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김붕준 선생은 3.1만세운동을 주도한 후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고,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독립운동 세력의 단결에 노력하였으며, 임시정부 광동대표단 단장 및 국무위원으로 조국광복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선생은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태어나 기독교의 영향 속에서 신학문과 한학을 수학하였고, 1908년 보성중학교에 입학한 후 서우학회(서북학회) 및 신민회와 청년학우회에 가입하여 본격적으로 국권회복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 서울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중국 상해로 망명한 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군무부 서기 및 참사, 교민단 총무 및 국무원 비서장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적십자회와 흥사단 원동위원부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독립운동 재정 마련을 위하여 공평사를 설립하여 협동조합 형식의 경제운동도 추진하였다. ▲ 김붕준 선생 1927년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를 결성하여 집행위원으로 민족유일당 운동을 지도하였고, 1930년 한국독립당을 출범시켜 민족통일전선 구축운동을 계속하였다. 1932년 한국독립당 광동지부장으로 화남지역의 독립운동 역량을 강화하였고, 1933년 임시정부 주월(광동)대표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도쿄 시부야 거리는 언제나 사람들로 바글거린다. 그 복작대는 시부야 역 앞 작은 공원에 충견 하치의 동상이 서있다. 시부야 역의 하치 동상은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곳으로 어제 찾은 하치동상 앞에는 여전히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초만원이었다. 그 가운데는 하치의 모습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붐볐고 이 날도 하치는 카메라 세례를 받고 있었다. 충견 하치는 1923년 일본 북부 아키타현에서 태어났다. 이른바 아키타견(秋田犬)으로 한국의 진돗개만큼이나 뼈대 있는 족보 출신이다. 태어난 이듬해 충견 하치는 개를 좋아하는 동경제국대학 농학부 교수인 우에노 씨 집으로 오게 된다. 우에노 교수는 하치에게 꼬리표를 달아 화물열차 편으로 아키타에서 도쿄까지 실어 오는데 무려 20시간의 긴 여행길 이었다. 이때부터 하치는 우에노 교수 집에서 금이야 옥이야 대우 받으며 무럭무럭 크게 되는데 충견 중에 충견인 만큼 주인의 극진한 사랑을 뼈 속까지 느끼게 된다. 우에노 교수 집에는 하치 말고도 죤과 에스라는 개가 있었는데 유독 하치만은 주인의 출퇴근 시에 현관에서 배웅을 했으며 어느 날 부터인가는 주인이 이용하는 시부야 역까지 마중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일제강점기 시기의 독립운동에 관심이 많아 관련 사적지들을 답사하는 것을 좋아하는 직장인입니다. 보통 사적지 답사는 국내 또는 중국을 많이 갔지만 올해에는 일본에 가볼 생각을 하고 계획을 하던 중 이봉창의사 순국지라는 한 장!! 우연히 본 사진 한 장이 나를 이봉창이라는 사람에 대해 주목하게 만들었습니다. 아쉽게 실패한 의거로만 알고 있던 사건이 관심을 가지고 볼수록 아주 중요한 사건임을 알게 되었고, 4월과 6월 2차에 걸쳐 도쿄에 가서 당신의 행적을 찾아보고 독립운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양전백(梁甸伯,1870.3.10. ~ 1933.1.17.)선생은 평북 선천의 명신학교, 신성중학교, 보성여학교 등의 설립에 참여하여 민족교육에 앞장섰으며, 105인 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르고 민족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에 참여하여 자주독립을 주창하였다. 선생은 평안북도 의주군 고관면 상고리에서 태어났다. 양반 가문의 후예로 증조부 슬하에서 한문을 배우며 성장한 선생은 15세에 과거 준비를 하기도 하였으며, 1892년 김관근과 함께 서울 정동교회에서 기독교와 서구문명을 접하고 평북 구성으로 돌아와 한문과 함께 한글과 성경을 가르쳤다. ▲ 양전백 선생 1894년 12월 청일전쟁으로 평안도 일대가 온통 싸움터가 되어 학당 운영이 불가능해지자 선생은 1896년 12월 평양에서 휘트모어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통역을 하였다. 