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지구상에서 성씨가 가장 많은 나라는 어디일까? ≪일본지도백과≫에 따르면 미국 150만 개, 일본 27만 개, 중국 500개, 한국 250개로 미국이 1위이고 이어서 일본은 2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 가운데 일본의 통계는 어디까지나 통계일 뿐 실제 일본인의 성씨가 몇 개인지는 확실치 않다. 일본 성씨연구가 모리오카(森岡浩)씨의 말을 빌리자면, 일본에서는 한국처럼 국가가 성씨 조사를 하고 있지 않아 추정치만 존재할 뿐 정확한 숫자는 파악하기 어렵다. 현재 10여만 개에서 30만 개 정도로 추정된다.고 하니 그 차이가 엄청나다. 이렇게 성씨가 많은 까닭의 하나는 다나카 씨의 경우 田中, 田仲, 太中, 多名賀, 他中, 多仲...와 같이 여러 가지 한자를 쓰는데 있다. 이 경우 소리는 다나카지만 이를 각각 하나의 성씨로 셈하면 다나카 하나 만으로도 몇 개의 성씨가 생겨난다. 재미난 현상이다. ▲ 일본의 개똥, 코털, 화장실 같은 재미난 성씨들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일본 성씨의 기원은 헤이안 시대(794-1185) 말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당시는 일부 귀족층에 한해서만 성씨를 쓸 수 있었을 뿐으로 오늘날과 같이 서민층까지 성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진룡, 이하 문체부)가 주최하고 (재)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원장 최정철, 이하 진흥원)이 주관하는 2014년 첫 기획전 공예페스티벌 : 온기가 2014년 2월 11일(화)부터 3월 2일(일)까지 문화역서울284(구 서울역사)에서 개최된다.(가운데 줄임) 전시장 2층은 조각, 미술, 디자인 등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융․복합되어가는 동 시대 예술의 현재로서 전통-현대/공예-디자인의 협업(콜라보레이션)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구성된다. 또한 공예의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의미를 조명하면서 장르 간의 관계와 예술적 결합과 소통이 무엇인가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위는 2014년 2월 11일 치 문화체육관광부의 손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그 모든 것 공예 페스티벌 보도의 일부다. 이오덕 선생은 《우리말 살려쓰기》에서 ~적이라는 말에 대해 단호히 나쁜 버릇임을 지적하고 있다. 무슨 ~적이라고 하는 말은 이제 입으로도 예사로 하게 되었지만 이것이 일본말이고 우리 말을 거칠게 하고 때로는 뜻을 흐리멍덩하게 할 뿐이니 쓰지 않는 것이 좋다. 고 했다. 그러고 보면 보도자료 처럼 사회적, 문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오구라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1870-1964)가 게걸스럽게 긁어모은 한국의 값나가는 유물들은 그의 사후 <보존회>에 의해 보존되다가 1982년 동경국립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유물은 일본의 중요문화재 8점, 중요미술품 31점을 포함한 1,110점이다. 세목을 살펴보면 조각 49점, 금속공예 128점, 도자기 130점, 칠공예(漆工藝) 44점, 서적 26점, 회화 69점, 염색작품 25점, 토속품 2점, 고고시대 유물 557점이다.시대별로는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를 거쳐 통일신라시대, 고려, 조선에 이르는 전 시대를 망라하고 있다. 특히 고고유물(考古遺物)은 낙랑시대와 삼국시대의 고분출토품인 기와류와 통일신라시대의 귀중한 금속공예와 토기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고분출토품’이라는 말인데 고분이란 주로 왕릉이나 고대 통치자의 무덤을 말한다. 국보급 문화재를 싹쓸이해간 것도 용납할 수 없거늘 신성한 왕릉을 파헤쳐서 문화재를 약탈해갔으니 그 패륜적 행위를 어찌 말로 다하랴!《잃어버린 조선문화유산, 동경 고려박물관 발행》18쪽에 보면 “오구라 콜렉션은 도굴과 무관하지 않다.”