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거리에 불붙은 4월의 혼을 보라 내가 그날 보았던 짓붉은 피의 뜨거운 여울 두 주먹에 정의를 불끈 쥔 거대한 항거를 보라 헛되이 만용을 부리지 않고 그들은 역사와 힘으로 싸웠다 핍박을 향하여 내 던진 장엄한 희생을 보라 -윤후명 역사를 증언하는 자들이여 4.19 힘을 보라 가운데- ▲ 국립 4.19민주묘지 둘레에는 붉은 영산홍이 피어 그날의 붉은 피를 느끼게 한다. 이윤옥 오늘은 4.19혁명 54주년을 맞는 날이다. 번잡한 오늘을 피해 어제 기자는 수유리에 있는 국립 4.19민주묘지에 다녀왔다. 위 시는 4.19민주묘지 한켠 돌 벽에 새겨진 시다. 그날의 함성을 말하는 듯 피를 토해내는 노래들이 돌벽에 가득하다. 돌벽 건너편에는 작은 태극기를 앞앞이 꽂아둔 그날의 희생자들 무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덤 둘레에는 짙붉은 영산홍이 하나둘 피어나 그날 핏빛 영혼들의 자유를 향한 울부짖음을 상기시켰다. 정선학, 광화문 시위 도중 총상(1960.4.19.), 안병달, 경무대 앞서 총상(1960.4.19.) 등 저 마다 저항의 흔적을 안고 불의에 항거하다 숨진 이들이 말없이 잠들어 있는 국립 4.19민주묘지에는 오늘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터졌구나 터졌구나 독립성이 터졌구나 15년을 참고 참다 이제야 터졌구나 피도대한 뼈도대한 살아대한 죽어대한 잊지마라 잊지마라 ▲ 탄운 이정근 선생이 지은 노래비 이는 탄운 이정근(1856. 2.10 ~ 1919. 4. 5) 선생이 지은 노래로 화성시 장짐리에 있는 유적지 기념비에 새겨져 있다. 4월 15일은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제암리교회 학살의 날로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짐리에는 독립투사 탄운 이정근 선생의 유적지가 있어 다녀왔다. 1919년 3월 31일 낮 12시 정각을 기해 저희가 가장 존경하는 탄운 이정근 스승님의 지엄하신 지시를 받아 화성군 7개면에 거주하는 저희 800여 제자들은 머리에 흰갓을 쓰고 손에 태극기를 들고 남녀노유 할 것 없이 구름 같이 모인 군중과 합세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온천지가 떠나갈듯이 부르던 일이 어제일 같은데 어느덧 세월이 52년이 지난 아득한 옛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때 나의 나이는 19세의 철부지 소년이었습니다. 그 당시 스승님을 모시던 제자 800여 명 중 제가 가장 연소자였습니다. 1971년 고 김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생떼 같은 아들딸이 바다 속에 갇힌 지 벌써 만 48시간이 지났다. 어제, 그제 16일 날 지금 이 시각쯤(9시) 그 못된 세월호 선장이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배안의 승객들에게 대피 명령만 했어도 오늘 우리의 가슴이 이렇게까맣게 타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 꼬리만 남은 세월호에서 승객을 구출하기 위해 몸을 던지는 잠수요원들 이 크나큰 참극 앞에 온 국민이 넋을 놓고 있지만 더 기가 막힌 것은 눈앞에 뒤집혀진 배 앞에서 구조의 손을 신속히 써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이런 비극이 초래된 것일까? 4월 16일 오전 8시 48분부터 배의 이상 증후가 있었다고 언론에서는 속속 보도하고 있다. 이상증후 발견 이후 7분이란 귀한 시간을 허비하고 얼간이 선장이 8시 55분 해경에 알렸다. 그래도 그때만 손을 썼어도 이런 참극은 막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국민의 가슴은 미어진다. 아니 못된 선장이 혼자서 살겠다고 빠져나온 9시 30분에라도 배안의 승객을 대피 시켰더라면 대형 참극은 막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국민의 분노가 더 크다. 왜 그놈의 방송은 움직이지 마라라고만 계속 해댔을까? 사건이 난 뒤 미숙하기 짝이 없던 선장과 승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손바닥만 한 가게에서 만드는 양갱이 일본인들을 사로잡고 있다. 한국에는 별로 양갱이 인기가 없지만 일본 동경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키치죠지에는 양갱 하나를 사먹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드는 사람들로 연일 북적인다. 