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키가 작고 뚱뚱한 대머리 일본군 장교가 딱 버티고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히죽거리기까지 했지요.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강압적으로 나를 끌고 침대로 갔습니다. 나는 말했죠. '절대 이런 짓을 할 수 없어요.' 그러자 그가 '순순히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주마. 정말 죽이겠어!'라고 했습니다. 그러더니 칼을 뽑았습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을 아주 가까이에서 느꼈습니다. 나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를 침대에 집어던지고는 내 옷을 모두 찢어버리고 잔인하게 강간했습니다. 정말 너무나 끔찍한 일이었어요. 나는 고통이 그렇게 심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가 방을 나갔고 나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욕실에 가서 다 씻어버리고 싶었습니다. 그 부끄러움과 모든 더러운 것을. 그저 다 씻어버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 공포를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마치 전류처럼 몸속을 파고 흘러들거든요. 공포는 결코 나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평생 동안 나와 함께 있었죠. 나는 밤이면 그 공포를 여기 내 응접실에 앉아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창밖을 바라보다가 날이 어둑해질 때쯤이면 소름이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노동자 권리 속에 숨겨 부른 독립의 노래 고수복 이윤옥 노란봉 정기 받고 자란 몸 경성에 올라와 푸른 꿈 펴렸더니 가지에 푸른 순 돋기도 전 밑동 잘렸네 방적공장 다니면서 노동자 권리 속에 숨겨 뜨거운 독립의 노래 목터져라 불렀어라 일제에 잡혀 모진 고문 당하지 않았다면 스물 둘 꽃다운 나이 접고 눈 감지 않았을 것을 고향집 동구 밖서 손 흔들던 어머니 귀한 딸 주검에 끝내 오열 터뜨렸네 ▲ 어여쁜 처녀 고수복 애국지사의 수감당시 모습 고수복 (高壽福, 1911 ~ 1933. 7. 28) 고수복 애국지사는 함경남도 정평군 정평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으로 올라와 스무 살 되던 해인 1931년 9월 종방방직회사(鐘紡紡織會社) 경성제사공장(京城製絲工場) 직공으로 입사하였다. 1932년 1월 말 정길성, 김응룡 등과 협의하여 좌익노동조합준비회(左翼勞動組合準備會)를 결성하기 위해 경성부내 각 공장으로 분담 활동을 하였으며, 3월 하순 경성부 팔판동에 거주하는 강응진의 집에서 정길성, 김응룡, 권오경과 만나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한 준비단체인 좌익노동조합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준비위원회의 총책임자에 권오경, 조직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일본 최대 규모의 민영 뉴스통신사 지지통신(時事通信)은 최근 미국과 호주 등에서 위안부 소녀상을 세우려는 움직임에 대해 새로운 파문(新たな波紋)이라는 비판적인 시선으로 보도 하고 있다. 그러나 호주 내에서의 한중(韓中)시민단체의 연대 움직임은 전후 68주년간 참아온 늦은 움직임일 뿐임 결코 새로운 파문이 될 수 없다는게 중론이다. 미국의 위안부 소녀상 움직임 등 최근 아시아인들의 움직임은 일본이 전후(戰後) 위안부 문제를 방치하고 한술 더 떠 아베 수상의 야스쿠니 참배 등 안하무인격 행동에 대한 정당한 응징이며 최소한의 행동일 뿐이란 것을 일본 언론들은 간과한 채 파문운운 표현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보도라는 견해다. ▲ 추운 듯 잔뜩 싸매고 있는 소녀상 (사진 최우성 기자) 일본 산케이신문(産經新聞)은 호주 시드니에 들어설 일본군 종군위안부상(日本軍の従軍慰安婦像)에 대해 싱가폴 특파원 요시무라(吉村) 기자를 통해 호주의 중국계와 한국계 시민단체가 연대하여 호주 최대의 도시 시드니에 위안부상을 설치허가를 지방정부에 냈다.고 전하면서 요시무라 기자가 중국계단체의 양(楊)씨와의 전화 통화 내용을 실었다.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책향기에 빠져 사는 것만큼 행복한 일도 없을 것이다. 오래된 책과 헌책방은 그 개념이 다르다. 쉽게 말하면 오래된 책은 비싼 책이 많고 헌책이란 교과서 같은 일반 단행본류를 떠 올리게 한다. 