평북지역에서 휘트모어와 함께 선천에 거점을 마련하고 일대를 순회하며 교회를 세우고 교육사업에도 힘을 기울여 선천 유지와 교인들의 찬조를 받아 초등교육기관으로 명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평북 일대의 교회들은 일본군과 러시아군의 막사 또는 병원으로 징발되어 시설이 파괴되거나 불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한상렬((1876. 4. 2.~1926. 9. 19.) 선생은 대한제국군 강제해산 뒤 횡성에서 의병을 조직, 민긍호 의진 등과 연합의진을 형성하여 의병전쟁을 전개하였으며, 만주 망명 후 독립군 참모로 보급품 확보 등의 중책을 맡아 활동하다 쉰살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만국평화회의에 헤이그밀사를 파견한 광무황제의 책임을 물어 강제로 퇴위시킨 후 정미 7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국권침탈의 길로 들어섰다. ▲ 열악한 의병의 무기 1907년 서울의 시위대를 시작으로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이 본격화되자 제1연대 1대대 대장 박승환 참령은 자결로 항거하였으며, 이는 시위대 대원들에 이어 지방 진위대의 봉기로 확산되었고, 의병봉기의 도화선이 되어 후기의병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강원도 지역에서는 원주진위대가 가장 먼저 봉기하였고 그 중심에 민긍호 의병장이 있었다. 한상렬 선생은 고향인 강원도 횡성에서 일어나 지역민을 중심으로 의진을 형성하였다. 선생은 민긍호 의병장과 연합작전을 수행하면서도 약 200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독자적인 활동도 전개하였다. 일본군의 의병
[그린경제/얼레빗 = 도쿄 이윤옥 기자] 도쿄 료고쿠(両国)에는 에도도쿄박물관(江戸東京博物館)이 있다. 에도도쿄박물관장이 직접 “동경에 오면 에도도쿄박물관에 꼭 오라”고 권하는 에도도쿄박물관은 올해로 설립 21년을 맞이한다. 가만히 서 있어도 등줄기에 땀이 흐르는 어제 섭씨 37를 오르내리는 날씨 속에 에도도쿄박물관엘 다녀왔다. 에도란 지금의 동경을 일컫는 말로 덕천가강(徳川家康)이 풍신수길(豊臣秀吉)을 물리치고 지금의 동경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1603년부터 명치시대가 시작된 1868년 이전까지 265년간을 말한다. 1603년이라면 조선이 개국하여 211년이 지난 때이고 제14대 왕인 선조임금 재위기간이다. (재위 1567∼1608). 평생을 싸움으로 시작해서 싸움으로 망한 풍신수길 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덕천가강의 시대는 비록 사무라이 정권이기는 해도 전 시대보다는 평온했다. 일본 역사상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운 시대를 꼽는다면 헤이안시대(794-1192) 다음으로 에도시대(1603-1868)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 에도시민의 물 공급 시설 ▲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던 모습은 수도 시설이 나오기 전에는 어느나라나 비슷하다. 그러나 인류에 있어서 1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도쿄의 한 여름은 한국의 무더위 보다 더 덥다. 그것은 일본의 습도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더위는 나무 그늘에 가면 어느 정도 식지만 도쿄의 무더위는 그런 여유를 주지 않는다. 너무 덥다보니 자기 자신보다도 가족이나 친지가 생각나는 것일까? 그런 증거가 바로 무더운 여름날 일가친척과 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다. 이름 하여 쇼츄미마이(暑中見舞い)다. 우리말로 굳이 번역한다면 무더위 안부 편지라고나 할까? 쇼츄미마이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지만 직접 안부를 묻고 싶은 사람 집에 찾아가기도 한다. 편지는 대개 엽서를 보내는데 엽서에는 파도치는 그림이라든가, 시원한 계곡 그림 등이 그려져 있어 엽서를 받는 사람이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게 한다. ▲ 무더위 안부 편지용 엽서 카모메메루 (かもめ~る)광고 일본우편주식회사(日本郵便株式會社)에서는 이 시기를 특별 엽서보내기 기간으로 정하여 1950년부터 쇼츄미마이용우편엽서(暑中見舞用郵便葉書)를 발행하고 있다. 또한 1986년부터는 엽서에 복권 번호처럼 번호를 새겨 넣어 당첨되면 상품을 주는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무더위 안부를 묻는 쇼츄미마이 엽서 이름을 카모메메루 (かもめ~る)라고 하는데 이
