들어 서 있다. 적어도 예전에는 그랬다. 깎아 줄 수 없다는 책 값 2,050엔을 다 건네고 나니 할아버지는 흰 포장지에 책을 곱게 포장하기 시작했다. ▲ 이이즈마 책방 할아버지 ▲ 할어버지네 책방 대충 비닐 봉투에 담아 주어도 되련만 예전 방식대로 책을 포장하는 할아버지의 더딘 손놀림이왠지 정겨워 말을 붙였다. 사실 기자는 15년 전 와세다대학에 연구원으로 와 있었기에 와세다거리의 고서점은 늘드나들었던 곳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와세다대학에 와있어 시간을 내어 고서점 거리를 찬찬히 걷다보니 눈에 띄게
[그린경제/얼레빗 = 도쿄 이윤옥 기자] 8월 9일 나가사키원폭의 날(長崎原爆の日)을 앞두고 다우에도미히사(田上富久) 나가사키 시장과 시의회 의장이 어제 일본적십자 나가사키원폭병원을 찾아 입원해 있는 피폭자들을 위문했다.고 나가사키신문이 8월 2일 보도했다. ▲ 나가사키 시장이 원폭피해자들을 위문했다는 나가사키신문 보도 기사(8월2일) 69년 전 8월 9일, 일본은 미군에 의한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세례를 받았다. 상상할 수 없는 위력의 원자폭탄은 이 두 도시의 하늘을 검은 구름으로 뒤 덮었으며 도시를 쑥밭으로 만들고 수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당시 나가사키시의 인구 25만명 가운데 14만 9천명이 죽거나 다치고 건물은 36%가 파괴되었다. 그 희생자들이 아직도 후유증으로 병원에 살아 있어 나사키시장과 의회 의장이 꽃다발을 사들고 찾아갔다는 기사다. 동석했던 사토(佐藤) 의회 부의장은 원폭의 무서움과 평화의 존엄함을 젊은 세대에게 전해주십시오라고 했다고 신문은 전한다. 해마다 일본은 원폭일(8월 9일)을 앞두고 정치인들의 피폭자 위문, 평화 사수 같은 보도를 빠지지 않고 내보내는데 이러한 보도에 유감스러운 점은 왜 피폭자가 생겼는가? 왜 원자폭탄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기자]김원국 (1873-1910) 선생은 아우와 함께 광주 무등산에서 거의하여 전남 중서부 지역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 영광 불갑산 전투에서 체포되어 교수형으로 순국하였고, 김원범 선생은 전해산과 대동창의단을 조직하여 중군장으로 활동하다 일본군과 교전 중 체포되어 자결 순국하였다. 1907년 7월 고종의 강제퇴위와 정미7조약의 체결, 그리고 이어진 군대해산 조치로 일제의 식민지화가 본격화 되자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고 곳곳에서 교전이 끊이지 않았다. 그중 특히 전라도 지역은 1908년 이후 후기의병의 절반이상을 차지할 만큼 수많은 의병부대가 활약한 곳이었다. 김원국, 김원범은 전라도 광주 출신의 형제 의병장이다. 형 김원국은 1905년 광산군 송정리에서 일본군을 타살한 후 이듬해 3월 무등산에서 300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고, 동생 김원범은 그 선봉장이 되었다. 1907년 9월에는 호남의병장의 거목인 기삼연 의병부대에 합류하였고, 이어 12월 김준과 합진하여 일본군 4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 김원국 의병장(형) 아우 김원범은 1908년 7월 전해산 의병장과 함께 대동창의단을 조직하여 중군장으로서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영국인 베델( 裴說 ernest thomas bethell, 1872. 11. 3. ~ 1909. 5. 1. )은 일제강점기 한국민의 입장에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저항한 인물이다. 베델은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 자격으로 국내에 입국하였다. 당시는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로 전국에서 반일 민족운동이 전개되고 있던 시기였다. 선생은 양기탁과 함께 국한문판 및 순 한글판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발행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의병 활동을 보도하는 등 항일 언론 활동을 벌였다. ▲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적극 알리고 합세했던 베델 일제의 사전 검열로 한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에는 실을 수 없었던 강력한 반일 논조의 기사를 외국인 신분을 이용해 보도했다. 특히, 고종 친서를 영국 트리뷴지와 대한매일신보에 게재해 을사조약의 무효를 알리는 등 일본의 강압적인 침략상을 국내외에 폭로했다. 한편, 일제는 한반도 침략에 큰 걸림돌이던 베델을 추방하기 위해 영국정부에 선생의 처벌을 끈질기게 요구하였다. 결국 선생은 영국 법정에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길가에 세워져 있던 관광버스에 버스대절닷컴이라는 글씨가 쓰여있다. 