일본 도쿄에는 이 둘을 다 겸비한 오래된 서점가가 있는데 간다진보쵸(神田神保町)에 있는 고서점가가 그곳이다. 흔히 간다(神田) 서점가라고도 부르는 이곳을 동경 유학시절 글쓴이는 시간 날 때마다 들르곤 했다. 하루 종일 책 구경을 하며 지내도 질리지 않는 곳이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사람이라도 싼 책은 10 엔짜리부터 좀 비싸다고 해도 1천 엔 정도면 사고 싶었던 책을 손에 쥘 수 있어 부담이 적다. 책이란 비싸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필요로 하는 책을 만났을 때 기쁜 것이기에 나는 쓸쓸할 때나 우울할 때, 기쁠 때나 심심할 때 등 틈만 나면 이곳 서점가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좋은 책을 발견하고는 밤새도록 독서 삼매경에 빠지곤 했다. ▲ 도쿄 간다(神田) 고서점가 모습 우리나라에도 청계천일대에 헌책방가가 있긴 하나 일본 간다의 고서적 거리와는 좀 다르다. 우리의 청계천은 교과서나 철지난 소설, 기타류가 많고 오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오빠들이 하던 장기놀이도 군인장기로 변했고, 내가 놀던 기차놀이도 어느새 전차놀이로 변했다. 그 시절은 아이들 놀이조차도 전쟁과 연관된 놀이 일변도였다. 이런 일도 있었다. 죠시가야 공원묘지에 있는 나츠메소세키(일본의 유명한 소설가) 무덤을 타고 노는 놀이도 즐겼는데 관리인들이 내쫓아도 다시 몰래 들어가 높은 묘비석에서 뛰어내리면 2계급 특진 같은 군인들이 하던 행동을 흉내 내며 놀았다 이 이야기는 고모리교오코(小林香子, 1930~현재)씨가 《부인통신》 1월호에 기고한 전쟁 세대에 태어나서라는 글 속에 나오는 내용이다. 《부인통신》은 1953년에 설립한 일본부인단체연합회에서 나오는 잡지로 2014년 1월호로 664회를 맡는 유서 깊은 잡지다. 이 잡지를 만드는 단체는 전후 반세기에 걸쳐서 평화와 민주주의, 여성지위 향상을 위해 일본의 수많은 여성단체와 연대하여 활동하고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진 단체로 극우로 치닫는 아베정권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크게 내고 있다. ▲ 부인통신 편집장 사토사치코 씨, 일본부인단체연합회 회장 시바타마사코 씨, 글쓴이(시계방향)는 3월 7일 도쿄 고려박물관에서 만나 한국인들이 아베정권에 하고
[그린경제/얼레빗 = 도쿄 이윤옥 기자] 3월 9일의 도쿄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마치 가을의 어느 날처럼 말이다. 히비야역에서 내려 황거 뜰을 들어서니 전형적인 일본 소나무 정원이 펼쳐진다. 삼십 여 년 전 지방에서 올라온 일본인들과 함께 처음으로 하토버스(하토란 비둘기를 뜻하며 1일 동경 관광버스)를 타고 황거를 들렀을 때 가이드가 말하길 이곳은 천황폐하가 사시는 곳으로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와보는 곳이란 말이 지금도 선명하다. ▲ 벚꽃 천지라해서 붙은 사쿠라다(櫻田)에 세운 문이라 사쿠라다문이라 부르며 이 문을 다른 말로는고려문이라 부른다. 이 앞에서 이봉창 의사가 일왕의 귀가를 기다리다 폭탄을 던졌다. 이후 일본 답사팀을 이끌고 거의 해마다 들리다 시피하는 황거(皇居)는 올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 그것은 일본인들과 다른 감회일 것이다. 식민지 청년 이봉창과 김지섭 의사가 폭탄을 던져서라도 일제의 조선 침략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그 거룩하고 숭고한 마음은 한 시대 신문에 난 한 장의 기록을 뛰어 넘어 이제는 역사의식을 제대로 갖춘 한국인이라면 동경 방문 길에 누구나 그 현장을 가보고 싶도록 만들었다. ▲ 고려문으로 들어가서 다시 문
[우리문화신문= 도쿄 이윤옥 기자] 일본이 변하고 있다. 아니 우에노공원이 변했다. 기분 좋은 변화다. 어제 찾은 우에노공원의 변화는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이지만 유쾌하고 기쁜 변화였다. 그 내용을 소개한다. 3년 전 기자는 우에노공원 안에 있는 왕인박사 기념비를 찾아보고 기사를 쓴 적이 있다. 기사제목은 “왕인박사 기념비, 내선일체에 이용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덧붙였던 것은 “왕인박사 기념비 앞에 작은 한글 안내 팻말이라도 세워 달라”는 주문이었다. 그리고 기자는 어제 3년 만에 일본 도쿄 고려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시화전” 강연차 도쿄를 방문하여 함께 온 일행들과 공원을 방문해보았다. 