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토교에서 정씨(정현숙 애국지사를 말하며 오광선 장군의 부인)는 홀로 삼남매를 키우느라 늘 궁색한 처지로 형편 필 날이 없었고 백범은 오광선의 가족들이 그렇게 고생하는 것을 안쓰럽게 생각하여 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중략) 영걸어머니(정현숙 애국지사)는 고생이 심했다. 내가 다른 이들보다 특히 열걸 어머니에 정을 쏟고 희영이나(큰따님) 희옥에게(작은 따님) 좀 더 잘해주려 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영걸어머니는 만주에서 농사 경험도 있고 몸도 건강해서 내 밭일을 많이 도와주었으며 나는 그 대신 그 집 삼남매의 옷가지 손질이며 이부자리 등 주로 바느질일을 도왔다. 이 말은 정정화 애국지사의 《장강일기》에 나오는 정현숙 애국지사에 대한 이야기다. 생존해 계시는 오희옥(88살) 애국지사는 아버지와 중국에서 오랜 세월 떨어져 지냈다고 했는데 아버지 오광선 장군은 만주쪽에 남아 활동하였고 가족들은 임시정부를 따라 상해에서부터 중경에 이르는 노정으로 이동하는 고난의 생활을 했던 것이다. ▲ 북만주 흑룡강성에서 바라본 소련땅으로 이 도시 북쪽의 얄롁셰프스크(자유시)에서 참변이 일어났다. (사진 한국근현대사사전 제공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나라현 아스카지방의 한 구릉지에 있는 용개사(지금은 강사岡寺로 부름)는 백제출신 의연(義淵, 643~728)스님이 지은 절이다. 의연스님은 일본 법상종(法相宗)의 시조이며 수제자로는 나라 동대사(東大寺) 초대 주지 양변(良弁) 스님과 살아있는 보살로 추앙 받는 행기(行基) 스님을 비롯하여 현방(玄昉), 도자(道慈), 도경(道鏡), 도장(道場) 스님 등 쟁쟁한 분들이 많다. ▲ 용개사를 창건한 백제 의연승정 (국보) 특히 행기스님은 몸소 제자들과 함께 일본 곳곳에 다리와 제방을 쌓아 백성들의 삶 속에서 실천불교를 전파한 분으로 유명하며 그가 지은 절만도 오사카와 교토 등에 49개사가 현존하고 있을 정도로 고대불교계에 추앙받는 스님으로 일본에서 행기스님을 모르면 일간첩이라 할 정도로 이름난 스님이다. 의연스님은 이렇게 일본불교계에 쟁쟁한 제자들을 둔 분이다. 그래서인지 출생부터 남다르다. 《곤자쿠이야기》설화집에 전해지는 의연스님의 탄생설화 곧 강보에 싸인 갓난아기를 천황이 손수 궁중으로 불러들여 자신의 왕자와 함께 키웠다는 부분은 의연스님이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인물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당시 천지왕(626-672)은 왕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전덕기 선생은 1875년 12월 서울 정동에서 아버지 전한규, 어머니 임씨 사이에서 큰아들로 태어났다. 9살 되던 해 부모 모두를 여의고 숯장수인 삼촌댁 양자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 했다. 17살 되던 해 당시 서울 정동에서 의료선교 활동을 하던 감리회 소속 선교사 스크랜턴과의 만남을 통해 선생의 삶은 결정적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스크랜턴은 1885년 의료선교사 자격으로 내한하여 시병원을 설립하고 민중 지향적 선교를 전개한 인물로서 선생은 그의 민중 지향적 목회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시병원의 고용인으로 스크랜턴의 활동을 돕던 선생은 21살 되던 해 기독교에 입교하여 상동교회 창설사업에 참여하였고, 1902년 마침내 정식으로 전도사가 되었다. 이후 선생은 열정적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한 결과 '민중 전도자'로서의 이름이 점차 교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전덕기 선생 1903년 선생은 상동교회 내에 엡윗청년회를 조직하여 정순만, 박용만 등과 함께 독립협회 해체 이후 흩어졌던 민족운동 세력의 재규합을 위해 힘썼다. 이후 상동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을사늑약 반대, 일제의 군용지 매수반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2014년,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이재선이라고 합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편지를 쓰기 전에 감사인사를 꼭 드리고 싶습니다. 