아마도 자기네 누리집 주소가 그런 모양인지 아니면 좀 더 눈에 띄려고 쓴 것인지 모르지만 대절이란 말은 가시기리(貸切)라는 일본말에서 온 말이다. 버스를 통째 빌리는 것을 요즈음은 전세버스라고 한다. 사실 전세라는 말도 한자말이긴 하지만 우리말 속의 일본말찌꺼기를 가려내어 가능한한 우리토박이말로 바꾸려는 노력을 무시하지 말았으면 한다. 추월(오이코시)은 앞지르기, 노견(로카타)는 갓길 처럼 대절(가시기리)은 전세로 바꿔쓰자. 단 하나의 낱말이라도 자기 겨레의 말로 만들어 쓰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한 때다.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경진(庚辰) 25일 황태자가 성인식(원복-元服-이라함)을 했다. 14살이며 성무왕(聖武天皇)이다. 이날 조정에서는 대사면을 했다. 죄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사면이 이뤄졌으며 신분도 묻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조정에서는 이날을 기해 100살이 넘은 사람에게는 곡식 5말을, 90살 이상인 자에게는 3말, 80살 이상인 자에게는 1말을 하사했으며 효자와 절부(節婦)는 마을 입구에 비를 세우고 종신토록 조세를 면제했다. 또한 과부나 홀아비, 독거노인, 중병환자들에게는 각각의 상황에 맞게 필요한 물건을 하사했다.고 《속일본기, 續日本紀》는 전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원명왕 (재위 707~715)때의 일이다. 《속일본기》에는 주로 정치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 위와 같은 특별한 날에는 요즈음처럼 이른바 특별사면을 했다는 기록이 종종 보인다. 뿐만 아니라 699년 11월에는 야마토 가츠라기노가미 마을에 사는 가모 씨가 1남 2녀의 세쌍둥이를 낳았다. 조정에서는 포와 면 그리고 쌀을 산모에게 하사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세쌍둥이는 희귀한 일이라 국가가 신경을 쓴 기색이 역력하다. 《속일본기》에는 세쌍둥이 또는 쌍둥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차경신 선생은 국내에서 부인회, 간호대 및 청년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비밀요원으로 활약하였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어학교 초대교장 및 대한애국부인단 총단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선생은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입각한 평등관을 정립하고, 민족대표 양전백 선생이 세운 보성여학교에 다니면서 민족의식을 지닌 인물로 성장하였다. 졸업 후 명신학교 교사로 활동하다 다시 정신여학교 사범과에서 수학한 선생은 이후 함남 영생학교, 진성여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민족교육의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1918년 선생은 일본 요코하마 여자신학교로 유학을 떠나 평생의 동지인 김마리아를 만나게 되었다. 이듬해 요코하마 유학생 대표였던 선생은 김마리아와 함께 2.8독립선언서 전문을 국내 반입할 것을 논의하고 부친의 사망을 구실로 국내로 들어왔다. 여성독립운동가 차경신 선생 2월 15일 부산항에 도착한 선생은 김마리아와 함께 비밀장소인 백산상회에서 신한청년단 당수 서병호 등을 만나 여성 단체 조직을 계획하였고, 평북 선천에서 신한청년당 회원 50여 명을 모집하
[그린경제/얼레빗 = 도쿄 이윤옥 기자] 동자석, 문인석은 조상의 무덤 앞에 세워 무덤을 수호하는 석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재는 도난을 만나 외국의 박물관이나 가정집 정원을 장식하는 장식품으로 전락 되었다. 자국의 문화재가 외국으로 반출 되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천신일(千信一) 고려대학교교우회장 (세중고석상박물관 설립자)은 국내는 물론 해외소재 문화재를 회수하기 위해 전력을 다 해왔다. 그 결과 2001년 7월 일본 소재의 70여점의 문화재가 한국으로 돌아갔다. 이 해에 마침 와세다대학은 창립 125주년을 기념하여 천신일 씨가 동자석과 문인석 제주동자상(벅수)을 기증했다. 2007년 10월 21일 ▲ 오쿠마 강당 뒤에 있는 학생식당 가는 길목 왼쪽 첫번째에 제주동자상(벅수)이 있고 조금 더 간 곳 왼쪽에 문인석이 삐죽이 보이는데 식당을 드나드는 학생들은 전혀 의식하지 않고 드나들고 있었다. ▲ 제주동자상(벅수) 한쌍이 서 있다. ▲ 문인석 한쌍이 학생식당 가는 길목에 서 있다. 이는 와세다대학 오쿠마강당 뒤에 있는 학생식당 입구에 서있는 문인석 옆에 세워둔 일본어 설명판에 있는 말이다. 마침 와세다대학을 찾은 기자는 점심을 먹으러 학생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