키치죠지라고 하면 100개가 넘는 크고 작은 상점들이 줄지어선 곳으로 상점들 대부분이 규모가 작다. 우리로 치면 전통시장이라고나 할까? 통로도 좁은 이 상점가가 생긴 것은 패전 이후다. 하지만 이곳도 서서히 재개발 붐이 일어 하나둘씩 산뜻한 모습으로 탈바꿈해가고 있다. 이 상점가 한 꼭지에는 일본 화과자(和菓子) 가게 고자나(小ざさ)가 있는데 1평 크기다. 그런데 이 가게의 양갱을 사기 위해서 보통 새벽 4시부터 줄을 선다니 보통 인기가 아니다. 그런데도 하루 150개 한정품으로 팔고 있다. 이렇게 가게가 잘되면 흔히 가게를 늘리고 현대식 설비로 대량 생산을 할 법도 한데 고자나는 다르다. 절대 가게를 늘리지 않을뿐더러 하루 만들어 내는 량도 예전 그대로 150개다. 사먹는 사람들은 좀 감질이 나겠지만 그 까닭은 양갱의 주재료인 팥에 있다. 이 가게에서 쓰는 팥은 한 알 한 알 고르다 시피 해서 선별된 것만을 쓴다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제암리 비극을 온 몸으로 껴안은 김씨부인 이윤옥 해마다 삼월이면 제암리 만세 함성 속에 아련히 들려오는 김씨부인의 애절한 목소리 제국주의 방아쇠 교회 안에 당겨지던 날 어린 핏덩이 끌어안고 피 토하며 숨져간 여인이여 조선의 동포들 불같이 일어나 민족의 이름으로 일제를 꾸짖었노라 제암리 김씨부인 독립의 외로운 길 함께하자고 이천만 동포들 뜨거운 가슴으로 손을 잡았노라 ▲ 총탄에 맞고 불타 죽은 이나 살아 남은 자나 고통은 지속된다 ▲ 3.1운동 당시 각 지방에서 일어났던 만세시위 속보 김씨부인 (1899 ~ 1919. 4.15) 이름도 없는 강태성 애국지사의 아내인 김씨부인은 경기도 화성 사람으로 1919년 4월 5일 향남면 발안(鄕南面 發安) 장날에 일어난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김씨부인은 이날 남편 강태성과 함께 1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모인 발안 장터에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터를 행진하였다. 그러나 출동한 일본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시위대 가운데 3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에 분노한 시위군중은 돌을 던지며 대항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순사부장이 돌에 맞아 죽고, 일본인 거주자들이 부상을 입었다. 이 일로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한국의 절집 체험 곧 템플스테이라는 것이 있는데 일본에도 이와 비슷한 문화가 있다. 슈쿠보우(宿房)가 그것이다. 슈쿠보우는 원래 절에서 스님이나 참배자들을 위해 만든 시설로 스님만을 위한 시설은 따로 소보우(僧房)라고 한다. ▲ 나라현 요시노산 죽림원 숙박 시설인 쇼쿠보우(宿房) 슈쿠보우는 한국의 템플스테이와 조금 성질을 달리하는데 한국의 템플스테이가 절집에 머물면서 사찰 체험을 하는데 치중한 반면 일본의 슈코보우는 원래 절을 순례하는 참배자들이 묵는 곳으로 출발했다. 역사를 보면 헤이안시대 (平安時代,794-1192)에 절과 신사(寺社) 순례객들을 위한 숙박시설로 출발한다. 에도시대(江戶時代,1603-1868)에 들어서면 이세신궁(伊勢神宮)이나 선광사(善光寺) 같은 유명한 곳에 참배하는 대중들이 늘어나 각지의 큰 절이나 신사 안에는 슈쿠보우를 두게 된다. 처음에는 참배객들을 위한 숙박시설이 나중에는 관광객들도 받아들이게 되어 이제는 관광사업의 하나로 까지 발전한 느낌이다. 최근에 고야산 슈큐보우(高野山 宿坊)등에는 고품격의 숙박은 물론이고 음식 또한 우리네 사찰음식처럼 일본 사찰음식인 쇼진료리(精進料理)가 정갈하게 나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총부리도 두렵지 않은 파주의 여전사 임명애 이 윤 옥 심학산 깊은 골 고고한 학 고요히 내려앉은 맑고 고운 땅 교하리 장터에 낭자히 흐르던 핏자국이 웬 말이냐 동포의 가슴에 겨누던 일제의 총부리 맞서 당당히 호령하던 여전사 만세운동 앞장서다 쇠창살 속 갇혔어도 불굴의 그 투지 굽히지 않았어라 ▲ 임명애 애국지사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1920년 초 찍은 것으로 추정) 임명애(林明愛,1886. 3.25 ~ 1938. 8.28)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학자 율곡이이와 청백리 황희 정승의 고장 파주에서도 3․1만세운동은 비껴 갈 수 없었다. 아니 비껴가는 게 아니라 불같이 타올랐다고 해야 옳을 정도로 거센 저항의 역사를 갖고 있다. 