라고 써 놓았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훈춘에 곱게 핀 무궁화 꽃 김숙경 젖먹이 어린 핏덩이 밀치고 남편 간곳을 대라던 순사 놈들 끝내 다문 입 모진 고문으로도 열지 못했지 구류 열흘 만에 돌아온 집엔 엄마 찾다 숨진 아기 차디찬 주검 위로 차마 떠나지 못한 영혼 고추잠자리 되어 맴돌았지 활화산처럼 솟구치던 분노 두 주먹 불끈 쥐고 뛰어든 독립의 가시밭길 아들 딸 남편 모두 그 땅에 묻었어도 항일의 깃발 놓지 않던 마흔 네 해 삶 훈춘의 초가집 담장 위 한 송이 무궁화 꽃으로 피어났어라. *이윤옥 시 - 훈춘에 곱게 핀 무궁화 꽃 김숙경- 함경북도 경원군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어난 김숙경(金淑卿, 1886. 6.20 ~ 1930. 7.27)애국지사는 열한 살 나던 해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이웃집 소년 황병길에게 시집을 갔다. 두만 강변에 자리한 경원땅은 그 무렵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해 국모인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도탄 속에 빠진 조선인들이 살길을 찾아 중국 연변으로 이민 가는 길목이었다. 그 가운데는 풍전등화의 조국을 건지기 위해 구국의 뜻을 품은 애국지사들도 많았는데 남편 황병길은 어린 마음이지만 그들의 영향으로 나라를 구하는 일에 자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무슨 소리를 해보았자 그들이 지른 제암리의 불은 이제 와서 끌 수 없고 교회 안에 모였던 스물 여덟 명의 형제를 살려 낼 수 없다 왜병 중위가 이끄는 악마의 한 떼거리가 어진 백성을 교회당 안에 몰아넣고 난사했다 살해했다 -박목월 제암리 참살 가운데서- 해방 직후 친일재산을 환수했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을 그냥 놔두는 바람에 친일파나 그 후손들이 백 년 동안 이미 재산을 불리고 또 불렸다. 이번 환수되는 것도 이미 그들이 팔아먹고 남은 일부일 뿐이다. 이제라도 철저한 조사를 거쳐 모든 친일재산을 환수해야만 한다. 위는 7일 친일파 이해승의 손자가 낸 재산환수 반환소송 사건의 국가 일부 승소 판결에 대한 이항증 광복회 경북지부장(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국무령 이상룡 선생의 후손)의 말이다. 100년간 나라 팔아먹은 돈으로 부를 누린 사람들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재산환수 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어찌 이항증 선생 혼자만의 외침이랴! 국난의 시기에 재산을 다 털고 목숨까지 바쳐 나라를 지켜낸 사람들이 있는 가하면 이번 재판에서처럼 조상이 나라 팔아먹은 돈으로 수백, 수천억 원을 주무르며 아무런 죄의식 없이 평생을 호화호식 한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진보쵸 역 내려 와이엠시에이 가던 날 빌딩 숲 도로변 팬지꽃 반겼지 한국말 유창한 다즈케 교장 선생님 나그네 반기며 손잡고 안내한 10층 자료실 누런 낡은 신문지 속 2.8독립운동에 빛나던 영광의 얼굴 최팔용, 김도연, 백관수... 스물일곱명 내란음모죄로 잡혀가던 조선 청년들 팔 벌려 보듬어 준 사람 후세다츠지 마수 땅 와이엠시에이 하느님 보호하사 조선독립만세 열여덟 먹던 해 미야자키 농촌에서 청운의 변호사 꿈꾸며 후세 변호사 말했다지 높은 관직 보다 바른 일하며 살고 싶다고 군국주의 더러운 진흙 속에 핀 청아한 꽃 한 송이 후세 변호사 길이길이 그 이름 기억할지니 기억할지니. ▲ 1931년 무렵 후세다츠지 변호사 “부산발 경성행 열차 안에서 일본인들이 무조건 조선인을 하대(下待)하는 것을 보았다. 기차가 지나가는 역 주변에 있는 근사한 조선가옥은 정말 조선인들을 위한 가옥일까? 경성에 2,3층으로 양옥집들이 들어서고 있지만 과연 그것들이 조선인의 삶과 관계가 있을까?” 1923년 8월 3일자 동아일보 <신인의 조선인상(新人의 朝鮮印象)>에서 일본인 변호사 후세다츠지(布施辰治;1890-1953)는 그렇게 조선의
▲ 고구려 금동미륵반가상 국보 제 118호 (한국 호암미술관 소장)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일본인 가운데 일제의 조선침략으로 큰 덕을 본 사람은 누구일까? 한마디로 잘라 말하기 어렵지만 조선문화재를 싹쓸이한 부류도 그 속에 속할 것이다. 조선땅에 일찌감치 건너와 조선인이 누려야할 온갖 이권을 손아귀에 움켜쥐고 취득한 돈으로 국보급 문화재를 싹쓸이해 가지고 간 사람들! 그 가운데 한사람이 오구라타케노스케(小倉武之助 1870-1964)다. 동경국립박물관 안에는 그의 이름을 딴 오구라콜렉션이 있을 정도다. 일본 최고, 최대의 박물관인 동경국립박물관의 오구라콜렉션에는 오구라가 조선에서 갈취한 국보급 문화재를 포함한 조선유물이 총 1,110점에 이른다. 오구라는 동경제대를 나와 1903년에 대구로 건너오게 되는데 그는 조선에서 전기사업, 금융업에 손을 대 막대한 부를 움켜쥐게 된다. 그 돈을 가지고 그는 9세기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비로자나불입상을 비롯한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를 수집하는데 질과 양적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 할 만큼의 수량이다. ▲ 9세기 통일신라시대 금동비로자나불입상 (현재 동경박물관 오구라콜렉션 소장) 처음에는 정당하게 미술상으로부터