조국 광복을 위해 노력하신 선생님들의 노고가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국적을 가지고 삶을 영위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나라를 잃고, 다른 나라에서 이방인으로서 얼마나 행복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들께서 자신들의 목숨까지 내놓아가며 지키신 이 나라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서는, 제 나름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문화심의회는 6월 20일 <군함도(軍艦島)>로 알려진 나가사키의 하시마(端島)를 포함한 다카지마탄광유적지 (高島炭跡) 등 9건을 사적으로 지적하도록 문부과학상에게 건의했다. 이 밖에 명승 5건, 등록기념물 6건, 중요문화적경관 1건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 유적은 내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위해 정부가 추천한 ”명치일본의 산업혁명유산 큐슈· 야마구치 관련지역으로 올 여름과 가을에 걸쳐서 실시 예정인 유네스코 자문기관에 의한 현지조사 전에 사적지정으로 국가에 의한 보호체제를 정비하는 것이다.” ▲ 과거 하시마탄광이었던 <군함도(軍艦島)> 위는 일본 아사히신문 6월 20일치 기사로 여기서 말하는 <군함도>란 해저탄광지로 일제강점기 때 인구밀도가 수도 도쿄의 9배가 넘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던 곳이다. 탄광이나 금광지역이 활황기 때에는 언제나 광부와 그 가족들 그리고 돈벌이를 찾아 몰려든 사람들로 만원을 이루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군함도>가 단순한 일본인들의 돈벌이 장소였다면 오늘 우리와는 별 관계가 없는 곳이지만 그러나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 수많은 조선인들이 강제징
[그린경제/얼레빗 =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가 독립기념관, 광복회와 공동으로 연병호 선생을 지난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뽑았었다. 선생은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조직하여 임시정부와의 연계역할을 담당하였고,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한국혁명당의 조직 및 신한독립당으로 통합 등 정당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으며, 친일파인 상해거류조선인 회장 처단 활동으로 체포되어 징역 8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1894년 11월 22일 충북 괴산 도안 석곡리에서 태어났다. 민족의식이 남달랐던 형 연병환(1878~1926)의 영향을 받아 1915년 경성기독교청년회관 영어과를 다니며 안재홍, 조용주 등과 교류하고, 조선기독청년회, 조선인유학생학우회 등을 통해 민족현실을 논의하는 등 동지적 유대를 쌓아 나갔다. ▲ 연병호 애국지사 선생이 독립운동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3.1운동 직후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결성하면서였다. 청년외교단의 외교원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의 연계활동을 위해 1919년 말 북간도에 근거를 둔 대한정의단군정사에 합류해 그 역할을 수행하였고,〈외교시보〉를 발행해 국내 인사들에게 내외정세의 동향을 알리는 등 독립운동 2세대로서 적극적인 활동을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기자]구국의 책임이 어찌 남자들만의 몫이겠습니까? 우리 3천만 한국민족 가운데 절반 이상이 여성 아닙니까? 남녀의 역량을 합하여 각기 맡은바 직분과 책임을 다할 때 비로소 아름다운 세계, 진선진미의 한국을 건설할 수 있는 것입니다. - 방순희 선생이 집행위원장으로 활약한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 선언서 중에서 -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방순희 선생을 2014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해 대소련 외교활동을 전개하였으며, 한국독립당 중경구당 간부, 한국애국부인회 부주석,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부원으로 활동하였다. 