파주는 지리적으로 서울 가까이에 자리 할뿐더러 북으로 가는 길목이었으므로 다른 지역에 견주어 서울에서 일어나는 독립운동 활동에 발 빠르게 접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에 있었다. 따라서 파주지역은 3․1만세운동 당시에도 서울의 상황이 잘 전해졌으며, 이는 파주의 3․1만세운동에 일정한 활력소로 작용하게 되었다. 경기도 파주가 고향인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진달래 피는 곳에 내마음도 피어 건너 마을 젊은 처자 꽃따러 오거든 꽃만 말고 이 마음도 함께 따가주 - ‘봄이 오면 산에 들에’, 김동환 작사, 김동진 작곡-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 ‘고향의 봄’ 이원수 작사, 홍난파 작곡- 그랬다. 그리 오래지 않은 예전에 우리가 즐겨 부르던 노랫말 속에는 “진달래”가 단골이었다. ▲ 진해 군항제는 1952년 4월 13일, 우리나라 최초로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북원로타리에 세우고 추모제를 거행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초창기에는 이충무공 동상이 있는 북원로터리에서 제를 지내는 것이 전부였으나, 1963년부터 진해군항제로 축제를 개최하기 시작하여 충무공의 숭고한 구국의 얼을 추모하고 향토문화예술을 진흥하는 본래의 취지를 살린 행사와 더불어 문화예술행사다 (창원시문화관광과 제공)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시절...” 이란 노래로 힛트친 이용복의 노래 속에도 진달래가 나오고,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영변의 약산 진달래를 가시는 걸음마다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나는 비어있다 나를 채우는 것은 바람뿐 무성히 자란 풀을 깎지 마라 향을 피워 내게 절을 하지 마라 내게는 굶주림 내게는 컴컴한 동굴 내게는 바닷고기에 뜯기는 총 맞은 시체 나는 비어 있다 이제는 돌려다오 내 사타구니를 돌려다오 내 젖가슴을 돌려다오 내 속빈 창자를 내 눈망울을 감겨다오 내 이름을 돌려다오. 제주 43평화공원 안 제주 43 국가추념일 공식지정 기념 시화전 꽃비 내리는 봄날에 전시된 김규중 시인의 헛묘 시다. 시인은 내 사타구니를, 내 젖가슴을, 내 속빈 창자를 돌려달라.고 외친다. ▲ 제주 4.3평화기념관 전경 평화로운 섬 제주. 67년전 이 곳에서 역사에 씻을 수 없는 대학살극이 빚어졌다. 제주 주민 아홉 명 가운데 한 명이 살해당한 그 비극의 사건, 이름하여 제주 4․3사건! 그 비극의 역사를 기리는 봉개동에 자리한 제주 43평화공원을 기자는 4․3추념식 하루 앞서 2일 오후에 찾았다. 하늘은 청명했다. 살랑대는 봄바람에 전국에서 제주로 수학여행 온 차들로 주차장은 초만원이었고 그날의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학생들은 삼삼오오 히히덕거리면서 바람의 언덕을 거닐고 있었다.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이것은 지난 3월 8일 필자가 도쿄 고려박물관에서 특강을 했던 항일여성독립운동가를 말한다에 참석한 일본인이 한말이다. 이날 특강 뒤에 고려박물관에서는 설문지를 돌렸는데 설문에 응한 사람들의 글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내용들이 많았다. ▲ 고려박물관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시화전을 관심있게 관람하는 일본인들 이날 특강이 있기 전인 1월 29일부터 이 박물관에서는 여명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항일여성독립운동가를 그린 시화전을 열고 있었다. 이날 그림은 날마다 쓰는 한국문화편지 얼레빗에 오랫동안 한국화를 그려오고 있는 이무성화백이 그린 그림으로 그 바탕은 필자의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헌시 30점을 그린 것이다. 도쿄 고려박물관(관장 히구치이치요우)은 일제의 침략역사를 깊이 반성하는 양심적인 시민들이 만든 박물관으로 올해 23년 째 운영 중이다. 이들은 아베 정권을 비롯한 우익화 되어 가는 일본 사회 속에서 일본의 양심이 되어 꾸준한 한일간의 우호 증진을 위해 애쓰는 단체이다. 일본 최초로 열린 한국의 항일여성독립운동가를 알리는 시화전은 3월 30일로 60일 간의 장정을 마쳤다. 특히 전시기간 중에 열린 3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