[그린경제/얼레빗 = 이한꽃 기자] 1919년 고종황제의 국상 때 나는 17살 소녀였다. 그날 나는 대한문 앞에서 큰 갓에 거적을 깔고 통곡하는 동포들 틈에 끼어 나라 없는 설움과 일인들에 대한 분노가 북 받혀 올라 목숨이라도 바칠 각오로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이날 대한문 앞에서 만세운동을 한 사실이 학교 측에 발각돼 다음날 직원실로 끌려갔다. 담임선생과 훈육 선생은 나에게 무릎을 꿇게 하고 의자를 들고 서있도록 하는 엄한 벌을 주었다. 일인교사들은 펄쩍 뛰면서 이후 덕수궁 쪽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꾸짖었다. 내나라 임금이 돌아가셨는데도 마음 놓고 울지도 못하는 가련한 백성! 이날의 사건은 어린 나에게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다시없는 밑거름이 되었다. -제남일보, 최정숙 증언 내가 걸어온 길 가운데서 1973.9.17 - 1902년 제주 삼도리에서 태어난 최정숙 (崔貞淑,1902. 2.10 ~ 1977. 2.22)애국지사는 제주 신성여학교(현, 신성여자고등학교, 교장 남승택)를 1회로 졸업한 뒤 당시로는 쉽지 않은 서울 진명여학교로 유학을 왔다. 당시 제주도에서 서울유학이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지만 어린 정숙은 법조인이었던 아버지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도쿄 오오츠카역(大塚驛)에서 와세다대학까지는 동경 순환선인 JR야마노테선(山手線)을 타면 그만이지만 이 역에는 이 전철 말고도 1량짜리인 이른바 땡땡 전차가 서는 곳이라 나는 학교에 가는 날이면 이 전철을 타고 다녔다. 옛날에 경성시내를 달리던 전차 같은 분위기의 이 전차는 달랑 1량짜리로 와세다대학에서 미노와바시까지 달리는 전차로 정식이름은 토덴아라카와센(都電荒川線)이지만 동경 사람들은 이를 땡땡 전차(일본말로는 친친덴샤 ちんちん電車)라고 불렀다. 철로 곁이 바로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라 행여 철로로 뛰어드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운전사가 땡땡(친친)하고 벨을 울려 붙은 이름이다. 서울에서 전차가 모두 사라지고 지하철과 전철이 들어섰듯이 일본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특이하게 일본에는 이런 땡땡 전차(노면전차, 路面電車)가 전국적으로 그 시대의 낭만을 지우기 아쉬운 듯 여전히 달리며 사랑받고 있다. ▲ 동경의 명물 땡땡전차는 와세다대학에서 미노와바시까지 달린다. 홋카이도나 가마쿠라 그리고 교토의 광륭사 등에서도 1량짜리 전차를 만날 수 있는데 지역에 따라서는 옛 정서를 자아내는 추억의 낭만 전차 일 수 있겠지만 도쿄의 땡땡 전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일본사람들은 벤토(도시락)를 즐겨 먹는다. 편의점에 가면 손쉽게 사먹을 수 있도록 비닐그릇에 다양한 내용물을 담아 파는가 하면 철도역마다 에키벤(驛弁)이라고 해서 각 지방의 특산물로 요리한 도시락이 여행객들을 즐겁게 한다. 그런가하면 가정집에서도 초밥 도시락을 주문해서 먹는다. 이때의 도시락은 우리가 생각하는 작은 도시락이 아니라 보통 찬합이라 부르는 큰 그릇에 담긴 것으로 손님이 왔을 때도 이것을 시켜준다. 한국에서는 도시락이라고 하면 야외나들이 갈 때 김밥 따위의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쯤으로 여기지만 일본의 도시락은 그것 보다는 훨씬 다른 차원의 음식으로 이를 벤토문화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다양하다. ▲ 편의점 등에서 파는 벤토(왼쪽) 부인이 애교스럽게 싼 벤토 벤토(弁當)라는 말은 중국 남송시대(南宋時代)의 변당(便當)에서 유래한 말로 예전에는 한자를 변도(便道), 변도(辨道)라고도 썼다. 이러한 벤토는 풍신수길시대인 안도모모야마시대(安土桃山時代, 1573-1603)에는 오늘날과 같은 칠기(漆器) 도시락이 선보였다. 그러나 일반 서민이 쓰기보다는 꽃놀이(花見)이나 차모임(茶會) 같은 때 귀족들이 주로 썼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