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후쿠오카 이윤옥 기자] 일명 담징스님의 맷돌로 일컬어지는 맷돌을 보기위해 후쿠오카 관세음사(福岡 觀世音寺, 간제온지)를 찾았다. 12월 7일의 초겨울 날씨 치고는 매우 포근했고 날씨도 맑았는데 절 입구의 붉은 단풍나무가 아직도 고운자태를 보여 한국의 11월 날씨처럼 느껴졌다. ▲ 후쿠오카 관세음사(간제온지) 본당 관세음사는 큐슈지방의 대표적인 고찰로 절의 첫 삽을 뜬 시기는 666년이다. 이곳은 나라의 동대사(東大寺), 관동의 약사사(藥師寺)와 더불어 일본의 삼계단(三戒壇, 계를 주는 단)이 설치되었던 주요 절이다. 또한, 이 절에는 698년에 주조된 교토 묘심사의 동종(銅鐘)보다 앞선 일본 최고(最古)의 동종과 함께 국보급 불상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 가운데 담징스님의 맷돌은 단연 돋보이는 유물이다. 절의 주지이자 서남학원대학 문학부교수인 타카쿠라(高倉洋彰) 씨의 《태재부와 관세음(太宰府と觀世音), 1996》에 따르면 이 맷돌은 610년 고구려에서 온 승려인 담징이 처음 만든 것으로 이것이 그 실물이다. 이 맷돌은 식용의 가루를 가는 용도가 아니라 가람 건립 때 사용되는 적색안료인 주(朱)를 생산하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밝히면서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3․1운동의 꽃 해주기생 문재민 이윤옥 조선기생 샤미센에 게이샤 흉내 낸다고 기무라 씨 빈정대지 마소 붉은 입술 꽃단장에 해주 처녀 술 따르고 노래한다고 기무라 씨 흉보지 마소 오늘도 웃음 파는 해주기생 영혼의 창에 드리운 해맑은 햇살 우국충정 일편단심 분홍저고리 남치마 속 깊이 감춘 광복의 꿈 뉘라서 알랴! *일제강점기 조선에 와서 기방(妓房)을 찾은 기무라(木村一朗)는 일본기생이 연주하는 샤미센을 조선기생이 연주한다면서 조선기생 답지 않다고 훈수하고 있다. ▲ 한국화가 이무성 그림 문재민(文載敏, 香姬, 馨姬 1903. 7.14 ~ 1925.12.)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태어나 16살 되던 해인 1919년 4월 1일, 문재민은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동료 기생들을 모아 해주읍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31운동은 남녀노소직업의 귀천을 불문하고 거족적으로 일어난 것이었지만, 특히 기생들의 참여는 31운동의 의미를 더욱 값지게 하는 것이었다. 문재민은 동료 기생들과 함께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그린 태극기를 들고 해주 종로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종로를 출발하여 남문으로 행진해
[그린경제/ 얼레빗=이윤옥 기자] 1392년 조선개국과 함께 창건된 경복궁은 이후 경회루, 자선당, 흠경각 등의 크고 작은 전각을 추가로 지어 명실상부한 궁궐의 면모를 보였으나 1900년대의 민족 수난기를 맞아 1927년 조선총독부가 흉물스럽게 들어서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1915년! 조선이 일본에 강제 병합(1910년 8월 29일)된 지 5년째 되는 해로 일제는 이 조선통치 5년을 기념하기 위해 2년 전부터 골똘한 궁리에 들어간다. 궁리 끝에 1913년 통치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라는 행사를 하기로 결정하고 1913년 제국회의에서 예산을 책정하여 장소를 경복궁으로 정하는 총독부 고시령을 1913년 8월 6일 내린다.조선물산공진회란 한마디로 박람회를 뜻하는 것으로 조선의 상징이었던 경복궁을 박람회장으로 꾸며 더 이상 궁궐에 대한 미련을 두지 못하도록 철저한 계산 하에 궁궐 파괴에 몰입한 것이다. ▲ 경복궁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총독부박물관을 세워 조선 각지에서 강제 수집한 것들을 전시하는 이른바 물산전을 열면서 뽀얀 기생 포스터를 내걸고 있다. 예산이 확보되자 총독부는 곧바로 경복궁을 오늘날 무역박람회장처럼 꾸미기 위해 멋대로 기존 전각을 허물고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북해도(北海道)》란 책이 있다. 신촌(서대문구 창천동) 버티고빌딩 2층에 있는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에서 빌린 책이다. 이곳에는 일본전문도서관이 있어 국내에서 쉽사리 일본관련 책과 디브이디(DVD)를 접하기 어려운 한국인들에게는 매우 유용한 공간이다. 