[그린경제/얼레빗 =이윤옥 기자]이민화 선생(1898-1923)은 사관연성소 교관으로 독립군을 양성하고, 북로군정서 교성대 소대장으로 군사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여 승리로 이끌었다. 선생은 1898년 충남 아산군 염치면에서 태어났다. 충무공 이순신의 11대손인 선생은 어릴 때부터 충무공의 무훈을 마음에 새겼고, 결혼 후 1917년 12월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만주로 망명하였다. 선생의 망명은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역임한 이세영(이천민)의 영향 받은 것으로 보인다. 충무공의 후손으로 일제에 항거할 것을 다짐하고 망명을 결행한 선생은 무장투쟁을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삼고 군사간부로서의 능력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 이민화 독립투사 만주지역은 1911년 삼원포 추가가의 신흥강습소로부터 시작하여 무장투쟁을 위한 독립군 양성의 요충지였다. 신흥무관학교를 통해 배출된 3천5백여명의 졸업생들은 만주 무장투쟁의 주역으로 이후 혁혁한 공적을 세웠다. 선생은 1920년 왕청현 십리평의 군사간부학교인 사관연성소 제2구대장으로 생도를 통솔하면서 교관으로 활동하였고, 북로군정서에서 가장 강력했던 엘리트 군대인 교성대 소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봉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오백년 선말(鮮末)에 태어나 我生五百末 붉은 피 전신에 어리어 赤血滿空腸 중년의 항일 19년에 中間十九載 터럭은 추상처럼 변했구나 鬢髮老秋霜 국망에 눈물은 마르지 않고 國亡淚未已 친상에 마음은 더욱 상한다 親沒心更傷 홀로 서 있는 옛산은 푸른데 獨立故山碧 백계)百計)에 무일방(無一方)이라百計無一方 만리 먼 바다가 보고파라 萬里欲觀海 7일이 양을 회복하는 동지이니 七日當復陽 희고 흰 천 장 물결이 白白千丈水 족히 내 한 몸 간직하겠구나 足吾一身藏 - 김도현 의병의 '절명시'- 김도현([1852-1914) 선생은 한말 대표적인 의병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1896년 영양 청량산에서 거사하여 경북ㆍ강원지역의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을 전개하였고, 1905년 상소투쟁과 더불어 격문을 지어 의병 궐기를 촉구하였으며, 1914년 국권회복의 염원을 안고 동해 바다에서 투신 순국하였다. ▲ 의병장 김도현 선생은 1852년 경제적으로 풍요했던 집안에서 태어나 유교적 가르침 속에서 성장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으로 유림들은 의병을 일으킬 준비에 나섰다. 선생은 영양읍에서 통문을 돌리고 영양지역 유생들과 의병 일으킬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일본의 최고 관광지 1위는 교토 후시미이나리대사伏見稻荷大社)로 꼽혔다. 세계최대의 여행 입소문 사이트인 미국의 트립어드바이저에 따르면 외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일본의 관광지는 교토 소재 후시미이나리대사로 이것은 종래 청수사나 금각사의 인기를 누른 것이다. 이는 일본 산케이신문 7월 5일자 보도다.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오이나리상(お稻荷さん)이라고 알려진 교토 후시미이나리대사는 전국에 4만 개 이상 있는 이나리신사(稻荷神社)의 총본사다. 일반적으로 상업번창의 신으로 알고 있으나 실제 이나리신사에서는 오곡의 풍요를 뜻하는 농업의 신을 모신다. 일본에 있는 8만여 개의 신사 중 절반을 차지하는 이나리신사는 일본 땅 어디를 가나 쉽게 만나는 신사이며 교토의 후시미이나리대사는 이 신사의 우두머리 격이다. ▲ 우리나라 절의 기와불사처럼 도리이 기둥에는 기부자의 이름이 적혀 있다. 후시미이나리대사에 바친 크고 작은 도리이는 일만여 개에 이른다. 교토 후시미이나리대사는 면적이 27만평으로 그 크기만으로도 압도적인데다가 해발 233미터의 이나리산(稻荷山) 산 정상까지 가는 길에는 1만여 개의 붉은 도리이가 만리장성 모양 끝없이 길게 늘어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