선생은 1904년 1월 30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했다. 1911년 부친을 따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 그곳에서 성장하며 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1918년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고국으로 돌아와 여성교육의 전당인 정신여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4년 뒤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 신한촌 백산소학교의 교사가 되어 재러 한인 아동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소비에트의 한인학교 폐쇄 정책에 따라 더 이상 교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일본 종이기술은 610년 고구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공식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은 《일본서기》의 고구려 승려 담징이 종이 만드는 기술을 전했으며 이 보다 앞서 513년에는 5경 박사가 백제에서 건너와 한자와 불교를 보급하면서 사경작업이 이뤄졌기에 이 무렵에 이미 종이기술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한다. 이는 일본 위키 사전에 나오는 일본 종이의 유래이다. 일본 종이를 와시(화지, 和紙)라고 하는데 기록상으로만 봐도 1400여년이 지났으니 상당한 기술이 축적 되었을 법하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 그 근거가 되는 것이 바로 대장경을 찍는 종이가 말해준다. 대장경에 관한 이야기는 세종 6년(1424)에 일본으로부터 조선에 건너온 사신들의 단식투쟁 기사가 보이는데 우리들이 조선에 온 것은 대장경을 얻기 위해서이며 만일 경판을 얻지 못할 경우에는 돌아갈 수 없다. 차라리 여기서 식음을 전폐하고 죽어 버리겠다. 는 기록이 그것이다. 당시 일본은 대장경을 만들 능력이 없었기에 조선의 대장경을 숱하게 얻어 갔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전하고 있다. ▲ 일본 종이(和紙)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장경을 요구하기 시작한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번갯불 번쩍 할 때 바늘귀를 꿰어야 한다.며 독립운동을 앞에 놓고 이리저리 재지 말고 곧바로 힘을 모으자고 한 백초월 선생은 승려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백초월(白初月, 1878. 2. 17. ~ 1944. 6. 29.) 선생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승려 신분으로 30대 초반에 큰스님의 반열에 오른 지식인이었다. 3.1만세운동 당시 민족대표로 활약한 한용운, 백용성이 일제에 체포되자 선생은 항일이념인 일심교 전파를 통해 불교 독립운동의 구심체가 되었다. 상해 임시정부와 독립군에게 조달할 군자금 모집 및 용산역 대한독립만세 격문 작성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옥중 순국하였다. 선생은 1878년 경남 고성에서 아버지 백하진과 어머니 김해 김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수원 백씨 26세손으로 소년 시절인 1891년 지리산 영원사로 출가하였다. 해인사에서 경학과정을 마친 후 교종의 최고 단계인 대교사(大敎師) 법계를 받았다. ▲ 백초월 애국지사 선생은 기독교와 천도교 등 여타 종교에서는 3.1운동에 적극 가담한데 반해 불교계가 무관심한 것을 개탄하면서 진관사를 비롯한 전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조선 여성을 무지 속에서 해방한 차미리사 이윤옥 시집살이에 쪼들리는 여자 무식하다고 남편에게 구박받는 여자 집안에만 들어앉아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들 야학에 불러 모아 글 깨우치고 나라의 위기를 가르치길 수십 성상 배우지 않는 게으름으로 조국 광복 논할 수 없어 불철주야 조선 여자 일깨우려 삼천리 방방곡곡 밟지 않은 곳 그 어디랴 무궁화 꽃 심듯 일군 근화학교 왜놈들 이름 바꾸라 총 들이대 바꾼 이름 덕성은 조선 여자교육의 요람 매국의 더러운 돈 한 푼 섞지 않고 깨끗한 조선의 돈으로만 일구어 더욱 값진 학문의 전당 청각장애 딛고 일어나 조선 독립의 밑거름을 키워낸 영원한 겨레의 스승 그 이름 차미리사여! ▲ 미국 스캐리트 신학교 재학시절의 차미리사(1910~1912) 차미리사(車美理士, 金미리사, 1880.8.21-1955.6.1)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 조선 여자에게는 지금 무엇보다도 직업적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부인해방이니 가정개량이니 하지만은 다 제 손으로 제 밥을 찾기 전에는 해결이 아니 될 것입니다. 그것이 영구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