시커멓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말없이 서있던 왕인박사 기념비는 방금 목욕을 한 듯 깨끗한 모습이었고 그 앞에는 한글을 곁들인 깔끔하고 예쁜 모습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함께했던 일행들은 왕인박사안내판에 모두 감동했다. ▲ 한글을 곁들인 왕인박사 기념비를 함께 방문한 이무성화백의 그림 안내판에는 한글로 “<고사기>등 사서의 의하면 왕인박사는 백제에서 건너와 <논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래한 학자로서 왕인박사비는 왕인박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흔히 일본전통 과자를 화과자(和菓子, 와가시)라고 하는데 이는 양과자(洋菓子, 요가시)라고 부르는 서양과자에 대한 차별을 하기 위해 생긴 말이다. 한국 같으면 모든 과자는 그냥 ‘과자’라 하고 특히 우리전통 과자만을 한과(韓菓)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일본의 와가시(화과자, 和菓子)는 나마가시, 히가시, 아메가시로 나뉘는데 나마가시는 찰떡류를 말하며 수분이 많아 보존이 어려워 바로 먹어야 한다. 반면 히가시는 딱딱하게 틀에 찍어서 만든 과자로 한국에 알려진 센베이 같은 것을 말하며 아메가시는 엿종류를 말한다. ▲ 3월 3일은 히나인형(왼쪽)을 선물하고, 화과자 히나아라레를 먹는 날 특히 다도(茶道)가 발달한 일본에서 화과자는 차를 대접하는 자리에 빼놓을 수 없는 과자다. 화과자는 모양과 색이 다양하여 거의 예술작품에 가까운 과자도 수두룩하다. 대개 기름지지 않고 담백하지만 설탕을 많이 써서 단편이다. 설탕이 흔치 않던 시절에는 주로 감이나 화삼분(和三盆, 와삼봉)이라고 해서 사탕수수로 만든 정제되지 않은 흑설탕 덩어리를 사용했는데 특유한 향이 있어 지금도 고급 화과자의 재료로 사용된다. 화과자의 으뜸은 뭐니 뭐니 해도 경과자
[그린경제/얼레빗 =이윤옥 기자] 달구벌 만세운동을 이끈 임봉선 이윤옥 조선을 달군 만세운동 달구벌로 치달으매 신명의 처녀 선생 태극기 높이 들고 빗발치는 포탄 속을 두려움 없이 뛰어들어 서문통 떠나가라 외쳐댈 때 밀물처럼 제자들 뒤따랐네 시위 때 당한 고문 끝내 도져 스물여섯 꽃다운 청춘 꽃상여 타고 떠나던 날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초목마저 울었어라. ▲ 앞열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임봉선 애국지사 임봉선 애국지사(1897-1923) 26살의 꽃다운 나이로 삶을 마감한 임봉선 애국지사! 그가그렇게 젊디젊은 나이로 죽어간 까닭은 무엇일까? 임봉선 애국지사는 1919년 3월 8일 대구에서 일어난 38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가 1년의 모진 옥고를 치루고 나와 그 후유증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대구신명고등학교 자료에 따르면 임봉선 애국지사는 1918년 4월 1일자로 교사에 임용되어 대구의 만세운동이 있던 3월 8일 사직한 것으로 되어 있다. 초임 교사 나이 22살 이었고 교사 생활 채 1년도 안된 때였다. 그는 1919년 3월 8일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였고 이 때문에 4월 18일 대구지방법 원에서 보안법 위반 죄목으로 징역 1년을 선고 받았다. 그리고 1923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이순형 선생은 이명시 애국지사의 따님이다. 이순형 선생을 뵌 것은 작년으로 어머니 이명시 애국지사의 자료를 찾다 연결이 되어 뵈었는데대화 중에도조용조용한 말씨와겸손함이 뚝뚝 묻어나는 분이었다. 이번에 시서전에 어머니 이명시 애국지사의 작품이 선보인다고 알리니 단걸음에 달려 오셨다. 한편 이순형 선생의 언니 이영애 선생은 미국에 사시는데 이명시 애국지사님에 대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이기도 하다. 당시 17살이던 어머니는 만세운동 연락책을 맡았는데 나들이 때에는 처네(주로 시골 여자가 나들이를 할 때 머리에 쓰던 쓰개. 두렁이 비슷하게 만들며 장옷보다 짧고 소매가 없다)를 쓰고 다녔으며 늘 약병 같은 것을 갖고 다녔다고 했다. 이는 출입을 감시하던 경찰로부터 불신검문을 당할 것을 대비해 환자에게 약을 전하러 간다고 속이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는 박순천 여사와 함께 감옥생활을 하면서 서로 의지했으며 출옥 뒤에는 만세운동으로 감옥살이 하는 분들의 뒷바라지를 도맡아 했다. 8․15 광복 뒤에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혼자 사는 노인과 고아원을 찾아 봉사활동으로 생을 마감했다. ▲ 이명시 애국지사 따님 이순형 님과 글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