강의용 디브이디를 빌리러 갔다가 신간 책꽂이에서 발견한 이 책은 지난 8월에 나온 책으로 고향 문학산책 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연붉은 노을로 표지를 장식하고 아무 군더더기 없이 북해도라고 되어 있어 북해도의 무엇을 다루고 있나 하는 호기심이 있어 빌려왔으나 내용은 북해도를 소재로 한 여러 작품을 골라 일부를 싣고 거기에 해설을 덧붙인 책이다. 기대와는 달랐지만 더러더러 흥미로운 부분도 있었다. ▲ 《북해도(北海道)》책 표지 흔히 북해도라고 하면 겨울의 눈축제(유키마츠리)나 아이누 족을 떠 올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책의 부제가 말해주듯 문학 속에 비친 북해도의 모습은 춥고 황량한 겨울 이미지와는 약간 다르다. 라일락은 일본 원산지 나무가 아니다. 원산지는 터키반도에서 유럽남동부 발칸반도 일대다. 라일락은 영어 이름이고 리라는 프랑스 이름이다. 라일락의 일본 이름은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장강에 도도히 흐르는 물결 거스름 없이 기강 토교 중경 발길 닿아 머무르는 곳 따스한 봄바람 되어 이웃을 감싸주던 님 조국을 되찾는 일에 쟁쟁한 독립투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단상에 서서 독립을 염원하던 그 자태 그 씩씩함 겨레의 든든한 맏누님 되신 이여! 어루만진 동포의 쓰라린 가슴이 몇몇이며 따뜻하게 감싸주던 고독한 독립투사 또 몇몇이랴 사나이 태어나 이루지 못할 대업 여장부 몸으로 당당히 살아낸 세월 그 늠름하고 당찬 모습 조국이여 오래도록 잊지 마소서. ▲ 한국혁명여성동맹창립총회 회장 방순희 애국지사 (1940.6.17), 앞줄 가운데 (○)한 이 (사진제공 오희옥 여사) 방순희(方順熙, 方順伊, 1904.1.30-1979.5.4)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이라면 오늘날의 국회의원이다. 하지만 나라 잃은 임시정부 하에서의 의정활동은 많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1940년 9월 중경 이전 당시 임시의정원의 전열을 가다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래 표에서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임 시 의 정 원 의장 김붕준 부의장 최동오 의원 이시영김구조성환조소앙조완구차이석송병조엄항섭양묵신공제 문일민민병길홍진이청천조경한신환방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물건을 사면 담아주는 비닐 봉투나 종이 가방 같은 것이 나오기 전에는 일본에서도 후로시키(風呂敷, 보자기)가 쓰였다. 일본 보자기의 기원은 나라시대(奈良時代,710-794) 정창원(正倉院) 소장품 가운데 보자기 같은 것이 보이는데 부가쿠(舞樂, ぶがく, 전통적인 무대 예술)을 할 때 입던 옷을 싸놓았던 것이 보자기의 시초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보자기 형태라기보다 보자기 안쪽에 옷을 고정하는 띠를 붙여 놓은 것이라 보자기로 보아야 할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헤이안시대(平安時代,794-1185)로 오면 히라츠츠미(平包)라고 해서 보자기에 서민들이 옷을 싸가지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재미난 것은 이 시대 목욕 문화와 보자기가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는데 후로시키(風呂敷, 보자기)라는 말도 후로(목욕)라는 말이 들어 있어 목욕과 관련이 있음을 암시한다. 이 당시에 목욕은 단순히 신체를 깨끗이 하는 뜻 말고도 마음을 닦는다는 뜻이 있어서 알몸으로 목욕탕에 들어가지 않고 흰옷을 걸치고 욕탕에 들어갔다고 전해지는데 욕탕 앞에서 보자기에 별도로 싸가지고 간 흰 옷으로 바꿔 입었다. 흰옷으로 갈아입을 때는 바닥에 보자기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조선총독 사이토를 처단하라 이신애 이윤옥 천마산 산마루에 높이 뜬달 만월대에 아름답게 비추고 선죽교 임 향한 일편단심 드높은 곳 개성 호수돈여학교 아리따운 소녀 빼앗긴 나라의 운명에 목숨 걸었다 사이토마코토 처단하자는 피맺힌 강우규 동지의절규 도와 죽음도 불사하고 뛰는 심장 멈출 때까지 목 놓아 불렀을 광복의 노래 그 노래 그쳤으나 가신 곳 가신 날 모르는 님의 소식 안타까워라 ▲ 이신애 애국지사가 수감되었던 서대문형무소 이신애(李信愛, 1891.1.20 ~ 미상) 31독립운동 때 서울에서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하였으며 1919년 9월 강우규가 조선 총독 사이토마코토(齋藤實)를 처단하기 위해 서울에 왔을 때에는 한기동과 함께 강우규를 수차에 걸쳐 방문하여 거사에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초순에는 한기동의 권유에 의해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고, 이 단체가 주도한 독립만세시위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 등의 활동을 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이신애 애국지사는 1919년 10월 6일 '총독에 관한 흉행범인 체포의 건'을 시작으로 부터 1926년 6월 16일 일본외무성 문서의 '간도 및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일본인이 정원에서 가장 좋아하는 나무는 남녀불문하고 소나무입니다. 일본인은 정원에 소나무 한그루를 심고 그 옆에는 작은 길을 만들고 맑은 시냇물이 흐르게 합니다. 이런 것이 전통적인 일본 미학의 기본적인 형태이며 이러한 일본인의 소나무 사랑은 아마도 오래된 회상(回想)에서 기인한 것일 겁니다. 위는 평론가이자 교토대학 교수였던 타다미치타로(多田道太郞, 1924-2007)가 그의 책 《신변의 일본문화, 身邊の日本文化》에서 한 말이다. 그는 왜 소나무를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나무라고 보았을까? 그는 말한다. 일본인들은 신이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보았는데 그냥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소나무를 의지해서 땅으로 내려온다고 믿었다. 이를 의대(依代)라고 한다. 의대가 없으면 신은 내려오지 않는다. 그래서 정원에는 소나무를 심고 연극을 할 때는 무대 뒷면에 소나무를 그리는 것이다 타다미치타로 교수의 이론대로라면 소나무는 신을 맞이하기 위한 신목(神木)인 것이다. 그러나 신이 나무를 타고 내려온다면 구태여 소나무여야 할 까닭은 없지 않은가. 한국의 무당집 앞마당에는 키 큰 대나무를 심어두는데 이 나무를 통해 신이 내려오는 것으로 믿은 때문이다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지금도 삼정사의 가람과 부속건물들은 규모가 커서 넓디넓은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보려면 한나절은 족히 걸릴 텐데 오오토모 씨가 창건할 당시에는 얼마나 컸을까 짐작이 가질 않는다. 특히 지금은 삼정사 경내와는 다소 벗어나 있는 신라선신당까지 모두 삼정사 안에 소속되어 있을 당시의 가람크기는 상상 할 수 없을 만큼의 큰절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삼정사에서 눈여겨 볼 곳은 아무래도 신라인 원진스님의 무덤인당원(唐院)과 우물 그리고 범종일 것이다. 중요문화재인 절 입구의 인왕문에서 걸어 들어가면 우리나라 대웅전에 해당하는 금당이 나오고 금당을 따라 올라가면 역대 일왕들이 태어났을 때 사용한 우물인 삼정의 영천(三井 靈泉)인 아카이야 (閥伽井屋)가 나온다. 그 길로 곧장 올라가는 길에 영종당(靈鐘堂)이 있는데 여기에는 나라시대의 종으로 알려진 커다란 범종을 보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 지증대사 원진이 잠들어 있는 당원 입구 이 범종은 삼정사와 쌍벽을 이루던 연력사 승려들이 산문파(山門派)와 사문파(寺門派)로 갈라져 싸우던 시절에 변경이라는 스님이 윗 절인 연력사로 가지고 갔는데 종을 칠 때마다 ‘돌아가고 싶다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러시아의 바이칼 호수에 견줄 만큼 드넓은 비파호수를 끼고 있는 시가현(滋賀県)은 예로부터 물이 좋아 기름진 옥토가 많고 쌀이 맛있기로 소문난 곳이다. 이곳에 삼정사와 백제사 등 천년 고찰이 자리 잡고 있는데 천년 고찰과 더불어 가을철 단풍으로는 일본 최고로 알려져 있어 가을철이면 숙박시설이 동이 날 정도로 일본 전국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다. ▲ 삼정사 본당에 한무리의 답사단이 참배 중 삼정사(三井寺, 미이데라)가 자리한 시가현(滋賀県) 오오츠(大津市)는 천년고도 교토 동쪽에 자리하며 고대에는 오우미(近江)로 불렸다. 삼정사의 원래 이름은 원성사(園城寺, 온조지)로 이 고장은 백제인 오오토모(大友) 씨들의 근거지였다. 오오토모 씨는 《일본서기》에 따르면 아치노오미(阿知使主)의 후손인 백제계 도래인들로 황실과 깊은 관계에 있었던 호족이다. 이들이 정착한 이 일대에 천지왕은 오오츠궁(大津宮)을 세웠고 불심이 깊었던 그는 미륵보살을 모시는 절을 세우려고 발원했으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 원래 원성사이던 절이 삼정사로 바뀌었다.사진은 글쓴이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 아들 오오토모황자(大友皇子, 후에 弘文天皇)도 숙부